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최종회) 저격

  • 황천우 작가 shs@ilyosisa.co.kr
  • 등록 2016.09.09 18:05:47
  • 호수 10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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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가슴에 총을 쏘다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네 놈이 어떤 행동을 하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네가 살고 조국과 가족을 살릴지 아니면 네놈도 죽고 네 주변 모두를 몰살시킬지는 전적으로 네놈이 판단할 일이다. 알겠는가!”

“저도 살고 모두 살릴 겁니다. 그러니 제발‥‥‥.”

석원의 애걸하는 모습을 살피자 갑자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권총을 석원에게 내밀었다.

“이 총 받을 수 있겠나!”


순간 석원이 고개 들어 권총과 무표정한 동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반드시, 반드시 거사를 성공시키겠습니다.”

“이따위 정신 상태로 네놈이 무슨 수로 거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이야기냐. 그저 계집 구멍이나 밝히는 놈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동일의 강경한 반응에 석원이 다시 고개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나는 이쯤에서 내일 거사를 취소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네놈은 물론이거니와 네놈의 처자식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이 계획에 참여했던 기미코 등 모든 사람들까지 몰살을 면치 못하겠지만.”

“지도원 동무, 아니 나카소네 상. 정말입니다. 정말로 이 목숨 바쳐서라도 거사를 성공할 터이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석원이 급기야 이마를 바닥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네 놈이 이 거사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게냐? 또 너를 위해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북조선에서 들인 공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카소네 상. 그러니 제발.”

“아는 놈이 이따위로밖에 못해! 북조선이 네 놈 장난감인 줄 아는 게냐!”

“아닙니다, 나카소네 상. 하라시는 대로 모두 하겠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각서를 쓰도록 해라.”

동일이 목소리를 낮추자 석원이 다시 고개 들었다.

“네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동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석원을 테이블 앞에 앉도록 했다.

이어 자신이 주었던 노트와 펜을 가지고 오게 하여 각서를 쓰도록 했다.

물론 거사를 성공시키지 못할 시 기미코를 포함하여 가족 등 모두의 목숨을 북조선의 처사에 기꺼이 일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오라 지시했다.

가져온 물을 병째로 마신 동일이 석원에게 건넸다.


“마셔!”

석원이 강압적인 분위기에 밀려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물을 마셨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도록 해!”

동일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석원에게 지금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그에게 주입시켰던 이야기를 깊게 각인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TV를 켰다.


막상 TV를 켰으나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머리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 현상을 느끼고는 그 사유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크든 작든 어떤 일을 시도하게 되면 알게 모르게 불안감은 발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일의 예측 가능성을 타진하며 불안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의에 찬 저격 계획…음모에 빠져
울려 퍼진 총성…붉게 물든 국립극장

전혀 불안해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작성하였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리 진행되게 되어 있는데 솟구치는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오늘 벌어질 일을 그려보았다.

석원이 다섯 발의 실탄을 장착한 권총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택시를 이용하여 행사장에 도착한다.

그의 도착과 맞추어 이강철이 나서서 초청장을 확인하고 비표를 교환해주어 자연스럽게 행사장 입장을 유도한다.

아울러 문석원의 조바심을 자극하면서 행사장 내 가장 먼 거리에 좌석을 배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어 행사가 진행되는 순간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후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강철이 문석원의 지근거리에 앉아 있다 문석원이 첫 발을 발사하는 낌새가 일어나면 그 순간보다 먼저 천장으로 실탄을 발사해서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해 사전에 조처 취하도록 했다.

아울러 김경수는 문석원의 시선에서 벗어나 박정희 대통령 바로 뒤에 위치하여 강철과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

사전 각본에 의하면 여하한 경우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위해를 입는 일은 불가능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안위도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전례에서 벗어나 박 대통령의 연설대를 연단 정면 한복판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설치하도록 했다.

하여 문석원이 사전 지침에 따라 행동한다면 행사장에 참석한 그 누구도 위해를 입을 수 없었다.

내친 김에 일이 끝난 후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점검해보았다.

문석원은 죽이지 않고 산채로 생포하기로 되어 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문석원은 지침 받은 대로 일본인으로, 또 단독작품으로 몰아갈 일이었다.

