<기획연재> 삼국비사 (23) 항복

  • 황천우 작가 shs@ilyosisa.co.kr
  • 등록 2017.03.06 10:05:31
  • 호수 1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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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했지만…목숨이 위태롭다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흥수가 막사로 들어가자 서천이 바로 백기를 전했다.

“무슨 의미요?”

알면서도 그 사유를 묻는 흥수가 의아하다는 듯 서천이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항복한다는 뜻입지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겠다는 말입니까?”


흥수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천을 응시하자 얼굴이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도저히 승산 없다고 판단한 성주께서 진중하게 항복을 제안하셨습니다.”

“하기야 신라는 조만간 백제 수중에 떨어질 터이니 미리 항복하는 일이 차라리 현명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좋소. 그렇다면 항복 조건은?”“물론 목숨이지요. 성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목숨 말입니다.”

“단지 그겁니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흥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스스로 항복하는 자의 목숨을 보장하는 일은 당연하건만 어째 이상하게 들립니다. 단지 목숨만이라니요.”

“정말입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주면 족하다 했습니다.”

“그 후에 직위 등 반대급부는 전혀 생각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그렇습니다, 군사!”

서천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 그리고.”

“주저 말고 말해보시오.”

“이곳에 투항한 검일 일행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어제 투항하자마자 사비성으로 갔소. 그곳에서 좋은 여건과 풍성한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될 것이오. 원한다면 그대들도 그리 조처해드리겠소.”

“저희들이야 그저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러니 그 부분까지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서천이 표시 안 나게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다른 필요한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다른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다만 혹시 목숨을 보장한다는 증표를 서류로 만들어주실 수 없는지요.”

“서류로 말이오?”

“다른 뜻은 없고 그저 모든 사람들이 의기투합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드리리다.”

흥수가 바로 자신의 명의로 글을 써서 서천에게 건넸다.


서찰을 받아 든 서천이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서천이 돌아오자 품석이 다시 죽죽과 용석을 불렀다.

“자네가 다녀온 일을 직접 고해보게.”

품석의 지시에 서천이 두 사람을 번갈아 주시하고 헛기침했다.

“백제군의 장수를 만나 우리들의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신라는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항복하고자 하니 우리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그쪽에서 뭐라 합디까?”

죽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리자 서천이 거들먹거리며 흥수가 써준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백제의 군사인 흥수의 친필 확인서입니다.”

“군사라니요, 장수를 만났다 하지 않았소?”

“물론 장수도 함께 만났지요.”

“그런데 왜 군사의 증표요?”

“그야 모든 군율은 군사가 결정하니 그런 것 아니오.”

장수를 만났다는 말이 의심이 들면서도 죽죽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 이제 우리 모양새 좋게 모두 항복했으면 하네.”

항복을 되뇌던 죽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기한 바 있지만 소장은 결코 항복할 수 없소. 그러니 그대들이나 가서 항복하시오. 나는 뜻을 같이하는 병사들과 최후까지 일전을 불사하겠소.”

“정녕 양보할 수 없는가?”

“양보라니요. 군인이 전투에 임하면 사생결단을 봐야지 항복이 다 뭐란 말이오!”

항복이냐 항전이냐…항복 택한 대야성
성난 검일과 모척…김품석의 운명은?

“용석 자네는 어찌할 텐가?”

질문을 받은 용석이 품석과 죽죽을 번갈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장 역시 군인으로 항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소장은 죽죽과 마지막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성주의 명령이라면 어찌할 텐가!”

죽죽이 명령을 되뇌며 피식거렸다.

“지금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오!”

죽죽이 소리를 높이자 용석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항복하고자 한다면 빨리 움직여주기 바랍니다. 병사들 마음 위축시키지 말고 오늘 중으로 항복할 사람들은 모두 가주십시오. 괜히 병사들 소요를 부추기면 이번에는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용석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칼집에서 칼을 뽑아 탁자에 내리 꽂았다. 

그날 오후 품석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성문을 나서 백제 진영으로 향했다.

백제 진영에 당도하자 막상 맞이하기로 한 윤충과 흥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일반 병사들이 품석의 가족을 다른 사람들과 분류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서천이 앞으로 나섰다.

“어찌된 게요. 윤충 장군과 군사는 어디 있소?”

