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2016 최악의 사건사고

충격의 연속 “조용할 날 없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다사다난했던 2016년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했던 사건들로 조용할 날 없던 한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던 사건들을 <일요시사>에서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

지난 5월17일 오전 0시33분경 피의자 김모(34)씨는 강남역 근처 노래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화장실에 들어온 C(23)씨를 흉기로 4차례 찔러 살해했다. 김씨는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피해자와는 모르는 사이”라고 진술했다.

여성 노렸다
[강남역 살인]

서울지방경찰청은 프로파일러를 투입, 두 차례 심리면담해 종합 분석한 결과 전형적인 피해망상 조현병에 의한 묻지마 범죄 유형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범행 당시 김씨의 망상 증세가 심각한 상태였고 표면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 요인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번 사건이 묻지마 범죄 중 정신질환 유형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또 김씨가 화장실에 들어온 여성을 보자마자 바로 공격한 점으로 미루어 범행 목적성에 비해 범행 계획이 체계적이지 않아 전형적인 정신질환 범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피해 여성에 대한 추모 움직임은 SNS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같은 날 오후 4시쯤 트위터에는 '강남역 10번 출구, 국화꽃 한 송이와 쪽지 한 장, 이젠 여성폭력, 살해에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라는 트윗이 올라왔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사건이 발생한 상가 건물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출구였다.

한 시간 뒤에는 강남역 10번 출구에 국화꽃 한 송이와 추모의 글을 담은 쪽지를 남겨 피해 여성을 추모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제안에 호응한 시민들은 강남역 10번 출구 유리 벽면에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글을 적은 포스트잇(접착식 쪽지)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추모현장을 아울러 이성혐오 문제를 중심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이런 류의 묻지마 살인은 이전에도 가끔씩 있어왔으나 이번 사건은 인구의 중심지 서울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나 2015년경부터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돼 왔던 이성혐오 프레임이 크게 불붙으며 반향을 일으켰다.

지하철 참사
[구의역 사고]

지난 6월1일 오후 지하철 스크린도어 보수작업을 하던 김모(19)군이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다. 선로작업시엔 작업 인원, 작업 지점은 물론, 작업자의 안전 확보 여부 등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당시 해당 역과 역무원은 협력업체 직원들이 자주 드나들어 수리하곤 했고 작업자도 협력업체나 서울 메트로가 구의역에 작업 사실을 알렸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리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평소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항상 가방에 컵라면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안타까운 사건으로 남았다. 이 같은 열악한 근로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서울 메트로의 자회사로 전환되면 공기업 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해당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올린 글에 의하면, 피해자는 사고 직후에도 잠시 살아있었다고 한다.

강남 묻지마 살인으로 여혐 논란
전대미문 서울도심 공포의 총격전

김군 모친에 의하면 시신 상태가 처참했다고 한다. 부은 얼굴은 피범벅에 뒤통수가 없어져서 단번에 아들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짙은 눈썹과 벗겨놓은 옷가지를 보고서야 아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됐다고 한다.

사고 현장인 ‘9-4 승강장’ 유리벽엔 숨진 김군을 기리는 포스트잇 600여장이 붙어 있었다. 구의역 역무실 옆에 별도로 마련된 추모의 벽엔 포스트잇 1200여장이 더 붙었다.
 

추모의 벽 앞엔 조화 100여다발과 김군의 가방에 들어 있던 것과 같은 컵라면, 생일 케이크 등이 놓여 있었다. 이들이 남긴 추모 글에는 성실히 일하다 죽음을 당한 또래 청년에 대한 공감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나도 당신처럼 영세 업체에 취업해 일하는 공고생이다. 당신의 죽음을 보면 남 일 같지 않다’는 등의 글이 주를 이뤘다. 김군에 대한 추모는 SNS를 통해 확산됐다.

사제총의 위험성
[오패산터널 총격]

지난 10월19일 저녁 서울 강북구 미아동 오패산 터널 부근서 성모(46)씨가 대치 중인 경찰에게 사제 총을 쏴 현장에 있던 강북경찰서 번동파출소 소속 김창호 경위가 총에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시간 만에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성씨가 총격전을 벌이기 전 근처에서 이모(67)씨에게 사제 총을 쐈고 이씨가 달아나자 쫓아가 흉기로 가격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서 행인 이모(71)씨가 총에 맞았다고 덧붙였다.

폭행 피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오패산 터널 쪽으로 달아나던 성씨를 발견한 뒤 대치 과정서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발사하는 등 총격전을 벌였고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한 끝에 검거했다.

