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33) 깊은 상처

극비리 입국 계획 ‘성공할까?’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가만히 있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가지런히 아니 영란이 옷을 벗기기 쉽게 자세 잡았다. 이어 바지를 벗긴 영란이 다시 석원의 팬티를 내렸다. 아직도 가운데 부분에 액체가 남아 있었다.

가만히 그를 살피던 영란이 손으로 액체가 남아 있는 부분을 만지더니 이내 입을 그리로 가져갔다. 그러기를 잠시 후 몸을 세워 자신의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석원을 덮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영란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담배에 불을 붙여 침대에 누워 있는 석원에게 건넸다. 이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힘차게 빨아들였다.

“준비는 차질 없이 잘 되고 있겠지?”


“무슨…”

석원의 입에서 더 이상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영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던 때문이었다.

“그러면 전에 이야기했던, 남조선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는 일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저야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석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간신히 입을 연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하려는가.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겠다는 전에 그 각오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물론 전혀 변화 없습니다.”


영란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반사적으로 석원의 목소리 역시 올라갔다. 그를 살피던 영란이 미소를 띠고는 석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석원 씨, 반드시 우리 민족의 영웅이 되어야 해. 그리고 또한 나에게도 영웅이 돼주어야 하고. 그래야 나도 석원 씨 덕을 보지.”

말을 마친 영란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순간 잠시 전에 머물렀던 방과 지금 자신이 있는 방을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잠시 전에 접했던 공포 그리고 지금 영란과 함께 있는 순간 역시 비교해 보았다.

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그 뿌리에는 두려움이라는 공통의 요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그를 입증이라도 하듯 가운데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어 욕실 문이 열리며 영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용변을 보았는지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순간 석원이 눈을 감았다. 영란의 배 아랫부분이 하얗게 변해 있던 터였다.

“이리 가까이 와!”

침대 가장 자리에 자리 잡은 영란의 목소리에 방금 전과는 달리 애교가 아닌 힘이 실려 있었다. 어색하게 다가오는 석원의 손을 잡아 이끌어 자신의 배꼽 아래 부분과 석원의 얼굴이 마주하도록 했다.

석원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절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그 부분 자세히 볼 수도 없었지만, 그곳을 뒤덮었던 털을 밀어내자 마냥 하얗게만 느껴졌던 살에 끔찍한 상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란이 그 상태에서 석원이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자세히 살펴봐!”

영란의 주문에 석원이 얼굴을 그곳 가까이 가져갔다. 역겹고 아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상처가 중요한 부분에까지 나 있었다. 고개가 저절로 돌려졌다.

“고개 돌리지 말고 자세하게 살펴봐!”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에 석원이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찬찬히 그곳을 살펴보았다. 흡사 날카로운 꼬챙이로 찔렀거나 혹은 불에 달군 쇠로 지진 듯했다.

“왜 생긴 상처인지 알겠나!”

북조선 배신 대가는 과연?
의심 눈초리 보내는 그녀

영란이 옷을 입으며 싸늘한 표정을 짓자 순간적으로 잠시 전에 들었던 비명 그리고 호룡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석원도 급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남편이란 놈이 북조선을 배신해서…아이들은 죽고 그나마 나만 이렇게…”

영란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석원이 마치 그 이유를 훤히 알겠다는 듯 측은한 그러나 두려움이 가득 찬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갈 수 있겠지!”

옷을 다 입은 영란이 담배를 피워 물며 싸늘하게 석원을 주시했다. 그 모습에 석원이 뭐라 제대로 말도 못하고 문을 열고 더듬어 온 길을 따라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마음만 급했지 계속 제자리에서 맴도는 듯했다.

간신히 배에서 벗어나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밖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만경봉호가 흡사 악마의 소굴처럼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남조선에는 뭐 하러 가는데?”

“일종에 여행이지.”

“혹시…”

석원이 간략하게 말을 끝내자 기미코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를 인정하듯 석원이 미소를 보였다.

“가능하면 윤대중 선생도 만나보려고.”

“만날 수 있어?”

“현재로서는 확단할 수 없어. 그러나 한번 가서 가능성을 타진해야지.”

“그래서 관광을 빌미로 남조선에 입국하겠다는 이야기잖아.”

“둘이, 부부로 말이야.”

