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 걸린' MB정권 광산스캔들 추적

해외로 나간 돈…정권 실세에 꽂혔나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MB정부가 추진한 멕시코 볼레오 동광사업이 무려 2조원(담보 포함)을 투자했지만 사업성이 불투명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로 송금된 투자금 중 일부는 출처가 불분명해 비자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볼레오 사업은 '빙산의 일각'이란 지적이 나온다. MB정부의 해외자원개발 사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때마다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은 거액의 부채를 짊어졌다. 그 합이 수십조에 이른다. 사업 과정에서 공중으로 뜬 수많은 돈다발은 대체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지난달 허리케인 '오딜'이 멕시코 산타로살리아 볼레오 광산 현장을 덮쳤다. 이 사고로 현지로 파견된 한국광물자원공사(이하 광물공사) 직원 1명이 숨지고 1명은 실종됐다. 광물공사는 멕시코 볼레오에서 구리 등 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시험생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두 번째 '허리케인'이 볼레오 현장을 덮쳤다. 볼레오발 쇼크는 지난 6일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볼레오발 쇼크
수조원 어디로

김제남 정의당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볼레오 동광사업의 숨겨진 치부를 폭로했다. 한 차례 '부도(default)'가 난 상황을 은폐하고 2조원의 혈세를 투입하는 등 부실과 부정으로 얼룩진 사상 최악의 해외 개발사업이라는 내용이었다.

볼레오 동광사업은 지난 2008년 투자회사 바하마이닝(Baja Mining)이 재무투자자를 모아 시작한 개발사업이다. 바하마이닝은 광산개발 경험이 부족한 사실상 투기 목적 자본이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은 이런 바하마이닝의 지분 30%을 얻기 위해 10배에 가까운 프리미엄을 주고 지분을 사들였다. 최초 매입비용은 7600만불이었다. 문제의 개발사업은 2011년 6월이 돼서야 첫 삽을 떴다.


그러나 착공 1년 만인 2012년 6월 볼레오 동광사업은 부도가 났다. 당초 예상하던 개발비용보다 5억불가량이 더 필요하게 되자 대주주인 바하마이닝이 손을 털어버린 것이다. 이보다 앞선 2012년 4월 바하마이닝의 주가는 5센트까지 폭락했다. 추가 개발비용 확보가 어려워지자 주가가 곤두박질 친 것이다.

대주단은 '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보고 추가 대출마저 중단했다. 볼레오 동광사업은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완전' 자본잠식이 이뤄졌다. 모든 대부계약은 부도 상태가 됐고, 사업의 생사여탈권은 미국 수출입은행, 캐나다 수출은행, 한국 산업은행 등 대주단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 무렵 지구 반대편에서는 대선 국면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자원외교 전도사'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부실로 점철된 해외 자원개발사업과 관련해 집중포화를 받은 상태였다. 개발 목적으로 해외로 빠져나간 돈은 MB정권의 판도라라는 얘기가 돌았다. 여기에 볼레오 동광사업의 부도 소식까지 더해지면 다가올 대선 가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누군가는 총대를 매야 했다.

김신종 당시 광물공사 사장은 경영진과 부도 사실을 숨기기로 합의했다. 김 사장은 TK(대구·경북) 출신으로 고려대를 나와 대통령인수위까지 거친 MB의 측근으로 분류됐다. 더욱이 김 사장은 이 전 대통령의 자원외교를 수차례 수행하며 'MB표 자원개발'의 상징으로 불렸다.

이런 김 사장과 경영진은 투자사 바하마이닝이 개발비용 증가로 사업을 자체 포기한 것처럼 실상을 은폐했다. 심지어 아무 권한이 없는 바하마이닝과 '협상쇼'를 벌여 모든 지분을 인수했다. 이 같은 계약 사실은 이사회에 보고됐다.