범행 현장 주변 등에선 성씨가 준비한 사제 총 17정과 흉기 7개가 발견됐으며 성씨는 검거 당시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성씨는 평소 자신의 SNS 계정에 경찰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 등 범행을 암시하는 게시글을 자주 올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성씨는 페이스북에 ‘경찰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 ‘나를 상대로 한 현행범 체포 현장에 출동하지 말기 바란다. 괜히 진급 욕심내거나 상관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다간 죽을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썼다.

범인을 검거하는 데 있어 시민들의 역할이 컸는데 사건 발생 뒤 6시20분 쯤에 빠르게 신고됐고 동료와 술을 마시던 일용직 노동자였던 김모(56)씨는 총소리를 듣고 풀숲에 숨어있던 범인에게 달려들어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데 일조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이씨(33)는 총에 맞은 경찰을 발견하고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하기도 했다. 범행 현장 인근 상인들 역시 범인 검거에 나섰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원영이 암매장
[평택 아동 살해]

2013년 8월 당시 5세이던 원영이는 누나와 함께 친모와 살다 부모의 이혼으로 양육권이 친부에게 넘어가 친부와 함께 살게 됐다. 그 후 계모 김모씨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됐는데 계모는 남매에게 아침밥을 먹이거나 제대로 씻기거나 입히지 않았고 회초리로 자주 학대하고 베란다로 가두기도 했다.

남매는 학대의 두려움에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해 겨울에는 얇은 옷차림으로 밖에서 놀았으나 누구도 남매를 돌보지 않았다.
 


원영이의 누나는 2015년 4월 평택시에 거주하던 조모에게로 옮겨졌으며 친부와 조모는 왕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친부는 원영이를 2016년 1월7일에 초등학교 예비 소집일에 데려가지도 않았고 14일에는 입학 유예를 신청했다.

남일 같지 않은 수리공의 죽음
뻔뻔한 학부모들의 여교사 윤간

원영이의 성장이 늦고 이사할 예정이라고 변명했으나 사실 원영이는 2015년 11월부터 욕실에 감금되어 극심한 학대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모는 1월28일부터 원영에게 락스를 퍼부었고 2월1일에는 옷을 벗기고 찬물을 퍼부었다.

이 상태로 20시간이 지난 무렵 결국 원영이는 사망했고 친부와 계모는 시신을 이불에 말아 세탁실에 방치했다가 부패가 심하자 12일 평택시 청북면의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

원영이 남매가 다니던 아동 센터는 원영이의 사망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읍사무소를 통해 아이의 안전 상태를 확인하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3월4일 원영이의 입학 유예 관련 심의를 앞두고 부부가 “아이가 없어졌다”고 변명하면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 닷새 뒤인 9일, 경찰은 원영이 누나로부터 학대 사실에 대한 진술을 받고 친부와 계모를 아동 학대 혐의로 구속했다.

신안서 또…
[여교사 성폭행]

지난 5월21일, 흑산도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던 피해 여교사는 평소 자주 가던 흑산도 우체국 앞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학부모가 술을 권하면서 주인을 포함한 학부모 2명 및 지역민 1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이들 3명은 술을 거절하는 피해 여교사에게 억지로 계속 술을 권해 만취상태로 만든 후 학교 관사로 데려다 준다며 잠들자 집단 윤간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남자친구라고 밝힌 네티즌이 네이버 카페에 올린 글에 의해 사건 발생 일주일 이상 지난 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자식의 스승을 윤간한 극에 달한 패륜범죄는 카페 글로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됐으며 피해자가 침착하게 대응, 가해자들의 정액과 체모 등의 증거를 수집했다.

일각에선 관사의 남교사들이 모두 육지로 외출을 하는 주말을 노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만간 외지로 돌아갈 피해 여교사에 대한 계획적인 집단 성폭행이 아니었느냐는 주장이었다.

경찰 수사 결과 가해자들은 범행을 전후로 술자리를 갖고 전화통화를 주고받은 점이나 각자의 차량을 뒤이어 운행한 점 역시 공모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특히 가해자들이 경찰 수사 도중 웃으면서 담담하게 조사에 임하는 모습이나 피해자의 몸에서 DNA 증거가 나왔는데도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며 억지로 혐의를 부인하는 태도 등은 논란이 됐다.

경찰이 정액 검출 결과를 명백한 물증으로 제시했는데도 가해자 중 한 명은 오히려 “내 정액이 왜 거기 있죠?”라고 되물으며 모르쇠로 일관해 비난 여론을 부추기기도 했다.

한편 2007년 대전의 한 원룸에 침입해 20대 여성을 주먹으로 때려 제압하고 성폭행한 미제사건 범인의 DNA를 수사 당국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사 과정서 본 사건 피의자 3명 중 1명인 김모(39)씨의 DNA와 일치하는 것이 밝혀져 과거의 동종 범죄 사실까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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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