“두 분은 지금 성주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답하는 병사의 말을 전하자 품석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분류가 마무리되자 병사들이 품석 가족과 서천을 따로 안내했다.

“성주님,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겁니다.”

“알았네. 자네만 믿네.”

오래지 않아 한 막사 앞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품석과 서천만을 안내했다.

막사에 들자 윤충과 흥수가 의자에 앉아 들어오는 그들을 유심히 주시했다.

“자네가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이란 자인가?”

낮으면서도 위엄 있는 윤충의 음성에 일순간 품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쥐새끼야, 말이 들리지 않느냐! 지금 우리 장군께서 네 놈이 김품석이란 쥐새끼냐고 묻지 않느냐!”

흥수의 일갈에 품석은 물론 서천의 얼굴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주둥이가 막혀 말을 못하는 모양인데. 여봐라, 찢어라!”

윤충의 고함에 그제야 모든 정황을 간파했는지 품석이 무릎을 꿇었다.

그를 살피던 서천 역시 급히 꿇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뭐라, 살려 달라. 허허, 과연 쥐새끼로고!”

윤충이 혀를 차자 흥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목숨을 구걸한다는 말이냐?”

“장군과 군사께서 목숨을 보전해 준다 하여.”

힘들게 말한 품석이 서천을 쳐다보았다.

“물론이다, 내 너를 살려주기로 약조했었다. 그러나 성을 통째로 들고 항복하는 조건이었음을 다시 주지시키지 않아도 되겠지?”

“목숨만은 부디.”

서천이 급히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하여 흥수의 다리에 매달렸다.

