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사설탐정 24시' 비하인드 스토리

"500만원만 주면 뭐든지 합니다"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담배 파이프를 문 날렵한 사내가 살인자를 뒤쫓는다. 유달리 명석한 이 탐정은 채집한 증거들을 모아 탁월한 추리로 범죄자의 숨통을 조인다. 영국을 대표하는 명탐정 셜록홈즈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한 사립탐정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설탐정 제도가 활성화된 영·미권 국가와 달리 한국은 탐정을 공인하지 않고 있다. 주변엔 셜록홈즈 운운하며 사고만 치는 흥신소 직원이 더 많이 보인다. 이제 갓 양성화 단계에 있는 사립탐정, 그 어두운 이면을 조명했다.

차가운 바람이 여민 코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넥타이를 맨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서류가방을 들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울 모처에 있는 한 대형빌딩, A씨는 이곳 지하 1층에서 의뢰인과 만나기로 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릴 터였다.

셜록홈즈 상상
"소설일 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건물 로비를 메웠다. 로비를 가로지른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하이힐 소리는 잦아들었다. 탑승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출근 시간은 거의 끝난 듯했다.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A씨는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그의 눈앞에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의뢰인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서로를 탐색했다. 용무를 나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뢰인의 입에서 "무역회사에 있는 유승준(가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봐 달라"는 말이 나왔다. 의뢰인은 유승준이 낮 시간에 누구와 만나는지도 알아봐 달라 했다.

A씨는 의뢰인으로부터 유승준이 다니는 무역회사의 이름을 들었다. 작업에 착수한 A씨는 법인 등기부등본을 열람하여 유승준이 다니는 회사와 주소지, 운행하는 차량을 확인했다. 이후 A씨는 자신의 조력자들과 함께 유승준의 차량이 주차돼 있는 서울 한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조력자는 사람들이 오는지를 살폈고 또 다른 조력자는 GPS 위치추적장치를 차량에 부착했다.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A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승준의 차량을 미행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연이어 눌렀다. 촬영된 사진은 의뢰인에게 전송됐다. 사진 한 장 가격은 100만원을 상회했다. 의뢰인은 계속 유승준을 감시해달라고 했다. A씨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다.


위치추적 기본
대부분 불륜

사무실로 돌아온 A씨는 또 다른 의뢰인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익명의 의뢰인은 "김동규(가명)가 외근을 핑계로 서울 외곽에 있는 오피스텔을 찾고 있다"며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A씨는 낮은 수임료 등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의뢰인의 요청을 묵살했다. 당분간 A씨는 유승준을 미행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현행법상 특정인의 소재나 연락처를 알아내거나 금융거래 등 상거래관계 외에 사생활을 조사하는 일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A씨는 그간 민간조사업자로 소개됐다. '셜록홈즈'란 이름도 사용됐다. 그렇지만 실상은 탐정을 빙자한 심부름센터 직원이었다.

수탁 받은 사건도 그렇고 근사한 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A씨가 받은 의뢰는 며칠 전 아내가 집을 나갔으니 찾아달라는 의뢰, 아내에게 애인이 생긴 것 같으니 뒤를 밟아달라는 의뢰, 특정 주소지에 내연녀가 아직 살고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의뢰, 자신의 동거남이 실제로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 등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A씨는 같은 기간 한 여성 의뢰인으로부터 "남편이 강원도에 있는 한 리조트로 세미나를 갔다고 하는데 정말로 세미나를 간 게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A씨가 한 일이라고는 리조트로 차를 끌고 가서 세미나가 열렸는지를 보고 오는 게 끝이었다. 산업 스파이를 추적하고 지명 수배자를 뒤쫓는 일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암약한 한 사립탐정은 '불륜 원스톱 서비스'로 유명했다. 그는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증거를 잡아달라는 청탁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며 수익을 올렸다.

