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논란의 사외이사 막전막후

권력기관 출신 모시기 경쟁 '박 터진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사외이사 제도는 경영진의 횡포를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전문성을 갖춘 외부 인사를 사외이사로 앉혀 경영진을 견제하자는 게 기본 취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외이사는 이사회의 결정에 순응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정기주주총회 현장을 뜨겁게 달군 사외이사 적격성 논란 역시 따지고 보면 사외이사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3월이 되면 주주들의 이목은 주주총회에 집중된다. 거의 모든 상장사들이 매년 이 시기에 주총을 거행하는 까닭이다. 올해 3월에 주총을 개최한 상장사만 해도 800곳이 넘는다. 그사이 핵심 관전 포인트였던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거의 모든 주총에서 무사통과 됐다.

일부 사외이사들의 지난 행적이 논란을 야기했지만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아직까지 갖가지 구설을 양산하고 있다. 이해관계에 취약한 구조적인 문제가 곳곳에서 부각된 덕분이다. 회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 사외이사로 발탁돼 독립성을 저해하는 경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되풀이되는
우리 편 뽑기

이해관계자를 임명하는 행태는 사외이사 선임 논란에 불을 지피는 단초가 된다. 하이트진로와 하이트홀딩스는 25일 주총에서 회사 임원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조판제 하이트진로 사외이사는 과거 하이트맥주 임원을 지낸 인물이다. 하이트홀딩스는 김명규 사외이사를 재선임했다. 그 역시 하이트맥주, 하이트음료, 진로 등에서 임원을 거쳤다. 둘 다 독립성을 중시하는 사외이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계속됐다.

조현덕 한진칼 사외이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2013년 대한항공을 인적분할해 한진칼을 설립해 지주회사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문용역을 수행했다.


일부 사외이사는 회사와 이해관계가 상충된다. SK텔레콤 오대식 사외이사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태평양은 LG유플러스의 법률 대리인으로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반대하고 있다.

LG화학 안영호 사외이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이다. 김앤장은 정부 온실가스 배출권 할당 처분 취소소송에서 LG화학 등의 법률 대리를 맡고 있다. 한진해운 노형종 사외이사는 KSF선박금융 감사다. 노 사외이사는 자신이 감사로 재직한 회사와 거래관계가 있는 한진해운 사외이사로 선임됐다는 점에서 이해상충 소지가 다분하다.

현대엘리베이터 서동범 사외이사 후보는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이음프라이빗에쿼티 상무로 재직 중이다. 이 회사와 특수관계인 이음제이호기업재무안정사모투자합자회사는 현대엘리베이터 전환사채를 인수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주총에서 이옥섭 바이오랜드 부회장을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옥섭 사외이사는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의 화장품생활 연구소 수석연구원 출신으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장(부사장) 등을 지낸 인사다.

뜨거운 감자 ‘독립성’ 한계
“보험처럼 갱신” 정권 따라 교체

일부 대형 금융지주사들은 임기가 끝난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잔류시켜 논란을 키우는 모습이다. 경영진이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지적과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24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신한금융지주는 5년 임기를 채운 남궁훈 사외이사를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했다. 금융회사 사외이사 임기는 최장 5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기타비상무이사는 임기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외이사로서 임기를 채웠더라도 이사회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례는 지금껏 극히 드물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한동우 회장이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서 지배구조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이사회를 경영진과 교감할 수 있는 인물들로 꾸렸다고 평가한다.

KB금융지주는 지난해 3월 주총을 통해 임기 1년의 사외이사로 임명했던 7명을 전원 유임시켰다. 사외이사의 힘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사외이사 임기를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KB금융지주가 이번에 사외이사 전원에 대해 유임 결정을 내리면서 임기도 다시 2년 으로 돌아오게 됐다. 지배 구조의 연속성을 위한 선택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김종준 전 하나은행장은 하이투자증권 사외이사로 금융권에 복귀했다. 그는 과거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조치를 받았던 전례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2년 3월 행장으로 취임한 이후 2014년 4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2011년 하나캐피탈 사장 시절 영업정지된 미래저축은행을 부당 지원한 사실이 적발돼 문책경고 제재를 받았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제기된다.