“저는 그저 이자가 시킨 대로 한 죄밖에는 없사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서천이 머리를 맨 땅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과연 쥐새끼들이로고! 여봐라, 꼴도 보기 싫으니 이 두 놈을 끌고 나가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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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상 오를 그 밥에 그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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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인 기세를 앞세워 쟁점 법안들을 한순간에 처리하려고 한다. 수많은 위험과 과제를 풀어야 하는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엔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주요 후보 4명이 출마할 예정이다. 약점도 4인 4색이다.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다음 달 19일 충북 청주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국민의힘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임기 만료로 물러난 이후 주목받았던 유력 당권주자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한동훈 전 대표 ▲안철수 의원 ▲나경원 의원 등 4명이다. 이어 친한(친 한동훈)계 좌장으로 알려진 6선 조경태 의원과 장성민 경기 안산갑 당협위원장도 출마를 선언했다. 돌고 돌아 4파전 예고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에겐 매우 어려운 숙제들이 수북하게 쌓여 기다리고 있다.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새 정부 출범 직후의 기세와 압도적인 의석수를 토대로 ▲노란봉투법 ▲방송 3법 ▲농업 4법 ▲상법 추가 개정안 등 쟁점 법안을 이달 임시국회에서 서둘러 처리할 예정이다. 아울러 지난달 11일엔 검찰을 완전히 폐지한 후 기존 권한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옮기는 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의 의석수는 107석에 불과해서 실질적으로 해당 법안을 막을 힘이 없다. 또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가능성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민주당 당 대표 유력 후보 중 1명인 박찬대 전 원내대표는 지난 8일 국민의힘을 겨냥해 “내란범을 배출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끊는다”는 내용이 담긴 법안을 발의했다. 이를 놓고, 박 전 원내대표는 “아직도 반성 없이 내란을 옹호하는 정당에 국민 혈세가 투입돼 내란을 옹호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내란 종식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당해산심판 청구 및 인용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도록 위협하면서 자금줄을 끊는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건희 특검팀은 같은 날 지난 2022년 재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자택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특검팀은 지난 7일엔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의 출국을 금지했다. 특검의 수사 상황에 따라 ‘줄초상’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승부수로 제시했다가 좌초된 5대 개혁안에 담긴 국민의힘의 체질 개선 문제도 새 당 대표의 골머리를 썩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 친윤(친 윤석열)계는 5대 개혁안을 좌초시키면서 친윤계 일원인 송언석 의원을 원내대표로 당선시키는 등 여전한 힘을 드러냈다. 5대 개혁안 중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추진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국민의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안건이었다. 신임 당 대표가 이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숙제는 내년 6월 진행될 지방선거다. 국민의힘이 승리할 가능성은 벌써 낮게 진단되고 있다. 실제로 패배하면, 다음 달 선출되는 당 대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숙제와 뻔한 죽음이 예상되는 ‘독이 든 성배’라고 할 수 있다.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4명은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정치인들로 이들 모두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앞으로 국민의힘은 어려운 숙제를 잔뜩 안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새 정부와 거대 여당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대표가 절실히 필요하다. 전대 다가오는데 또 같은 얼굴들 대표 유력 주자 약점 들춰보니… 하지만 후보 4명은 각자 결함과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새 지도부가 구성됐다고 해서 저 많은 과제가 술술 풀릴 가능성은 매우 작다. 국민의힘 대선후보였던 김 전 장관은 지난 4일 서울희망포럼 강연에서 “이재명 대통령에 맞서 내가 싸우겠다”며 “국민이나 당이 위축될 때 침묵하지 않고 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의 당 대표 출마 선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의 당무우선권을 매개로 김 전 비대위원장을 지명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시도했던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김 전 장관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전 장관의 측근인 국민의힘 김재원 전 대선후보 비서실장은 지난달 13일 YTN <뉴스파이팅>에 출연해 “국민의힘은 이재명정부의 국정 전횡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등 야당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당무감사가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인지 회의적”이란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장관이 몰두하는 것은 ‘빅텐트’다. 김 전 장관이 사실상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면서 제시한 비전은 ▲권력의 잘못에 맞설 수 있도록 107명이 제대로 뭉친 국민의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낙연 전 총리·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 등과의 빅텐트 및 연대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당 체질 개선이란 측면에서 김 전 장관의 ‘빅텐트’에 대한 집착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나오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에도 빅텐트를 거론했다. 김 전 장관은 이 전 총리의 지지 선언은 이끌었지만,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와의 단일화는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도 스스로 제안했다가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태도를 바꿔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후보와 친윤계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대선에서 41%를 득표하는 등 비교적 선전했지만, 이 ‘비교적 선전’은 국민의힘의 처참한 상황에 비해 선전했다는 것일 뿐, 진짜로 선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여전히 빅텐트에 집착하고 있다. 빅텐트 정당은 다양한 세력을 묶고 그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 당내 화합조차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국민의힘의 전신 새누리당을 탈당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자유통일당을 창당했단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다시 빅텐트 김문수 집착 심지어 김 전 장관이 대선후보 시절 구상했던 빅 텐트엔 전 목사 등 광장 세력도 포함됐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관악산에서 열심히 턱걸이를 해도 고령에 따른 판단력 문제가 따라다닐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김 전 장관이 윤석열정부 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연이어 발탁됐던 이유로는 “고령의 보수 정치인에 대한 예우”란 평가가 계속 나왔다. 이 평가엔 “정치적 영향력과 지도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발탁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선후보 교체 시도 당시 당사 후보실을 점거하는 등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연상시키는 과감한 선택은 일부 돋보였다. 하지만 과감한 정치적 선택도 정확한 판단력과 맞물려야 그 빛을 발한다. 