권총 역시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하여 입국 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숨겨 들어왔다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이외의 사항에는 강력하게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의 정체가 우리 측 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아베 고타로와 그의 연인 기미코 또 조총련 정치부장인 이호룡의 행적까지 드러나고 그 이외의 일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터다.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행사가 거행되는 국립극장 쪽을 바라보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가까이 있는 듯했다.

잠시 그곳을 주시하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막 열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TV에 주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국가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마음을 다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상태에서 하늘을 바라보기를 잠시,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대통령이 연설대로 자리를 옮겨 연설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소리를 들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흐릿한 화면에 행사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만족하리만큼 행사장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그저 귓가에서 윙윙대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머리로 입력되지 않았다.

잠시 후 갑자기 화면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 모습이 잡혔다.

박 대통령이 연설대 뒤로 몸을 숨기고 연단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엉덩이를 천장을 향해 들고 있었다.

순간 연단 뒤에 있던 경호실장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그 옆을 바라보았다.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육영수 여사께서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약간 돌려 앞을 주시했다.

마치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바로 그때 동일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안 돼!”

<끝>

<지금까지 ‘스러진 달’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호부터 ‘삼국비사’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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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상 오를 그 밥에 그 나물

잔칫상 오를 그 밥에 그 나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인 기세를 앞세워 쟁점 법안들을 한순간에 처리하려고 한다. 수많은 위험과 과제를 풀어야 하는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엔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주요 후보 4명이 출마할 예정이다. 약점도 4인 4색이다.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다음 달 19일 충북 청주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국민의힘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임기 만료로 물러난 이후 주목받았던 유력 당권주자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한동훈 전 대표 ▲안철수 의원 ▲나경원 의원 등 4명이다. 이어 친한(친 한동훈)계 좌장으로 알려진 6선 조경태 의원과 장성민 경기 안산갑 당협위원장도 출마를 선언했다. 돌고 돌아 4파전 예고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에겐 매우 어려운 숙제들이 수북하게 쌓여 기다리고 있다.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새 정부 출범 직후의 기세와 압도적인 의석수를 토대로 ▲노란봉투법 ▲방송 3법 ▲농업 4법 ▲상법 추가 개정안 등 쟁점 법안을 이달 임시국회에서 서둘러 처리할 예정이다. 아울러 지난달 11일엔 검찰을 완전히 폐지한 후 기존 권한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옮기는 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의 의석수는 107석에 불과해서 실질적으로 해당 법안을 막을 힘이 없다. 또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가능성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민주당 당 대표 유력 후보 중 1명인 박찬대 전 원내대표는 지난 8일 국민의힘을 겨냥해 “내란범을 배출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끊는다”는 내용이 담긴 법안을 발의했다. 이를 놓고, 박 전 원내대표는 “아직도 반성 없이 내란을 옹호하는 정당에 국민 혈세가 투입돼 내란을 옹호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내란 종식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당해산심판 청구 및 인용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도록 위협하면서 자금줄을 끊는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건희 특검팀은 같은 날 지난 2022년 재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자택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특검팀은 지난 7일엔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의 출국을 금지했다. 특검의 수사 상황에 따라 ‘줄초상’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승부수로 제시했다가 좌초된 5대 개혁안에 담긴 국민의힘의 체질 개선 문제도 새 당 대표의 골머리를 썩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 친윤(친 윤석열)계는 5대 개혁안을 좌초시키면서 친윤계 일원인 송언석 의원을 원내대표로 당선시키는 등 여전한 힘을 드러냈다. 5대 개혁안 중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추진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국민의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안건이었다. 신임 당 대표가 이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숙제는 내년 6월 진행될 지방선거다. 국민의힘이 승리할 가능성은 벌써 낮게 진단되고 있다. 실제로 패배하면, 다음 달 선출되는 당 대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숙제와 뻔한 죽음이 예상되는 ‘독이 든 성배’라고 할 수 있다.