석원이 부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자 기미코가 석원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난조 상, 진심으로 나를 아내로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비록 민족적인 문제로 결합하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당신뿐인 거 잘 알고 있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속으로는 내가 더 간절하다고 보아야 하는 거 아닌가.”

기미코가 대답 대신 석원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저만치 앞에 아담한 여관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곳을 바라보던 석원이 기미코의 머리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저녁은.”

“난조 상, 저녁 먹기 전에 우리가 정말 부부 사이인지 확인해봐야 할 듯해."

기미코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

“번거롭게 자리를 옮기고 자시고 하지 말고 여관에서 음식을 시켜먹으면서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고.”

“그런데 난조 상. 남조선에는 언제쯤 가려 해.”

“8월 중순경이 어떨까 싶은데.”

순간 기미코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갔다.

“왜 그래?”

“그때쯤이면 휴가철이고. 아울러 그 인간이 휴가 가자 보챌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야!”

석원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안 가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다만 상황을 보자는 이야기지. 그리고 그때 가서 정 안된다 싶으면 당신만 비자 받아 다녀오면 될 거 아니야.”

“그러면.”

석원이 말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왜?”

“당신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려고.”

“난조 상, 비록 내가 함께 남조선에 가지 못하더라도 나는 항상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거야.”

기미코의 손이 석원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석원이 흡사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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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상 오를 그 밥에 그 나물

