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일파만파 1심 판결 후폭풍

'한통속' 박근혜·이명박·원세훈 모두 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대선의 열기가 대한민국을 달궜던 2012년 12월11일.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는 오피스텔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갔다. 김씨는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에 정치댓글을 단 혐의를 받았다. 경찰은 서둘러 김씨의 혐의를 벗겨줬다.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중간 수사 결과가 5일 뒤인 12월16일 밤 11시에 발표됐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려 640일이 걸린 수사는 1심 판결로 전환점을 맞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유죄를, 박근혜정부는 면죄부를 받았다.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지만 위법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지난 11일 사법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내린 판결의 요지다.

국정원법 유죄
선거법은 무죄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및 국가정보원법(이하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세부적으로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앞서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됐다. 의혹의 핵심은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직원을 동원해 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유리한 댓글을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문제가 된 댓글을 보면 특정 정치세력을 비난하고자 하는 인상이 강했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는 '뒈져야 할 사람' '문죄인'으로 비하됐다. 반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우호적인 문장이 쓰였다. 국정원의 댓글 활동으로 득을 보게 될 이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이른바 '댓글사건'은 현 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된 '태풍의 눈'으로 확대됐다. 만약 국가정보기관이 대선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 여론을 조작한 사실이 인정된다면 박근혜정부가 입게 될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 6월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현 정부의 대리격인 법무부와 갈등을 빚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수사팀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징역 2년6월 집유 4년…선거법 위반 무죄
정부 한숨…채동욱 찍어내기 등 숱한 논란

그러나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거론하며 구속영장 청구 및 선거법 위반 적용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법무부 입장에서 정권에 해가 되는 수사를 방관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힘겨루기를 하던 두 기관은 절충안을 만들었다. 구속영장 청구를 검찰이 포기하는 대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키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채 총장은 청와대 눈 밖에 났다는 게 정설이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 기소 후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혼외아들 보도로 낙마했다.

수사팀 안에서는 '항명 파동'이 일었다. 윤석열 당시 특별수사팀장은 국정원 대선개입수사 과정에서 상관과 법무부의 외압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결재권자였던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야당 도와 줄일 있느냐"는 말로 윤 팀장과 맞섰다고 전해진다. 문제의 사건으로 윤 팀장은 수사팀에서 배제된 후 좌천됐다. 조 지검장은 결백을 주장하며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박근혜 면죄부
반토막 난 검찰


검찰 안에서 나름 중립을 지키고자 애썼던 조 지검장의 사임, 특별수사팀 핵심 인물로 꼽힌 윤 팀장의 부재는 사건 공소유지에 어려움을 불러왔다. 재판이 시작되자 수사팀에 새로 투입된 검사들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사건을 검토할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수사팀이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한 트위터 멘션(글) 및 리트윗의 증거능력을 둘러싸고도 공방이 가열됐다. 압수수색으로 국정원의 광범위한 사이버 활동을 입증한 것까진 좋았으나 정작 문제는 재판부를 설득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건의 꼬인 매듭을 풀 핵심 증인들은 출석을 거부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안이 가진 폭발력 때문에 심리는 1년 넘게 이어졌지만 권부의 핵심에는 접근조차 못했다.

지난 7월15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채동욱호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기소한 2013년 6월14일 이래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공판에서 검찰은 "국가정보기관이 일반 국민으로 가장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트위터를 대량으로 퍼뜨린 것은 인위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반헌법적인 행태"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검찰의 주장을 일부 인용해 원 전 원장이 국정원법 9조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며 "이는 국민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개입한 것으로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행위로 죄가 무겁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인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무죄 판결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북한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대응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원 전 원장은 관련 댓글 활동 등에 대해 위법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과거부터 지속된 국정원 심리전단의 잘못된 업무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고 답습한 점 ▲특정 후보자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기 위해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이 참작됐다.

특히 재판부는 "보통의 선거운동이라면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특정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심리전단의 트위터 활동은 대선을 앞둔 11월에 감소했다"며 "선거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논란이 됐던 '전부서장 회의 발언(지시·강조 말씀)'에 대해선 "오히려 선거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지시한 사실만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원 전 원장은 선고를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진보 성향의 방청객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 전 원장이 법정을 빠져나간 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박주민 변호사와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 등은 기자들 앞에서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건 도둑질은 했지만 절도범은 아니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이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법 위반은 하지 않았다는 판결은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2012년 4월 전부서장 회의 발언에서 "북한이 총선에서 야당(이) 되면 강성대국은 완성된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했어요. 우리 국정원은 잘못 싸우면 없어지는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원 전 원장의 발화 시점을 지목하며 후보자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인 데다 특정인을 위한 행위로 볼 수 없다고 짚었다.

