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 21일, 인터뷰를 위해 금강학교로 들어서다 바쁘게 걸어가던 주명화 교장과 마주쳤다. 아이들이 수업에 쓸 학용품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주 교장은 입구까지 30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마당서 놀고 있는 아이 하나가 감기에 걸릴까 연신 손짓을 했다. “얼른 들어가자, 감기 들라.”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금강학교는 사단법인 남북통일예술인협회서 운영하는 부설교육사업의 일환이다. 한글을 몰라 제도권 교육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탈북아동·청소년들을 비롯 제3국에서 출생한 탈북민들에게 힘이 되고자 설립된 대안학교다.
주명화 교장은 “학교가 생긴지 4년 됐는데 100명의 아이들이 주변 학교로 편입했다”며 “주변 초·중학교 선생님들이 워낙 잘 돌봐주셔서 아직까지 탈락한 아이들은 한 명도 없다”고 뿌듯해했다.
정서 매우 불안
2013년 설립한 금강학교에는 현재 8∼17세 아이들 3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금강학교에 오기 전, 이들은 대부분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채 혼자 방치된 아이들이 대다수였던 것.
하지만 이제 아이들의 삶은 무척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마당에 모여 함께 학교로 향한다. 정규수업을 마치고 나면 4시까지 방과 후 수업을 한 뒤 금강학교로 돌아와 저녁 프로그램을 소화한다. 오후 5시30분에는 저녁을 먹고 8시쯤에 야식을 먹는다. 그리고는 샤워를 마친 후 옷장 정리를 한다.
주 교장은 “대한민국에 와서 자립하고 적응해 살려면 자신의 몸, 옷장 정도는 어릴 때부터 혼자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을 하다 새벽 1∼2시에야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금강학교에 와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점차 얼굴이 맑아지는 등 신체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서적인 부분이었다. 지금에야 아이들이나 선생님들 모두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탈북하면서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며 “또 한국, 북한, 중국 등 출신부터 너무 다른 아이들이 모였기에 싸움도 잦았다”고 회상했다.
주 교장은 아이들의 화합을 위해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스물두 명을 세워놨는데 스물두 가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단합이 안됐다”며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또래 관계가 좋지 않고, 상처를 받는 아이들도 많았다”고도 했다.
아이들의 정서 상태는 주 교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무지개청소년센터 공모 사업에 응모해 검사를 받은 아이들 4명 가운데 한 명은 정신지체장애 3급이 나올 정도였다. 주 교장은 “검사 결과에 너무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게 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탈북가정 자녀들에게 한글 교육
제도권 교육 편입 목표로 학습
그 가운데 한 아이는 중국서 생활할 당시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면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당시 잘못한 것도 없었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무조건 빌었다. 그러면서 몸은 자랐지만 마음이 완전히 닫혔다.
주 교장은 “(그 아이는)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냈고 이마에 내천(川)자 주름이 사라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늘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주 교장과 교직원들은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치료 과정서 아이가 상처를 받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주 교장과 교직원들은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위해 꼬박 1년간 병원에 다녔다. 치료 효과에 의문을 품었던 주 교장은 아이들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도 가끔씩 ‘욱’할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아이 얼굴에 웃음이 생겼다”며 “밝아진 아이가 그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며 환히 웃었다.
심리 치료를 받던 아이 가운데 한 명은 현재 유도를 배운다. 친구들을 이유 없이 툭툭 치며 괴롭혔던 아이는 유도 국가대표를 꿈꾸는 13세 소년으로 변했다. 주 교장은 “아이는 ‘마음이 아프다’는 신호를 조금 난폭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던 것”이라며 “그때 아이를 외면했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북한서 교사 생활을 하다 8년 전 탈북한 주 교장이 처음부터 학교 관련 일을 한 건 아니다.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등 한국 사회서 살아남기 위해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주 교장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생기자 금강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처음 입주했을 땐 정말 추웠다. 창틀 하나부터 구석진 부분까지 저희들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다”며 금강학교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돈이 없었기에 시설도 좋지 않았고, 급여를 드릴 돈이 없어 외부 인력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모두 주변에서 도와주신 분들 덕”이라며 공을 돌렸다.
날짜에 맞춰 몇 년째 자원봉사를 오는 학생들, 분기별로 고기를 보내주는 업체, 후원금을 보내주는 시민들을 보며 “정치가 어지럽다는 말도 많고, 살기 힘들다는 말도 많지만 저와 선생님, 아이들은 아직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을 많은 분들을 통해 느낀다”고 감사함을 드러냈다.
아이들 기숙사 공동생활
주변 도움으로 꾸려나가
아이들에게 ‘더운 밥’ 챙겨주랴, 프로그램 준비하랴 매순간 정신없이 살아간다는 주 교장에게 최근 생긴 큰 고민은 바로 ‘이사’다. 현재 지내고 있는 건물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올해 안에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
주 교장은 이를 ‘대공사’라고 표현하며 웃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아 보였다. 당장 이사할 곳을 찾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식을 들은 주변 교회 및 단체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주는 등 온정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구로구서 4년간 뿌리내리고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가능하면 지역 내에서 움직이고 싶다는 게 주 교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사 보증금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말하면서도 주 교장은 내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눈을 반짝 빛냈다. “아이들이 한글을 읽고 말하긴 하지만 뜻을 모르고 하는 경우가 있다. 내년에는 그간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던 ‘책 읽기’에 중점을 두려 한다”고 했다.
하나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교육 방침에 맞게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꾸릴 계획이다. 주 교장은 “학년별로 4~5명씩 그룹을 나눠 서로 생각을 교환하다보면 발표력도 늘고 도움이 될 것 같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하다”
학교 운영 문제로 지칠 때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는 주 교장. “학교를 운영하는 내 모습에 누군가는 ‘정신이 좀 아픈 게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며 “하지만 나는 힘 닿는 데까지, 원 없이 이 일을 해볼 생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 교장의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단호한 다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