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4명은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정치인들로 이들 모두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앞으로 국민의힘은 어려운 숙제를 잔뜩 안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새 정부와 거대 여당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대표가 절실히 필요하다. 전대 다가오는데 또 같은 얼굴들 대표 유력 주자 약점 들춰보니… 하지만 후보 4명은 각자 결함과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새 지도부가 구성됐다고 해서 저 많은 과제가 술술 풀릴 가능성은 매우 작다. 국민의힘 대선후보였던 김 전 장관은 지난 4일 서울희망포럼 강연에서 “이재명 대통령에 맞서 내가 싸우겠다”며 “국민이나 당이 위축될 때 침묵하지 않고 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의 당 대표 출마 선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의 당무우선권을 매개로 김 전 비대위원장을 지명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시도했던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김 전 장관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전 장관의 측근인 국민의힘 김재원 전 대선후보 비서실장은 지난달 13일 YTN <뉴스파이팅>에 출연해 “국민의힘은 이재명정부의 국정 전횡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등 야당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당무감사가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인지 회의적”이란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장관이 몰두하는 것은 ‘빅텐트’다. 김 전 장관이 사실상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면서 제시한 비전은 ▲권력의 잘못에 맞설 수 있도록 107명이 제대로 뭉친 국민의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낙연 전 총리·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 등과의 빅텐트 및 연대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당 체질 개선이란 측면에서 김 전 장관의 ‘빅텐트’에 대한 집착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나오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에도 빅텐트를 거론했다. 김 전 장관은 이 전 총리의 지지 선언은 이끌었지만,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와의 단일화는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도 스스로 제안했다가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태도를 바꿔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후보와 친윤계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대선에서 41%를 득표하는 등 비교적 선전했지만, 이 ‘비교적 선전’은 국민의힘의 처참한 상황에 비해 선전했다는 것일 뿐, 진짜로 선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여전히 빅텐트에 집착하고 있다. 빅텐트 정당은 다양한 세력을 묶고 그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 당내 화합조차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국민의힘의 전신 새누리당을 탈당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자유통일당을 창당했단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다시 빅텐트 김문수 집착 심지어 김 전 장관이 대선후보 시절 구상했던 빅 텐트엔 전 목사 등 광장 세력도 포함됐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관악산에서 열심히 턱걸이를 해도 고령에 따른 판단력 문제가 따라다닐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김 전 장관이 윤석열정부 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연이어 발탁됐던 이유로는 “고령의 보수 정치인에 대한 예우”란 평가가 계속 나왔다. 이 평가엔 “정치적 영향력과 지도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발탁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선후보 교체 시도 당시 당사 후보실을 점거하는 등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연상시키는 과감한 선택은 일부 돋보였다. 하지만 과감한 정치적 선택도 정확한 판단력과 맞물려야 그 빛을 발한다. 대권·당권주자가 없단 약점이 있는 친윤계가 그나마 지향점이 비슷한 김 전 장관을 당 대표로 옹립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중도를 공략해 다시 정권을 되찾으려면 당 체질은 필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따라서 김 전 장관이 빅텐트에 집착하는 옛 관성을 버리지 못하면, 여당과 제대로 맞설 제1야당 대표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남는다.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해선 “어려운 상황에서 정면 승부하는 결기가 부족하다”는 일부의 평가가 있다. 한 전 대표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편한 길을 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지난해 22대 총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당시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당시 대표를 심판 대상으로 규정한 ‘이조 심판론’이란 구호를 내걸었다가 ‘108석 당선’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여당 대표가 야당 대표들에 대한 심판을 총선에서 승리해야 할 이유로 제시한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가 정치 인생에서 제일 빛났던 순간은 지난해 12월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였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반대하면서 “국민과 함께 이를 막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친한계 의원들을 국회로 소집한 후 민주당과 협조해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등 원로 인사들은 한 전 대표를 극찬했다. 조 대표는 지난 2월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여당 대표가 계엄을 좌절시키긴 어렵다”며 “보통 이런 걸 ‘별의 순간’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친윤계와 합의해 지난해 12월7일 진행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1차 표결 불참을 결정했다. 