그런데 이사회 보고에는 볼레오 사업권이 대주단 쪽으로 넘어간 사실이 누락됐다. 이들은 동(銅) 가격을 임의로 높이고 기준수익률을 낮춰 잠재된 사업성이 상당한 것처럼 포장했다. SK네트웍스 등 사업에 참여한 국내 컨소시엄이 추가 투자를 할 수 없다고 통보한 사실조차 숨겼다. 지난 6월 감사원은 이 같은 사실들을 확인해 관련자들을 징계 조치했다. 그러나 징계자 명단에 김 사장은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볼레오 개발사업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사업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바하마이닝 부도 직후 경영진은 이사회가 승인해 주지 않으면 1억6300만불의 손실이 날 것이라고 겁을 줬다. 이어 9000만불을 추가 투자하면 지분을 51%로 늘려 운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꾀었다. 즉 투자를 하지 않으면 2000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보지만 투자가 되면 사업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멕시코 동광사업 2조 날릴 위기…비자금 가능성
MB정부 해외자원개발 연달아 실패 "누구 책임?"

결국 이사회는 이미 휴지조각이 된 지분 21%를 9000만불에 인수하고, 2차로 지분 39%를 4억9110만불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사회가 진행됐던 2012년 8월 당시 캐나다 주식시장이 평가한 바하마이닝의 시가총액은 2032만불(캐나다달러)에 불과했다.

또 김 사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고정식 사장은 2012년 10월 미국수출입은행의 볼레오사업 채권 4억1900만불(1억2600만불 기대출)을 일거에 인수했다. 당초 9030만불로 예상된 투자비는 대선을 앞둔 2달 만에 무려 8억불(한화 1조원)까지 급증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1차로 투입된 9000만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에 있다. 송금 과정에서 이사회의 승인 없는 불법송금이 벌어졌고 돈을 받는 입장인 볼레오 현장의 회계조직은 이미 와해돼 있었다. 송금된 9000만불이 실제 볼레오 개발사업에 쓰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는 셈이다. 일각에선 이 돈의 일부가 비자금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볼레오 현장에는 건설담당 직원 단 1명만 상주하고 있었다. 2012년 9월 말이 돼서야 멕시코 현지에 재무현황 실사를 한다며 직원 2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겨우 열흘 만에 실사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후에도 광물공사는 올 5월까지 약 2년 동안 디폴트(부도) 상황을 면치 못했다. 대주단이 내어주는 초단기 권리행사유보협약(stand still)으로 연명했다. 이 기간 광물공사는 대주단에 휘둘리며 사업비도 추가로 충당하는 등 문자 그대로 '봉' 노릇을 했다.

글로벌 호구
광물 어디에

만신창이가 된 개발사업은 올 5월이 지나서야 볼레오 운영사가 회사채 3억4000만불을 발행하고 이를 광물자원공사가 보증하며 부도 상황을 면했다. 대주단은 단 한 푼의 손실도 없이 사업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반면 광물공사는 보증 과정에서 각종 담보를 제공해 경제적 부담을 2조원대로 상승시켰다. 이는 부도의 책임과 혹시 모를 리스크를 국민 혈세 2조원을 퍼부어 대한민국 정부가 떠안은 셈이다.

김 의원은 "이 정도면 봉 노릇을 넘어 (대한민국 정부가) '글로벌 호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에 다름없다"고 강조했다.김 의원에 따르면 현재 볼레오 사업은 대주단이 6억9100만불 손실 가치 평가를 내리는 등 이미 경제성을 상실한 모양이다. 광물공사가 내놓은 회생 계획조차 광산의 지질과 기술적 문제 등이 맞물려 절망적이라는 판정이 우세하다.

그럼에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사장과 경영진, 이사회는 어떤 징계나 문책도 받지 않았다. 부도난 사업에 투자를 결정한 김 사장과 고 사장, 주무장관이었던 홍석우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주단의 일원으로 사건 경과를 처음부터 지켜본 산업은행은 투자금 회수에 급급했다.

김 의원은 "볼레오 사업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MB정부가 추진한 대형 해외 자원개발사업은 '빚 좋은 개살구'였다는 지적이다. MB정부는 정권 초부터 자원외교 세일즈를 진두지휘했다. 문제는 그때마다 온갖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광물·석유·가스공사 부채만 수십조
무리한 투자 후폭풍…대책 있나 없나

특히 자원외교를 주도한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측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의혹의 중심에 서는 일이 많았다. 먼저 이 전 의원이 주도한 볼리비아 리튬광산 개발사업은 2012년 7월 정식계약을 맺고도 단 한 발짝도 사업이 진척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볼리비아 정부는 리튬 채굴권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며 컨소시엄을 구성한 포스코와 광물공사는 사업을 잠정 중단한 상황이다.


