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25)전탁순 선인산업 대표

돈 없는 상인들 죽이고 자기만 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25화는 159억6300만원을 체납한 선인산업 전탁순 대표다.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용산. 용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컴퓨터의 메카였다.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주변엔 수많은 전자상가가 생겨났다. 주말이면 전자 제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 거리마다 가득 찼다. 상가 통행로는 흥정과 호객 행위로 북적였다. 전자상가는 용산을 찾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일터였다.

IMF 때 부도

선인상가도 그랬다. 오밀조밀 가게가 밀집한 선인상가는 용산 일대의 랜드마크로 각인됐다. 1997년 부도로 운영사가 폐업하기 전까진 누구도 선인상가의 실패를 예견하지 못했다. 선인상가의 운영업체인 선인산업은 같은 해 11월14일 은행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1998년 2월에는 선인산업의 대표 전선한씨의 은행 거래가 정지됐다.

선인산업의 부도는 전자 및 IT업계의 큰 사건이었다. 선인산업의 부도를 전후로 여러 컴퓨터 관련 유망 중소업체가 자금난에 휩싸여 문을 닫았다. 비교적 현금이 풍부했던 선인산업은 철강회사인 서울제강의 연대 보증으로 재정난을 자초했다. 당시 서울제강은 선인산업의 계열사 가운데 하나였다.

특수강 전문업체인 서울제강은 IMF 외환위기 여파와 판매부진이 겹치면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인천에 본사를 둔 서울제강은 당시 주거래은행인 서울은행 동인천지점에 만기도래한 12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했다.


1997년 11월14일 1차 부도를 낸 서울제강은 다음날인 15일, 최종 부도처리됐다. 선인산업은 서울제강에 400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가 같은 날 부도를 맞았다. 부도에 따른 선인산업의 지급보증 액수는 2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선인산업은 부동산 임대업을 통해 수익을 냈지만 1995년부터는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 및 유통에 나서는 등 사업 확장에 의욕을 보였다. 이 무렵 전자제품 무역은 유래 없는 호황을 맞았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노키아 휴대폰을 대리 판매한 선인산업의 실적은 신통치 못했다. 경영진은 영상사업부를 꾸려 경기 양평 덕소에 카메라 생산 라인을 가동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선인산업은 선인상가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사업 자금을 융통했다. 선인산업의 부도는 선인상가에 입주한 중소 상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짐을 뜻했다. 또 상인들과 전대차계약을 맺고 상가를 임대했던 임차인들 역시 초기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선인상가가 채권단의 주도로 경매에 넘어가면 자칫 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이때 선인산업은 1200여명의 임차인들을 대상으로 임대계약을 전세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상가가 매각되더라도 전세권이 있으면 남은 권리금을 보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선인산업이 제시한 해결책에 찬성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선인산업 주주 부채를 떠안아서라도 상가를 정상화시키고자 했다. 선인산업이 인천지방법원에 화의신청을 냈을 당시 부채는 1218억원, 순부채는 585억원에 달했다.

서울시 29억 국세청 130억6400만원
선인산업 부도 직후 비상장주식으로 뒷돈

선인상가의 전체 부동산 감정가는 700억∼800억원으로 금융권에 정상 매각된다면 순부채를 제하고도 얼마간 버틸 수 있었다. 더구나 임차인들은 350억원상당의 임차보증채권을 갖고 있었다. 1999년 10월 임차인들은 선인산업 주주들과 합의해 경매 없이 선인상가의 근저당권과 채권을 넘겨받기로 약정했다. 또 선인산업 경영진은 미국 론스타펀드에 넘어간 일부 채권을 상인들이 인수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그러나 약정은 휴지조각이 됐다. 선인상가가 법원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이때 등장한 회사가 지포럼에이엠씨다. <일요시사>는 지난 3월26일 연속기획 시리즈인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17)천세명 지포럼에이엠씨 대표'라는 기사에서 관련한 소식을 전한 바 있다.

결국 임차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에 선인상가를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매물에 눈독을 들인 중견기업 대한전선은 임차인조합에 1300억원을 빌려주고 연 25%의 이자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임차인과 상인들이 버틴 것은 당시 'PC방 붐'을 타고 선인상가의 경기가 지속적인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임차인조합과 약정했던 경영진의 태도가 바뀐 것도 같은 이유다. 군인공제회를 포함한 여러 곳이 선인상가 매수에 관심을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당시 선인산업 대표였던 전탁순씨는 상인들의 '뒤통수'를 쳤다. 매각금액 1500억원을 받고 미국계 투자회사인 리만브라더스에 상가를 넘기기로 합의한 것이다. 앞서 경매를 통해 상가를 낙찰 받은 임차인조합은 잔금 850억원을 납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임차인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여론의 반대로 리만브라더스 매각은 무산됐지만 전씨는 선인상가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전씨는 1998년 선인산업에 비상장 주식을 양도하면서 수십억원의 매매대금을 챙겼다. 특히 선인산업은 전씨 소유의 주식을 사들이기에 앞서 주주총회를 통해 감자를 결의하고, 주식매입 직후 자본금을 감소시키는 등 회삿돈을 줄여 전씨에게 안겼다.

전씨는 선인산업에 빌려준 돈을 제하고 투자금을 전액 회수했다. 이 무렵 전씨는 타워크리스탈빌딩 등 부동산은 물론 다른 회사의 주식을 대량 보유한 전형적인 '투기 부자'였다. 선인산업은 전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도난 주식의 매매대금을 주당 10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법원은 관련 내부거래의 위법성을 인정했다. 과세당국은 전씨에게 세금을 물렸다.

선인산업은 2003년 11월부터 주민세 등 3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수할 체납액은 25억8400만원이다. 선인산업은 2002년부터 법인세 등 5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국세청이 과세한 체납액은 91억4400만원이다.

선인산업의 대표자 전탁순씨는 개인 자격으로도 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2005년 1월부터 주민세 등 3건의 지방세를 체납했다. 서울시가 거둘 세금은 3억3300만원이다. 국세청에도 전씨는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1996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12건의 세금을 체납했고, 확인된 체납액은 39억200만원이다.

전씨 앞으로 달린 세금의 합은 159억6300만원으로 집계됐다. 선인산업의 계열사인 서울제강 역시 고액체납 법인에 올라 있다. 관련 체납액까지 더하면 전체 액수가 200억원에 육박했다. 서울제강은 2004년부터 법인세 등 8건의 세금을 누락했다. 체납액은 32억5200만원이었다.

전형적인 부자

그런데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는 서울제강 대표자의 이름이 생략돼있다. 서울제강이 폐업한 데다 대표자도 없어 부과한 세금은 사실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전씨의 주소지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이었다가 경기 용인에 있는 보정동으로 바뀌었다. 지하철 분당선 인근에 있는 3억∼4억원대 아파트가 전씨의 새 주거지로 파악됐다. 현재 전씨는 사업 실패로 세금을 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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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