일 안 해도
재선임 OK

업무 능력이 검증되지 않거나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는 인물을 사외이사에 선임하는 경우도 되풀이됐다. 매번 사외이사를 선임 과정에서 잡음을 만들던 기업도 더러 눈에 띈다.

지난 18일 종로구 LG광화문빌딩에서 열린 주총에서 LG생명과학은 ▲재무제표 승인 ▲이사 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을 처리했다. 다만 이번에 재선임 된 양세원 사외이사의 저조한 이사회 출석률은 논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양 이사의 지난 3년간 이사회 출석률은 71%, 75%, 75%로 평균 73.7%이다. 일각에서는 이사회 출석률이 75% 미만인 이사들에 대해서는 업무의 충실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해 재선임에 반대를 권고하기도 했다.

현대상선은 이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외국인 사외이사를 재선임해 논란을 키웠다. 홍콩 국적의 에릭 싱 치 입(ERIC SING CHI IP)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린 지난 10년간 이사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 2005년 3월 처음으로 사외이사에 선임된 이래 불과 6번 출석한 게 전부였다. 2011년부터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서 2년 연속으로 잡음에 휩싸였다. 계획보다 일주일 미뤄진 25일이 돼서야 가까스로 주총을 치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외이사가 중도에 사퇴하면서 주총에 차질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당초 주총에서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이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민유성 후보가 이사직 자진 사퇴 의견을 밝힘에 따라 홍기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교체됐다. 민 후보는 최근 SDJ코퍼레이션에 몸담고 맡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 개입한 데다 정부와 연관된 산업은행장을 역임한 약력이 있어 적격자로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권력기관 출신
정경유착 고리

현대중공업의 사외이사 자질 논란은 지난해에도 일어난 바 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주총을 앞두고 사외이사 후보를 송기영 법무법인 로고스 상임 고문변호사에서 유국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변경했다. 송 변호사의 경우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과 특수관계에 있어 비판이 일었다. 송 변호사는 정몽준 대주주와 현대중공업이 출연해 세운 아산나눔재단의 감사를 맡은 바 있다.


대기업 사외이사 자리에 권력기관 출신 인사들이 진출하는 모습도 변함없이 재현됐다. 사외이사가 경영 투명성이 아닌 정경유착의 고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벌닷컴이 10대 그룹 상장사의 신규 또는 재선임 예정인 사외이사 후보 140명을 분석한 결과, 43.6%인 61명이 정부 고위관료, 국세청, 금감원, 판·검사 출신으로 나타났다. 전직 장·차관도 16명이나 된다. 권도엽 전 국토해양부장관(GS건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두산인프라코어), 김경한 전 법무부장관(한화생명),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장관(삼성중공업)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권도엽 전 장관은 요주의 대상이다.

GS건설은 18일 열린 주총에서 권도엽 전 국토교통부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권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5월부터 2013년 3월까지 국토해양부장관을 지냈다. GS건설은 사외이사 선임을 두고 권 전 장관의 전문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다만 독립성에 국한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주무 장관으로 있던 분야에서 기업의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검찰 고위간부 출신 변호사들이 소속 지방변호사회의 허가 없이 대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됐거나 활동했던 사실이 공개돼 사외이사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권력기관 출신 변호사들을 대거 영입해 방패막이로 삼거나 향후 돌발상황에 대비한 보험 명목으로 활용한다는 지적이다.