도둑질 했지만
절도범 아니다

원 전 원장과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들 국정원 직원이 매달 원 전 원장으로부터 하달받은 이슈 및 논지에 따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비방한 점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선거법 위반에 대해선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상명하복이 중시되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 같은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범행의 위법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이유를 댔다.

이번 판결로 청와대는 마음의 짐을 덜었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최대 수혜자로 꼽았다. 국정원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의심과 혹시 모를 정치공세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patriamea)에 "원세훈 개인은 처벌하되 정권의 정통성은 살려주는 판결"이라고 적었다.


현직 한 법원 관계자는 "정치적인 고려를 제외하고 판결문만 봤을 때 재판부의 논리를 납득할 만한 했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는 "선거법은 국정원법과 입법 취지가 다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다만 이 판결로 다른 선거사범들에게 선거법 위반을 어떻게 적용할지, 쉽게 인정한다면 차별적인 법해석으로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스갯소리'라고 강조한 뒤 "중앙(서울중앙지법)인데다 공안사건인데 우리 식구도 승진해야 하지 않겠냐"며 "내가 검사라면 흥분할 상황"이라고 비꼬았다.

언론 안팎에서 제기된 강한 책임론, 자성론과 달리 검찰은 표정관리에 한창이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 것에 담담해하는 눈치다. 이번 정부 들어 본의 아니게 라이벌로 부상한 국정원을 견제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대 수혜자' GH '숨은 수혜자' MB
사정 라이벌 검·국 나란히 표정관리
[여] 마지막 리스크 해결 
[야] 무너진 최후의 보루

판결 직후 검찰 일각에선 무리한 기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사건을 진두지휘한 채 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현 수뇌부가 책임질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사실로 확인했고, 전직 국정원장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맡은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다.

올 초 검찰은 이른바 '국정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휘말리며 국정원에게 빚을 졌다. 앞서 국정원은 일부 공안라인의 견제가 있었지만 내부 평이 좋았던 채 총장을 넘어뜨린 '주범'이라는 의심을 샀다. 때문에 이번 판결로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수장을 찍어낸 국정원에게 '모종의 복수'를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항소 과정에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한 공소유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국정원은 잃은 게 많은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혐의를 떠나 그간 국정원이 수행해온 대북·방첩활동이 잘못됐음을 수차례 지적했다. 원 전 원장의 양형 감경 사유로는 '국정원의 잘못된 업무 관행'이 언급됐다.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사이버 활동이 이전보다 위축됐을지언정 북한과 연관된 활동을 사실상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범죄 사실을 "정부의 정책기조에 반대하는 특정 정당 및 정치인을 비판한 행위"로 한정했다.

때문에 국가 안보라는 이유를 붙이면 언제든 유사행위가 반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다음 대선 과정에서 똑같은 수위의 댓글이 달려도 선거 개입이 아니라는 선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번 판결의 숨은 수혜자로 꼽힌다. 원 전 원장이 본인의 직무 범의로 제한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권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배후로 주장했지만 재판부가 대선개입 의혹을 부정하면서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됐다.

날개 단 여당
벼랑 끝 야당

여당은 반색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정권 차원의 리스크를 덜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세월호 특별법'을 제외하고 여당에 불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형 이슈가 전무하다. 이제 여당은 여론 굳히기에 들어간 모양이다.

지난 12일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은 "판결을 비난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며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고 집요하게 주장해왔던 사람들, 또 이걸 갖고 입지를 키워온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고 힐난했다.