대권·당권주자가 없단 약점이 있는 친윤계가 그나마 지향점이 비슷한 김 전 장관을 당 대표로 옹립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중도를 공략해 다시 정권을 되찾으려면 당 체질은 필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따라서 김 전 장관이 빅텐트에 집착하는 옛 관성을 버리지 못하면, 여당과 제대로 맞설 제1야당 대표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남는다.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해선 “어려운 상황에서 정면 승부하는 결기가 부족하다”는 일부의 평가가 있다. 한 전 대표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편한 길을 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지난해 22대 총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당시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당시 대표를 심판 대상으로 규정한 ‘이조 심판론’이란 구호를 내걸었다가 ‘108석 당선’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여당 대표가 야당 대표들에 대한 심판을 총선에서 승리해야 할 이유로 제시한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가 정치 인생에서 제일 빛났던 순간은 지난해 12월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였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반대하면서 “국민과 함께 이를 막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친한계 의원들을 국회로 소집한 후 민주당과 협조해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등 원로 인사들은 한 전 대표를 극찬했다. 조 대표는 지난 2월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여당 대표가 계엄을 좌절시키긴 어렵다”며 “보통 이런 걸 ‘별의 순간’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친윤계와 합의해 지난해 12월7일 진행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1차 표결 불참을 결정했다. 이어 다음날엔 한 전 총리와 함께 “총리와 여당 대표의 당정 협의를 강화해 국정 공백을 메운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헌법재판소가 한 전 총리 탄핵 심판 결정에서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각계각층에선 한 전 대표를 일컬어 “권력 찬탈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취지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동훈 급부상 당시 한 전 대표는 ▲조속한 직무 정지 ▲탄핵소추 표결 불참 ▲탄핵 찬성 등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계속 바꿨다. 그러다가 탄핵소추가 가결된 직후 친윤계의 반발과 최고위원 전원 사퇴 등이 이어지면서 당 대표직에서 쫓겨나듯 물러났다. 이후 한 전 대표는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대선 유세에 참여했고, 친한계를 움직여 대선후보 강제 교체 반대에 참여하는 등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친윤계와의 뿌리 깊은 갈등은 여전하고, 당 대표 출마에 대한 의견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 등 ‘결기 부족’이란 일각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김민석 총리 지명 철회 등을 요구하면서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하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농성이 되고 말았다. 나 의원은 냉방이 잘 되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비교적 가격이 비싼 김밥과 유명 메이커 커피를 곁들이고 탁상용 선풍기까지 갖췄다. 이런 상황을 알린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촬영해 스스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나 의원 자신이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지난달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캠핑이나 바캉스 같다”고 비웃었다. 지난 2018년 5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을 했던 자유한국당 김성태 전 원내대표도 지난 1일 MBC <뉴스외전>에서 “로텐더홀에서 출판기념회 하듯이 농성한다”고 비판했다. 친한계 일원인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도 “피서 농성”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나 의원은 “주말엔 로텐더홀에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달 30일 YTN <신율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나 의원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는 것”이라며 “국민의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지층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정작 농성의 대상인 김 총리는 같은 날 나 의원을 방문해 “식사는 했느냐”면서 “단식은 하지 말라”고 비웃었다. 김 총리의 기세는 하나도 꺾이지 않았고, 민주당은 지난 3일 김 총리 임명동의안을 가결했다. 대선 경선 그대로 옮겨지나 수많은 난제…독이 든 성배? 그러자 나 의원은 다음날 농성을 해제했다. 나 의원이 6일 동안 진행한 농성은 나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된 후 진행될 대정부 투쟁의 회의적 가능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당 대표 당선 가능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 의문이 커진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7일 오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후 겨우 8분 만에 사퇴했다. 안 의원은 지난 2일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국민의힘은 악성 종양이 뼈와 골수까지 전이된 말기 환자”라면서 “메스를 들어 보수 정치를 오염시킨 고름과 종기를 적출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안 의원은 송 비대위원장에게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와 관련해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전 원내대표에 대한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건의를 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중도·수도권·청년 중심으로 혁신위를 구성하려던 안 의원의 구상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원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의힘 혁신 당 대표가 되기 위해 도전할 것”이라며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안 의원은 혁신위원장 내정 이전부터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이 크게 점쳐졌다. 따라서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친윤계와 손을 잡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어 일찌감치 “친윤계가 이전처럼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왜 혁신위원장 자리를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함께 돌아다녔다. 안 의원은 “‘쌍권(권영세·권성동)’ 숙청을 혁신안으로 제시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직접 공개했다. 따라서 “혁신하는 당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은 챙겼다. 하지만 여전히 안 의원은 국민의힘에서 나 홀로 버티고 있다. 친윤계와의 연대설이 돌아다녔던 이유도 안 의원에게 세가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안 의원도 김 전 장관처럼 친윤계와 치명적으로 갈등한 이력이 생겼다. 김 전 장관과 달리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명분은 얻었을지 몰라도, 실리는 스스로 걷어찬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당 대표로 당선되더라도, 메스를 들어 고름과 종기를 적출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남는다. 현역 의원 20명 안팎 계보를 거느린 한 전 대표도 친윤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조 의원과 장 당협위원장의 출마 선언은 주요 후보 4명에 비하면 비중 있게 취급되진 않는다. 다만 조 의원에 대해선 “한 전 대표가 불출마하고, 좌장인 조 의원이 대신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수장과 좌장이 동시에 출마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숙제 뻔한 결말? 여러 폭탄을 끌어안고 죽을 가능성이 더 큰 당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출혈은 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제대로 혁신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쟁점 법안들을 연이어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독이 든 성배 취급을 받는 국민의힘 대표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자중지란을 거듭하는 국민의힘 내부의 먹구름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