이어 다음날엔 한 전 총리와 함께 “총리와 여당 대표의 당정 협의를 강화해 국정 공백을 메운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헌법재판소가 한 전 총리 탄핵 심판 결정에서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각계각층에선 한 전 대표를 일컬어 “권력 찬탈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취지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동훈 급부상 당시 한 전 대표는 ▲조속한 직무 정지 ▲탄핵소추 표결 불참 ▲탄핵 찬성 등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계속 바꿨다. 그러다가 탄핵소추가 가결된 직후 친윤계의 반발과 최고위원 전원 사퇴 등이 이어지면서 당 대표직에서 쫓겨나듯 물러났다. 이후 한 전 대표는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대선 유세에 참여했고, 친한계를 움직여 대선후보 강제 교체 반대에 참여하는 등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친윤계와의 뿌리 깊은 갈등은 여전하고, 당 대표 출마에 대한 의견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 등 ‘결기 부족’이란 일각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김민석 총리 지명 철회 등을 요구하면서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하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농성이 되고 말았다. 나 의원은 냉방이 잘 되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비교적 가격이 비싼 김밥과 유명 메이커 커피를 곁들이고 탁상용 선풍기까지 갖췄다. 이런 상황을 알린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촬영해 스스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나 의원 자신이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지난달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캠핑이나 바캉스 같다”고 비웃었다. 지난 2018년 5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을 했던 자유한국당 김성태 전 원내대표도 지난 1일 MBC <뉴스외전>에서 “로텐더홀에서 출판기념회 하듯이 농성한다”고 비판했다. 친한계 일원인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도 “피서 농성”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나 의원은 “주말엔 로텐더홀에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달 30일 YTN <신율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나 의원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는 것”이라며 “국민의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지층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정작 농성의 대상인 김 총리는 같은 날 나 의원을 방문해 “식사는 했느냐”면서 “단식은 하지 말라”고 비웃었다. 김 총리의 기세는 하나도 꺾이지 않았고, 민주당은 지난 3일 김 총리 임명동의안을 가결했다. 대선 경선 그대로 옮겨지나 수많은 난제…독이 든 성배? 그러자 나 의원은 다음날 농성을 해제했다. 나 의원이 6일 동안 진행한 농성은 나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된 후 진행될 대정부 투쟁의 회의적 가능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당 대표 당선 가능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 의문이 커진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7일 오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후 겨우 8분 만에 사퇴했다. 안 의원은 지난 2일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국민의힘은 악성 종양이 뼈와 골수까지 전이된 말기 환자”라면서 “메스를 들어 보수 정치를 오염시킨 고름과 종기를 적출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안 의원은 송 비대위원장에게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와 관련해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전 원내대표에 대한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건의를 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중도·수도권·청년 중심으로 혁신위를 구성하려던 안 의원의 구상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원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의힘 혁신 당 대표가 되기 위해 도전할 것”이라며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안 의원은 혁신위원장 내정 이전부터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이 크게 점쳐졌다. 따라서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친윤계와 손을 잡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어 일찌감치 “친윤계가 이전처럼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왜 혁신위원장 자리를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함께 돌아다녔다. 안 의원은 “‘쌍권(권영세·권성동)’ 숙청을 혁신안으로 제시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직접 공개했다. 따라서 “혁신하는 당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은 챙겼다. 하지만 여전히 안 의원은 국민의힘에서 나 홀로 버티고 있다. 친윤계와의 연대설이 돌아다녔던 이유도 안 의원에게 세가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안 의원도 김 전 장관처럼 친윤계와 치명적으로 갈등한 이력이 생겼다. 김 전 장관과 달리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명분은 얻었을지 몰라도, 실리는 스스로 걷어찬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당 대표로 당선되더라도, 메스를 들어 고름과 종기를 적출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남는다. 현역 의원 20명 안팎 계보를 거느린 한 전 대표도 친윤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조 의원과 장 당협위원장의 출마 선언은 주요 후보 4명에 비하면 비중 있게 취급되진 않는다. 다만 조 의원에 대해선 “한 전 대표가 불출마하고, 좌장인 조 의원이 대신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수장과 좌장이 동시에 출마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숙제 뻔한 결말? 여러 폭탄을 끌어안고 죽을 가능성이 더 큰 당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출혈은 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제대로 혁신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쟁점 법안들을 연이어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독이 든 성배 취급을 받는 국민의힘 대표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자중지란을 거듭하는 국민의힘 내부의 먹구름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