나미비아 우라늄 개발사업은 계약 없이 사업이 종료됐다. 당초 정부는 나미비아 정부와 우라늄을 공동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경제성이 희박해 없던 일이 됐다. 그 사이 중국 정부는 지난해 나미비아에서 우라늄 시추에 성공했다.

박 전 차관이 주도한 카메룬 다이아몬드 개발사업에서는 정부 고위관료가 연루된 희대의 주가조작이 벌어졌다. 오덕균 CNK 대표는 올 4월 카메룬 광산에 매장된 다이아몬드 추정량을 부풀려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시 CNK 측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오고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검찰의 예리한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요란했던 미얀마 해상광구 사업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권 실세로 알려진 이영수 KMDC회장이 개발권을 따내 화제가 됐던 이 사업은 해당 광구가 '빈 광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뭇매를 맞았다.

마다가스카르 채광사업의 경우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앞서 광물공사로부터 지분을 사들였던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는 "사업성이 없다"며 지분을 전량 되팔았다. 해당 프로젝트는 1조2500억원을 투자해 2010년부터 생산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4년이 지난 올 1월이 돼서야 겨우 채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컨소시엄이 등을 돌려 사업이 언제 중단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국가가 보증한 해외투자는 대부분 실패했거나 커다란 빚만 안고 자금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광물공사와 석유공사 등 에너지 관련 공기업에 투입된 예산은 5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각국 정상간 MOU(양해각서)만 남발했지 성과는 초라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08년 2월 2조원짜리 이라크 쿠르드 유전개발사업권을 따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탐사과정에서 4400억원을 쏟았음에도 약속한 원유나 가스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해 한 광구에서 원유가 발견됐지만 예상보다 매장량이 작아 사업 규모는 절반으로 축소됐다.


지난해 광물공사가 국회로 제출한 자원외교 현황에 따르면 대통령을 비롯한 총리, 특사 등이 실시한 자원외교는 모두 35건(MOU)에 달했지만 실제 계약체결로 이어진 사례는 단 2건에 그쳤다. 이처럼 해외 자원개발 실적이 뻥튀기되면서 정부가 입은 공식적인 손실액만 2조3000억원(지난해 기준)을 넘었다. 이는 광물공사가 볼레오 사업에서 입은 피해액 등은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내놓은 '주요 공공기관 결산 평가'에 따르면 석유공사와 가스공사는 19억6000만불의 손해를 입었다. 자료에 따르면 MB정부는 2008년 '석유공사 대형화 방안'을 발표하고 2012년까지 해외 자원개발에 17조8000억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이 기간 당기순이익은 9000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부채규모는 2008년 5조5000억원에서 2012년 17조9800억원으로 늘어났다. 가스공사도 갚아야 할 빚이 23조5000억원 늘면서 부채비율이 150% 이상 폭등했다. 광물공사 역시 부채비율이 70% 이상 증가했다.

나라 곳간 털어
외국과 나눠먹기

상황이 이럼에도 '묻지마 해외 투자'는 여전히 붐이다. 지난 6일 새정치민주연합 박완주 의원이 석탄공사로부터 제출받은 '몽골 석탄개발 투자현황'에 따르면 지금껏 274억원의 손실을 본 이 사업에 석탄공사는 19억원을 추가로 투자했다. 해당 사업은 감사원 감사결과 부실사업으로 판명돼 사업 전면 재검토를 요구받았다. 석탄공사는 2010년부터 몽골에서 생산을 시작해 누적 생산량은 10만2029톤에 이르렀지만 판매량은 8.6%인 8811톤에 그쳤다.

해외 자원개발을 명목으로 벌어지는 돈 잔치, 국민의 혈세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흘러가고 있다. 우리 곳간을 털어 먼 나라 정부를 배불리는 악순환은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다. 과거 이 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재계 실력자와 지분 거래를 했다는 소문은 그의 '비즈니스'가 국익을 위한 것인지 사익을 위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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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