검찰총장 출신인 송광수 변호사는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영입된 이래 3년 동안 20차례 이사회에 참석하며 60여개 의안에 모두 찬성 입장을 냈다. 두산 사외이사로도 활동하는 송 변호사는 이 회사에서도 찬성표를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퇴직 후 방패막이 역할 
전직 검찰 간부들 겸직 위반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성호 변호사도 2013년부터 CJ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자신이 참석한 모든 안건에 찬성 입장을 개진했다. 지난해 기아자동차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귀남 변호사 역시 7차례 이사회에서 모두 찬성 의견을 나타냈다. 이 변호사는 2009∼2011년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일부 인사는 재직 시절 수사했거나 직무와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었던 기업과 연고를 맺었다. 송광수 변호사는 검찰총장 시절 삼성가의 편법 경영권 승계 수사를 지휘했지만 퇴임 후인 2013년 삼성전자 사외이사를 맡았다. 올해 주주총회에서 다시 선임돼 3년간 활동한다. 이재원 변호사는 자신이 지검장을 지냈던 서울동부지검장 관할 구역에서 제2롯데월드를 추진하던 롯데쇼핑의 사외이사가 됐다.
 

기업이 판·검사 출신 법조인을 영입한 것은 새삼스러운 그다지 일은 아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최태원 SK 회장 형제가 회삿돈 횡령 등 혐의로 재판을 받던 2012년 1월 이 회사에 전무급 이사로 영입되기도 했다.

물론 해당 기업이 충분한 검토와 자문을 거쳐 결정한 사안인 만큼 찬성, 반대 여부만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실상 거수기 역할에 그칠 뿐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굳건한 방패막이
회사와 한통속

실제로 시민단체들은 권력형 사외이사 선임을 ‘방패막이’ 쯤으로 평가한다. 권력형 인사의 경우, 풍부한 인맥과 경험을 통해 기업에 유리한 정책입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사정기관 동향파악 등 사실상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하는 그릇된 사외이사의 행태가 곳곳에서 드러난다"며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선진화하기 위해서라도 전관예우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djy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가시화된 오너 2·3세 승계작업

정기주주총회를 거치며 대기업들이 경영 승계 작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오너일가 2·3세들이 그룹 주력 계열사 사내이사 명단에 잇달아 이름을 올린 형국이다.

재계의 대표적인 3세 경영인으로 꼽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 부사장은 지난 18일 열린 대한항공 주총에서 대표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조 부사장은 그룹 지주회사인 한국공항의 대표이사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미 한진칼과 대한항공, 한국공항 등 그룹 내 주요 12개 계열사에서 등기이사를 맡고 있는 조원태 부사장은 지난 1월 단행된 대한항공 ‘2016년 정기 인사’에서 회사 전 부문을 관장하는 총괄 부사장으로 선임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 대표이사에 오르자 일각에서는 사실상 조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한진그룹의 경영 승계가 정지작업을 마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실 사장은 올해 정기 주총에서 등기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금호산업은 28일 열린 주총에서 박세창 사장의 사내이사 신규 선임 안건을 통과시켰다.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30.08%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박세창 사장의 금호산업 등기이사 선임은 그룹 경영 승계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세아그룹의 3세 경영인 이태성 세아베스틸 전무도 등기이사 명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 전무는 세아베스틸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이번 세아베스틸 등기이사 선임으로 이태성 전무는 세아홀딩스와 세아특수강 등 그룹 핵심 계열사의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지난 2009년 세아그룹 지주사인 세아홀딩스에 입사한 이태성 전무는 지난해 세아홀딩스와 세아베스틸 전무로 승진한 바 있다.

한술 더 떠 두산그룹은 오너가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큰조카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넘기면서다. 박정원 회장은 25일 주총에 이은 이사회에서 의장 선임절차를 거친 뒤 그룹 회장에 정식 취임했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창업 회장의 유지에 따라 형제간에 경영권을 승계해왔다. 박 창업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회장부터 시작해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회장까지 차례로 경영권이 이어져왔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일가 1세대가 그룹의 기틀과 성장을 이끌었다면 2·3세대는 신사업과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며 “그룹의 전면에 등장한 이들의 활약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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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