업무 특성상 미행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는데 배우자의 차종을 물어본 뒤 대형차는 500만원, 중형차는 300만원 하는 식으로 가격을 붙였다고 했다.


사립탐정 공인 초읽기…이르면 내년 통과
"아직 멀었다?" 흥신소 직원들이 물 흐려

또 불륜 포착 과정에는 위치추적기를 필두로 키홀더형 카메라, 볼펜형 녹음기 등이 동원됐다. 당사자 몰래 채증을 했음은 물론이다.

한 유명 연예인은 흥신소(심부름센터) 직원을 붙여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했다. 해당 흥신소는 아내의 과거 행적과 관련한 뒷조사도 병행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한 중견기업 오너는 아내로부터 집안내력 등과 관련한 뒷조사를 당했다고 한다. 대학교 학적부를 들추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지는 식이다.

제법 이름 있는 흥신소의 경우는 자신들의 정보원을 가동해 특정인물의 개인정보 조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기자가 공식적으로 접촉한 한 흥신소 직원은 부산으로 출장 중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로부터 의뢰를 받았으며 어떤 사건을 수임했는지 밝히기를 꺼려했다.

만나기 어려우면 전화라도 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 직원은 "전화는 아니다"라며 "예의는 갖다 버렸냐"고 훈계했다. 앞뒤 안 가리고 여기저기 다 물어보는 것이 특기인 이 조사관은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전국 곳곳을 헤집고 있다.

또 다른 흥신소 직원은 대전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소위 말해 경찰과 끈이 닿는 능력자다.

자칭 조폭 출신 자산가 등과도 친하다. 잠시 흥신소 업계를 떠났던 그는 얼마 전 현업에 복귀했다. 그와 의뢰인으로 만나 호형호제하게 된 한 사업가는 "해결사라기보다는 브로커에 가까웠다"며 "경찰을 소개시켜주고 이득을 챙겼는데 나중에 내가 직접 경찰을 뚫으니 만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업가처럼 누구나 경찰과 끈이 닿을 수는 없는 일. 때로는 "공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범죄자가 '사립탐정'을 찾기도 한다.

해결사 자처
"도장 찍으시오"

탐정 B씨는 지방에 있는 한 교도소를 찾았다. 강간치상죄로 수감 중인 고영진(가명)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영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한 직원과 만난 뒤 사건을 수임하기로 하고 면회 절차를 밟았다.


면회실 유리벽 틈으로 고영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 관계자와 미리 입을 맞춘 B씨는 "재판에 필요한 단서를 찾고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어 B씨는 "(당신의 무죄를 입증할) 유리한 증인을 찾아 녹음해 증거로 제출하겠다"며 "경비는 나중에 받을 테니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어 달라"고 했다.

B씨의 행동은 변호사가 아니면서도 송사에 관여해 법률사무를 취급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동행한 직원으로부터 계약비 명목으로 30만원을 받았다. 이어 그는 녹취록 작성비, 교통비, 식비 등의 실비 명목으로 모두 1300만원을 받았다.

앞서 B씨는 "내가 몇몇 사건의 목격자나 증인을 찾아 판결을 뒤집었다"며 "검사의 잘못을 밝히는 능력이 있으니 조사과정의 잘못을 짚어 (의뢰인의) 무죄를 받아주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믿은 고영진은 500만원씩 두 차례에 나눠 B씨가 지목한 녹취전문 흥신소로 현금을 송금했다. 그러나 1000만원을 입금 받은 흥신소는 B씨의 가족이 운영하는 흥신소였다.

연예인에 회장님·사모님도 '기웃기웃'
"뒷조사 해달라" 심부름센터에 사건 의뢰

더구나 B씨의 일처리는 미덥지 못했는데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의 대화를 무차별 녹음하는가 하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녹취록을 작성하는 등 의뢰인의 기대를 저버렸다. 결과적으로 B씨는 의뢰인에 의해 본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굴욕을 맛봤다.