야당은 벼랑 끝에 몰렸다. 무려 600일 넘게 공들인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 규명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정국을 타개할 마땅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지지세를 결집할 동력도 정부를 압박할 최후의 보루도 모두 잃었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판결 다음날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렇게 한다면 앞으로 공무원들이 특정 후보를 당선·낙선시키기 위해 비난글을 여기저기 퍼 나르고 악의적으로 유포해도 어떻게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겠냐"고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산 권력'은 어느 누구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죽은 권력'인 원 전 원장만 지루한 법정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 별건의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2월을 선고받은 원 전 원장은 지난 9일 형기만료로 출소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법정에 섰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은 이번 판결로 재수감될 처지를 면했다. 따지고 보면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자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됐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세훈 선거법 무죄' 이범균 부장판사는?

이범균(50·사법연수원 21기) 부장판사는 서울 출신으로 1995년 부산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양승태 당시 대법관(현 대법원장)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판결 업무만 맡았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부임한 후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다뤘다. 그가 속한 형사21부는 선거법과 부정부패 사건 전담부로 알려져 있다. 이 부장판사는 올 초 이른바 '공무원 간첩 사건'을 심리했는데 당시 그는 간첩 혐의를 받은 유우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보수 각 진영 입장에선 한 번씩 유리한 판결이 나온 셈이다.

때문에 복수 언론은 법원 내부 관계자를 인용, 이 부장판사가 정치 중립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고를 둘러싸고 법원 내에선 큰 소란이 일었다. 이유인 즉 이 부장판사가 법리를 어기고 정치적인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5기)는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그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름)'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김 부장판사는 "집행유예 선고 후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정독했다"며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정말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또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이것은 궤변이다"고 일갈했다.