잔칫상 오를 그 밥에 그 나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인 기세를 앞세워 쟁점 법안들을 한순간에 처리하려고 한다. 수많은 위험과 과제를 풀어야 하는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엔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주요 후보 4명이 출마할 예정이다. 약점도 4인 4색이다.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다음 달 19일 충북 청주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국민의힘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임기 만료로 물러난 이후 주목받았던 유력 당권주자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한동훈 전 대표 ▲안철수 의원 ▲나경원 의원 등 4명이다. 이어 친한(친 한동훈)계 좌장으로 알려진 6선 조경태 의원과 장성민 경기 안산갑 당협위원장도 출마를 선언했다. 돌고 돌아 4파전 예고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에겐 매우 어려운 숙제들이 수북하게 쌓여 기다리고 있다.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새 정부 출범 직후의 기세와 압도적인 의석수를 토대로 ▲노란봉투법 ▲방송 3법 ▲농업 4법 ▲상법 추가 개정안 등 쟁점 법안을 이달 임시국회에서 서둘러 처리할 예정이다. 아울러 지난달 11일엔 검찰을 완전히 폐지한 후 기존 권한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옮기는 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의 의석수는 107석에 불과해서 실질적으로 해당 법안을 막을 힘이 없다. 또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가능성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민주당 당 대표 유력 후보 중 1명인 박찬대 전 원내대표는 지난 8일 국민의힘을 겨냥해 “내란범을 배출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끊는다”는 내용이 담긴 법안을 발의했다. 이를 놓고, 박 전 원내대표는 “아직도 반성 없이 내란을 옹호하는 정당에 국민 혈세가 투입돼 내란을 옹호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내란 종식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당해산심판 청구 및 인용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도록 위협하면서 자금줄을 끊는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건희 특검팀은 같은 날 지난 2022년 재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자택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특검팀은 지난 7일엔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을 받는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의 출국을 금지했다. 특검의 수사 상황에 따라 ‘줄초상’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승부수로 제시했다가 좌초된 5대 개혁안에 담긴 국민의힘의 체질 개선 문제도 새 당 대표의 골머리를 썩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 친윤(친 윤석열)계는 5대 개혁안을 좌초시키면서 친윤계 일원인 송언석 의원을 원내대표로 당선시키는 등 여전한 힘을 드러냈다. 5대 개혁안 중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추진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국민의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안건이었다. 신임 당 대표가 이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숙제는 내년 6월 진행될 지방선거다. 국민의힘이 승리할 가능성은 벌써 낮게 진단되고 있다. 실제로 패배하면, 다음 달 선출되는 당 대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숙제와 뻔한 죽음이 예상되는 ‘독이 든 성배’라고 할 수 있다.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4명은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정치인들로 이들 모두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앞으로 국민의힘은 어려운 숙제를 잔뜩 안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새 정부와 거대 여당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대권주자급 위상을 가진 대표가 절실히 필요하다. 전대 다가오는데 또 같은 얼굴들 대표 유력 주자 약점 들춰보니… 하지만 후보 4명은 각자 결함과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새 지도부가 구성됐다고 해서 저 많은 과제가 술술 풀릴 가능성은 매우 작다. 국민의힘 대선후보였던 김 전 장관은 지난 4일 서울희망포럼 강연에서 “이재명 대통령에 맞서 내가 싸우겠다”며 “국민이나 당이 위축될 때 침묵하지 않고 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의 당 대표 출마 선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의 당무우선권을 매개로 김 전 비대위원장을 지명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시도했던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에 대한 당무감사는 김 전 장관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전 장관의 측근인 국민의힘 김재원 전 대선후보 비서실장은 지난달 13일 YTN <뉴스파이팅>에 출연해 “국민의힘은 이재명정부의 국정 전횡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등 야당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당무감사가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인지 회의적”이란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장관이 몰두하는 것은 ‘빅텐트’다. 김 전 장관이 사실상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면서 제시한 비전은 ▲권력의 잘못에 맞설 수 있도록 107명이 제대로 뭉친 국민의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낙연 전 총리·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 등과의 빅텐트 및 연대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당 체질 개선이란 측면에서 김 전 장관의 ‘빅텐트’에 대한 집착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나오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에도 빅텐트를 거론했다. 김 전 장관은 이 전 총리의 지지 선언은 이끌었지만,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와의 단일화는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도 스스로 제안했다가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태도를 바꿔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후보와 친윤계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대선에서 41%를 득표하는 등 비교적 선전했지만, 이 ‘비교적 선전’은 국민의힘의 처참한 상황에 비해 선전했다는 것일 뿐, 진짜로 선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여전히 빅텐트에 집착하고 있다. 빅텐트 정당은 다양한 세력을 묶고 그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대선후보 시절 당내 화합조차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국민의힘의 전신 새누리당을 탈당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자유통일당을 창당했단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다시 빅텐트 김문수 집착 심지어 김 전 장관이 대선후보 시절 구상했던 빅 텐트엔 전 목사 등 광장 세력도 포함됐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관악산에서 열심히 턱걸이를 해도 고령에 따른 판단력 문제가 따라다닐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김 전 장관이 윤석열정부 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연이어 발탁됐던 이유로는 “고령의 보수 정치인에 대한 예우”란 평가가 계속 나왔다. 이 평가엔 “정치적 영향력과 지도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발탁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선후보 교체 시도 당시 당사 후보실을 점거하는 등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연상시키는 과감한 선택은 일부 돋보였다. 하지만 과감한 정치적 선택도 정확한 판단력과 맞물려야 그 빛을 발한다. 대권·당권주자가 없단 약점이 있는 친윤계가 그나마 지향점이 비슷한 김 전 장관을 당 대표로 옹립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중도를 공략해 다시 정권을 되찾으려면 당 체질은 필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따라서 김 전 장관이 빅텐트에 집착하는 옛 관성을 버리지 못하면, 여당과 제대로 맞설 제1야당 대표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남는다.