그나마 B씨는 셜록홈즈처럼 사건을 조사하는 흉내라도 냈지만 남의 사생활을 캐던 A씨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승준을 쫓던 A씨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A씨는 유승준 미행을 위해 운전업무 종사자를 한 명을 섭외했다. 그는 A씨의 지시를 받아 유승준의 차량이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과 연결된 지하주차장으로 유승준의 차량이 들어갔고, A씨의 차량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백미러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유승준이었다. 유승준은 주차를 중단하고 A씨의 차량에 따라 붙었다. 당시 유승준은 뒤편의 차가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물어보려 했다. 미행이 발각된 것이다.

긴급 상황에 운전자는 당황했다. 유승준은 차문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전자는 가속 페달을 밟아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A씨의 차량이 급발진하자 유승준은 이를 피하다가 주차장 벽기둥에 부딪혔다. 이 사고로 유승준은 허리 부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주차장을 빠져 나가던 A씨의 차량은 당시 정차 중이던 또 다른 차량을 들이박았다. 해당 차량의 운전자도 부상을 당했다. 이 장면은 주차장 CCTV 및 피해자 차량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녹화됐다. 그러나 운전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했다. A씨 일당은 모조리 경찰에 붙잡혔다.

범죄자도 의뢰
유명인도 의뢰

조사 결과 A씨에게 미행을 사주한 의뢰인은 한 법인기업의 회장이었다. 그는 기업 대표이사로 있는 자신의 아들과 유승준의 딸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승준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회장님은 셜록홈즈를 고용해야 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본인 역시 '범털' 신세를 면치 못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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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조4000억’ 세운5구역 재개발 이사 없는 이사회 미스터리