더불어 김 부장판사는 "이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파문이 커지자 대법원은 직권으로 김 부장판사의 글을 삭제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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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계승?’ 이재명정부 태양광 로드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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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에너지 정책은 범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환경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재명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이 윤곽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어른거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3일 대통령실은 “국회 기후위기특위에서 활동하는 등 미래 환경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3선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성환 의원을 환경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김 후보자는 22대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위원장 한정애, 민주당) 위원으로 활동하며 탈원전·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노력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대선공약 대통령실은 그가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 위기’라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잘 이해하고 그동안의 입법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문제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실제 김 후보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안’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등을 발의한 바 있다. 이번 김 후보자의 지명으로 이재명정부의 환경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김 후보자는 지난 24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모든 에너지 체계를 바꾸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체계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뜻도 비쳤다. 그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전기료가 오른다’는 우려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균등화발전비용(같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싼 전원은 이미 풍력과 태양광”이라며 “다만 아직 한국에선 여러 기회 비용, 시간 비용, 금융 비용이 쌓여 상대적으로 비쌀 뿐이다. 실제 요금이 오를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접근이 대한민국의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탈원전에 대해서는 “각 나라 특성에 따라 원전을 쓰는 나라가 있는데 한국도 탈원전을 바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주 에너지원으로 재생에너지를 쓰고 원전을 보조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이 (이재명정부의) 탈탄소 정책 기조”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으로 신설 예정인 기후에너지부 장관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기후에너지부는 분리돼있는 기후와 에너지 관련 부처 업무를 통합한 조직이다. 그는 “기후에너지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빠른 시일 내로 큰 방향을 잡겠다”며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조직개편안을 검토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로 전환 필요” “원전은 보조 에너지원으로”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에너지 ‘전환’을 예고하면서 일각에서는 문재인정부의 태양광 사업이 떠오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내세운 바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태양광 사업이 크게 대두돼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문정부는 출범하면서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까지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기 위해 설비를 확충하기로 했다. 태양광, 풍력발전소 등이다. 당시 내용대로면 총 110조원에 이르는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부는 국가 예산과 공기업, 민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정부 임기 내내 전국 단위로 태양광 사업을 위한 지원금이 뿌려졌다. 당시 문정부는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탈원전 로드맵을 동시에 진행했다. 일부 원전이 영구적으로 정지됐고 짓고 있던 원전 공사가 중단됐다. 단계적 원전 감축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나온 잡음이다. 특히 태양광 사업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문정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국가 주력 사업이었던 만큼 정권이 바뀐 이후 새 정부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 실제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천문학적 예산 투입 윤석열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윤정부 국무조정실은 일부 표본만 조사했는데도 불구하고 2000억원이 넘는 돈이 불법으로 사용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예방추진단은 전국 12개 지자체와 한국전력, 한국에너지공단을 대상으로 ‘전력산업 기반기금 사업’ 운영 실태에 대한 합동 점검을 벌인 결과 총 2267건(2616억원)의 위법·부당 사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금은 산업자원통상부(이하 산업부)가 전기 요금의 3.7%를 징수해 조성한 돈으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지원과 보급에 주로 사용됐다. 5년간 투입된 금액은 12조원에 이른다. 1차 조사에 따르면 신재생에너지 지원 사업에서 부적절한 대출과 보조금 부당 집행, 회계 부실 등이 적발됐다. 태양광 사업의 경우 점검 대상의 17%인 1129건에서 1847억원의 위법 대출 등이 확인됐다. 2차 점검에서는 적발 금액이 2배로 늘었다. 국무조정실은 2019~2021년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에 쓰인 금융지원사업(1조1325억원) 내역과 2017~2021년 보조금 지원 규모가 컸던 25개 지자체의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사업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금융지원 사업에서 4898억원,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 보조금 사업에서 574억원, 전력 분야 연구개발 지원사업에서 266억원, 기타 전력기금 사업에서 86억원의 부정 집행 사례가 나타났다. 당시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 지원금 대부분은 태양광 사업에 쓰였다”며 “가장 규모가 컸던 부정 금융지원 사업 사례 중 99%는 태양광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태양광 업자들은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불법 대출을 받았고 가짜 세금계산서로 공사비를 부풀려 지원금을 타냈다. 감사원 조사로 검찰 수사까지 대출을 받은 뒤 세금계산서를 취소, 축소하는 등 탈루가 의심되는 정황도 드러났다. 가짜로 버섯 재배 시설이나 곤충 사육 시설, 축사 등 농림축산업 시설을 만들어 놓고 신재생 시설을 짓겠다고 대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농지에 신재생 시설을 지을 때는 용도변경 등 인허가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생산한 전력을 팔 때 받을 수 있는 보조금 한도도 커진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한 마을회는 마을 창고를 짓겠다며 전력기금에서 돈을 받아 부지를 사들였지만 실제 창고는 짓지 않았고 부지는 마을회장이 6촌에게 되팔았다.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도 드러났다. 한 군은 타낸 보조금을 다 쓰지 못하고 약 24억원이 남자 이를 다른 계좌로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한 시는 보조금을 빼돌려 관용차를 사기도 했다. 감사원 조사도 이뤄졌다. 감사원은 2023년 11월 ‘신재생에너지 사업 추진 실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목표와 이행, 인프라 구축, 관리 등 3개 분야로 나눠 추진 과정과 집행 전반을 들여다봤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는 2017년 신재생 발전 목표를 상향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검토했지만 막상 후속 조치 이행에는 소홀했다. 감사원은 “톱다운(하향식) 방식으로 내려온 목표에 따라 무리한 계획이라도 수립해야 했다는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데도 면밀한 검토 없이 강행되고 짧은 기간 내 일관성 없이 변경됨으로써 정책 혼선과 신뢰성 저하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정부서 전반적 점검 8000억 넘는 예산 줄줄 샜다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만큼 정부 부처가 이를 맞추기 위해 과도하게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문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야기될 수 있는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을 감췄다는 지적도 나왔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산업부는 문정부의 국정 과제대로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릴 경우 2030년까지 전기요금을 40% 가까이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 청와대의 압박에 12년 동안 10.9%만 오를 것이라고 국민 부담을 축소했다. 태양광 사업의 여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 태양광 발전사업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1월 군산시청에 대한 추가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군산시 태양광 발전사업 수주 과정에서 뒷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됐고 이를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당시 군산시장은 군산시가 1000억원 규모의 태양광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고교 동문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 특혜를 준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업체가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사가 제시한 연대보증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계약 체결을 지시했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앞서 검찰은 새만금 태양광 사업을 주도한 회사 대표를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태양광 발전사업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에게 로비를 해주겠다며 뒷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의 진술로 비리 의혹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핵심 수사 대상에 올랐던 건설사 대표가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도 일어났다. 관련 시장은 반응 오는 중 이 대통령이 기후,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김 후보자가 재생에너지를 언급하면서 관련 시장이 다시 들썩이는 모양새다. 실제 태양광 관련 주가가 오르는 등 주식시장에는 벌써부터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윤정부는 문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통째로 부정하다시피 했다. 반대로 문정부의 정책을 다시 끄집어낸 이정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