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해선 “어려운 상황에서 정면 승부하는 결기가 부족하다”는 일부의 평가가 있다. 한 전 대표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편한 길을 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지난해 22대 총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당시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당시 대표를 심판 대상으로 규정한 ‘이조 심판론’이란 구호를 내걸었다가 ‘108석 당선’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여당 대표가 야당 대표들에 대한 심판을 총선에서 승리해야 할 이유로 제시한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가 정치 인생에서 제일 빛났던 순간은 지난해 12월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였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반대하면서 “국민과 함께 이를 막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친한계 의원들을 국회로 소집한 후 민주당과 협조해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등 원로 인사들은 한 전 대표를 극찬했다. 조 대표는 지난 2월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여당 대표가 계엄을 좌절시키긴 어렵다”며 “보통 이런 걸 ‘별의 순간’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친윤계와 합의해 지난해 12월7일 진행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1차 표결 불참을 결정했다. 이어 다음날엔 한 전 총리와 함께 “총리와 여당 대표의 당정 협의를 강화해 국정 공백을 메운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헌법재판소가 한 전 총리 탄핵 심판 결정에서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각계각층에선 한 전 대표를 일컬어 “권력 찬탈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취지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동훈 급부상 당시 한 전 대표는 ▲조속한 직무 정지 ▲탄핵소추 표결 불참 ▲탄핵 찬성 등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계속 바꿨다. 그러다가 탄핵소추가 가결된 직후 친윤계의 반발과 최고위원 전원 사퇴 등이 이어지면서 당 대표직에서 쫓겨나듯 물러났다. 이후 한 전 대표는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대선 유세에 참여했고, 친한계를 움직여 대선후보 강제 교체 반대에 참여하는 등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친윤계와의 뿌리 깊은 갈등은 여전하고, 당 대표 출마에 대한 의견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 등 ‘결기 부족’이란 일각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김민석 총리 지명 철회 등을 요구하면서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하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농성이 되고 말았다. 나 의원은 냉방이 잘 되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비교적 가격이 비싼 김밥과 유명 메이커 커피를 곁들이고 탁상용 선풍기까지 갖췄다. 이런 상황을 알린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촬영해 스스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나 의원 자신이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지난달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캠핑이나 바캉스 같다”고 비웃었다. 지난 2018년 5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을 했던 자유한국당 김성태 전 원내대표도 지난 1일 MBC <뉴스외전>에서 “로텐더홀에서 출판기념회 하듯이 농성한다”고 비판했다. 친한계 일원인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도 “피서 농성”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나 의원은 “주말엔 로텐더홀에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달 30일 YTN <신율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나 의원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는 것”이라며 “국민의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지층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정작 농성의 대상인 김 총리는 같은 날 나 의원을 방문해 “식사는 했느냐”면서 “단식은 하지 말라”고 비웃었다. 김 총리의 기세는 하나도 꺾이지 않았고, 민주당은 지난 3일 김 총리 임명동의안을 가결했다. 대선 경선 그대로 옮겨지나 수많은 난제…독이 든 성배? 그러자 나 의원은 다음날 농성을 해제했다. 나 의원이 6일 동안 진행한 농성은 나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된 후 진행될 대정부 투쟁의 회의적 가능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당 대표 당선 가능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 의문이 커진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7일 오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후 겨우 8분 만에 사퇴했다. 안 의원은 지난 2일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국민의힘은 악성 종양이 뼈와 골수까지 전이된 말기 환자”라면서 “메스를 들어 보수 정치를 오염시킨 고름과 종기를 적출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안 의원은 송 비대위원장에게 “대선후보 강제 교체 시도와 관련해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전 원내대표에 대한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건의를 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중도·수도권·청년 중심으로 혁신위를 구성하려던 안 의원의 구상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원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의힘 혁신 당 대표가 되기 위해 도전할 것”이라며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안 의원은 혁신위원장 내정 이전부터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이 크게 점쳐졌다. 따라서 혁신위원장 내정 당시엔 “친윤계와 손을 잡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어 일찌감치 “친윤계가 이전처럼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왜 혁신위원장 자리를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함께 돌아다녔다. 안 의원은 “‘쌍권(권영세·권성동)’ 숙청을 혁신안으로 제시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직접 공개했다. 따라서 “혁신하는 당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은 챙겼다. 하지만 여전히 안 의원은 국민의힘에서 나 홀로 버티고 있다. 친윤계와의 연대설이 돌아다녔던 이유도 안 의원에게 세가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안 의원도 김 전 장관처럼 친윤계와 치명적으로 갈등한 이력이 생겼다. 김 전 장관과 달리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명분은 얻었을지 몰라도, 실리는 스스로 걷어찬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당 대표로 당선되더라도, 메스를 들어 고름과 종기를 적출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남는다. 현역 의원 20명 안팎 계보를 거느린 한 전 대표도 친윤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조 의원과 장 당협위원장의 출마 선언은 주요 후보 4명에 비하면 비중 있게 취급되진 않는다. 다만 조 의원에 대해선 “한 전 대표가 불출마하고, 좌장인 조 의원이 대신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수장과 좌장이 동시에 출마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숙제 뻔한 결말? 여러 폭탄을 끌어안고 죽을 가능성이 더 큰 당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출혈은 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제대로 혁신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쟁점 법안들을 연이어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독이 든 성배 취급을 받는 국민의힘 대표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자중지란을 거듭하는 국민의힘 내부의 먹구름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