[단독] ‘1조4000억’ 세운5구역 재개발 이사 없는 이사회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조4000억원 규모 초대형 사업에 ‘변수’가 등장했다. 사업 진행 과정에서 불거진 절차적 정당성에 시비가 붙었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됐던 문제는 이제 결론만 남은 상태다. ‘모로 가도 수익만 내면 된다’는 재개발·재건축 시장에 브레이크가 걸릴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5-1구역, 5-3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이하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재 확인된 소송만 ▲손해배상 청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이사회 결의 부존재 또는 무효 확인 등 3건에 이른다. 겉으로는 순탄하게 진행 중인 듯한 사업의 이면에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일요시사> 1539호 ‘<단독> 1조4000억원 세운5구역 재개발 복마전’(https://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250331) 기사 참조). 꼬리에 꼬리 사법 리스크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은 서울 중구 산림동 190-3번지 일원 7672㎡ 부지에 지상 37층 규모의 업무복합시설을 짓는 프로젝트다. ㈜이지스자산운용이 주주로 참여 중인 세운5구역 피에프브이(PFV)가 시행을, GS건설이 시공을 맡고 있다. 태영건설이 시공권과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워크아웃에 돌입한 이후 GS건설이 인수했다. 대신자산운용이 업무시설에 대한 선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선매입 가격은 3.3㎡당 3500만원가량으로 계약금으로만 700억원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스자산운용에 따르면, 현재 사업은 철거 단계로 예정대로 2030년에 개발이 끝나면 연면적 13만㎡가 넘는 최상급 오피스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몇 년째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는 ‘사법 리스크’다. 검찰, 경찰에 고발된 몇몇 사건은 종결됐지만 일부는 법정 공방으로 번졌다. 눈여겨볼 대목은 송사에 휘말린 이들이 현재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아무런 지분이 없는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사업 초창기 기틀을 닦은 이른바 ‘개국공신’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지금은 연결고리가 없는 상태다. 그런데도 이들의 송사에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이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유는 시행을 맡은 이지스자산운용이 연루돼있기 때문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자금 조달 역할로 합류했다. 부동산 매매, 분양 등을 하는 업체 대표 염모씨와 부동산 개발 관리 등을 하는 업체 공동대표 오모씨, 권모씨 등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토지 매입 자금이 부족해지자 이지스자산운용을 끌어들였다.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만남에서 “(사업에 합류할 무렵 인허가 문제 등이) 어느 정도 진행돼있었고 저희가 투자하기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투자해 진행하면 안정권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염씨가 대표로 있는 연합와이앤제이(이하 연합)와 이지스자산운용은 2019년 1월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다. 지분은 50대 50으로 맞췄다. 여기에 연합은 오씨, 권씨, 최씨, 박 전 이사 등과 따로 공동사업 약정을 맺었다. 지분 구조는 연합 50%, 오씨 30%, 권씨 10%, 최씨 7%, 박 전 이사 3% 등으로 구성됐다. 2030년 13만㎡ 업무복합시설 법정 공방 최소 3건 진행 중 2019년 6월 연합, 이지스자산운용, 국민은행(이지스펀드의 신탁사), 생보부동산신탁(현 교보자산신탁) 등은 주주협약서를 작성하고 ㈜세운5구역 PFV를 설립했다.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을 위한 시행사가 정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 지분 구조는 연합 47.1%, 이지스자산운용(17.2%)+이지스펀드(29.9%) 47.1%, 생보부동산신탁 5.8% 등이다. 대표이사는 염씨가 맡기로 했고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은 각 2명씩 이사를 추천해 총 4명으로 이사회가 구성됐다. 연합 측에서는 염 대표와 박 전 이사가 이사로 참여했다. 이 구성은 박 전 이사가 2020년 8월14일 이사직을 사임할 때까지 유지됐다. 이후 염 대표가 이지스자산운용에 지분을 넘기고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은 염 대표가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서 손을 떼는 과정에서 오간 돈, 이지스자산운용이 오씨와 권씨, 최씨 등에게 준 돈을 두고 불거졌다. 염 대표가 받은 378억원, 오씨 등 3명 등이 받은 94억원 등 약 480억원을 둘러싸고 소유권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세운5구역 PFV, 이지스자산운용은 돈을 지급한 주체라 송사에 연루돼있다. 이 소송은 당시 사업의 지분 구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시작됐기에 어떤 결론이 나오든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최근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소송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동안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이사회 관련 소송이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는 것. 세운5구역 PFV 4명의 이사 가운데 1명이었던 박 전 이사는 2023년 9월 ‘이사회 결의 부존재 또는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6월20일부터 2020년 8월14일까지 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사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 기간 세운5구역 PFV가 진행했다고 알려진 이사회는 16번이다. 480억원 두고 초기 멤버 갈등 박 전 이사는 “세운5구역 PFV는 상근 직원이 없고 등기임원의 보수도 없는 특수목적법인으로, 이사회는 업무 집행의 법률적 효력과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어쩌면 회사 그 자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사회가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진행됐으니 그 결의 내용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운5구역 PFV는 명목상 구성된 페이퍼컴퍼니였던 만큼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실질적인 경영 주체(이지스자산운용), 총괄 관계자가 책임져야 한다. 리모컨을 누른 사람(이지스자산운용)이 문제지, 리모컨(세운5구역 PFV)이 잘못이 아닌 것과 같다”며 “14개월 동안 이사로 재직하다가 정기총회도 거치지 않고 중도 사퇴한 건 더 가다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릴 것 같아서였다”고 털어놨다. 박 전 이사는 이사회가 실제로 진행되지 않고 서류 작업을 통해 조작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상법에 따르면 이사회는 대면 혹은 컨퍼런스 콜 등의 방식으로 진행하게 돼있다. 어디에도 서면으로 진행해도 된다는 문구는 없다. 대표이사였던 염씨가 이사회를 소집 통지하는 과정에서 보낸 공문에도 정확하게 기재돼있다”고 주장했다. 상법 제391조(이사회의 결의방법)에 따르면 이사회 결의는 이사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이사의 과반수로 해야 한다. 다만 정관으로 그 비율을 높게 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정관에서 달리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사회는 이사의 전부 또는 일부가 직접 회의에 출석하지 않고 모든 이사가 음성을 동시에 송·수신하는 원격통신 수단에 의해 결의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 <일요시사>가 입수한 ‘세운5구역 피에프브이 주식회사 이사회 소집통지’ 공문에 따르면 2020년 3월27일 오전 11시 이지스자산운용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진행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방법’ 부분에 ‘직접 참석 or 컨퍼런스 콜’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방어 근거 무너지나 박 전 이사는 해당 이사회에 참석한 적 없지만, 자신의 막도장을 이용해 의결이 이뤄진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이사회 당일 다른 곳에 있던 적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박 전 이사는 “2019년 3차 이사회 이사록을 보면 그해 10월31일 재적 이사 전원 출석으로 이사회가 개최된 것으로 기재돼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지인들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서 스크린 골프를 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1시간가량 차이 나는 곳에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사회 결의는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박 전 이사는 이 내용을 가지고 서울영등포경찰서에 염 대표 등을 ‘배임’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박 전 이사가 재직 당시 이사회 소집이나 의사록 작성 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실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불송치 처분했다. 박 전 이사는 “사후에 통보식으로 이사회 의결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이사회 자체의 절차적 하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검찰은 물론 염 대표, 이지스자산운용 모두 물리적 행위 자체가 없었던, 그래서 의결 자체가 무효인 이사회를 무기로 각종 고소·고발건을 방어해 왔다”며 “이사회에서 특별 결의사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본인들이 체결한 공동사업약정서 등에 기재돼있는데도 그조차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이사는 세운5구역 PFV가 토지를 매입하는 내용을 안건으로 다룬 이사회가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합과 이지스자산운용이 맺은 공동사업약정서에 따르면 ‘승인된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본적 지출’은 이사회 특별 결의사항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특별 결의사항은 재적 이사 전원의 동의로 의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법원 절차적 하자 인정하면 사업 자체 흔들릴 가능성도 연합 등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땅값 부풀리기’ 의혹이 제기됐다. 염 대표와 오씨 등이 재개발 구역의 땅을 사는 과정에서 특수관계인을 이용해 비싼 값에 매입했다는 의혹이다. 시행사가 직접 원주민에게 토지를 사는 방식이 아니라 그사이에 특수관계인을 끼워 넣어 차익을 봤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불기소의 근거 중 하나로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언급한 바 있다.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도 <일요시사>와의 만남에서 “땅값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재개발사업에서는 토지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협의에 따라 하는 것이지, 정확한 시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너무 비싸게 샀다면 의사결정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의사회 결의는 무조건 다 있었고 더 큰 의사결정은 주주총회를 통해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 전 이사의 주장대로 이사회의 절차적 하자가 인정돼 그 존재 자체가 무효가 된다면 결의 내용 역시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사회 관련 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한 당시 세운5구역 PFV 이사의 발언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4명의 이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가 같은 이사였던 박 전 이사를 ‘전혀 모른다’는 취지로 증언한 것이다. 대면 혹은 컨퍼런스 콜 등 온·오프라인 이사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박 전 이사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박 전 이사는 “내가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런데 서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만나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한 적 없다. 세운5구역 PFV 측은 그제야 대면 결의는 없었다고 인정하면서 서면 결의도 인정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조합에 서면으로 이사회 결의를 한다고 말하면 조합장이 당장 쫓겨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지스자산운영 측은 “해당 건은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으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답변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리며 향후 법적 과정에서 투명하게 밝혀질 수 있도록 성실히 소명할 계획”이라고 입장을 전해왔다. 1심 판결 곧 나온다 일각에서는 세운5구역 재개발사업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에 위반될 소지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경험이 풍부한 한 관계자는 “SPC가 설립되고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사회 문제가 불거진 만큼 소송 결과에 따라 주무 관청의 인허가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