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히면 미치는' 오타쿠의 세계 대해부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9 10: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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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적인 집착 변태? 폭발적 집중 천재?

[일요시사=사회팀] ‘오타쿠’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오타쿠는 일본에서 제 3자의 집을 높여 부르는 말 ‘귀댁’에서 유래됐다. 가타카나로 쓰면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푹 빠져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이 오타쿠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부분 부정적이지만 일본의 젊은 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타쿠 시장은 점점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나타난 서브컬처(하위문화)의 팬들을 총칭한다. 서브컬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오타쿠 문화는 주류 문화와 대비되는 비주류 문화다. 이들은 독특한 행동방식을 갖고 있다. 오타쿠 문화 초기에는 애니메이션·SF 팬에 한정해 불렀지만 지금은 명확한 정의가 없이 보다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선 ‘오덕후’ ‘십덕’ ‘덕후’ 등의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영미권에는 ‘Geek’이 대표적이다. 주로 애니메이션광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다가, 최근에는 ‘게을러 보이는 외모’를 빗댄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

‘팬’ ‘마니아’ 단계를 넘어서 자기의 관심분야에 미친 듯이 열광하는 사람들을 흔히 ‘오타쿠’라 부른다. 이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관심대상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깊게 파고든다. 수집가적 기질과 함께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극도의 경지까지 이르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전문가적 시각을 초월한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약간 외골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주관적인 가치관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

일본 젊은이들의 문화는 마니아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의 취미와 관심사에만 몰입하고 심취하는 이들이 많다. 한 분야에 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마니아의 종류는 다양하다. 파친코 마니아, 컴퓨터 마니아, 게임 마니아, 애완동물 마니아, 소형차 마니아, 전쟁 마니아(실제로 전쟁에서 사용한 물품 등을 수집하는 마니아), 히트상품 마니아, 아세아대 마니아족(자신의 관심분야에서 개발한 발명품으로 대학 진학), 스쿠프족(관심거리의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찍으러 다니는 마니아), 점술 마니아, 나비 컬렉션족, 발굴사진 마니아, 자동차 마니아, 골프 마니아, 더스트 헌터(쓰레기더미를 뒤져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마니아), 완전자살 마니아(관심사가 자살에 있고 자살만을 생각하고 심취해 완전자살 마니아가 돼 전문 책자와 비디오까지 만들어냄) 등이 있다. 그런데 오타쿠 중 완전자살 마니아는 극소수다. 오타쿠 자살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오타쿠는 자살 따위 하지 않아” “다음주에 나오는 애니 봐야 되거든” “분기별 신작을 놓칠 수 없어” 오타쿠들에게 자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작 애니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타쿠들은 애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팬·마니아 넘어 관심분야에 미친 듯 열광
타인들 시선 개의치 않는 외골수적 성향


오타쿠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지식 책자를 써내기도 한다. 또 나아가 직업으로도 삼는 마니아들도 있다.

처음 오타쿠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할 때는 2인칭 표현이었다. 그 시작에는 동호인들이 취미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상대를 오타쿠라고 부르면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사람에 대한 분류로 오타쿠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1983년 일본의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가 만화 월간지 <망가 브릿코>에 칼럼 ‘오타쿠의 연구’를 연재하면서부터다. 나카모리 아키오는 이 칼럼에서 오타쿠를 비칭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때로는 특정 관심사에 대해 극도로 깊이 빠져들어 직업으로 삼는 프로는 아니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소유한 아마추어나, 혹은 너무 한 가지 분야에 빠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오타쿠라는 말을 하면 ‘일본 애니메이션 광’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만화에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나 좋아하는 변종’이나 심지어 ‘생김새가 안여돼(안경 쓴 여드름 돼지)’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오타쿠에 대한 의미가 모호한 이유는 일단 기준과 의미가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생긴 신조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점점 여러 의미가 덧붙여지고 이로 인해 뜻이 변해버렸다.

그 범위로는 오타쿠란 모두 ‘한 분야에 심취한 사람’을 뜻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마니아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오타쿠와 마니아의 차이점은 분야와 강도의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여행, 카메라, 패션 등 현실적인 것을 제외하고 크리에이터가 창조한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 특히 서브컬처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한정해 구분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는 점에서 보면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조금 다르다. 히키코모리는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에 비해 오타쿠는 자신과 같은 취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는 어울리거나 일종의 친목을 형성한다는 점이 히키코모리와의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타쿠가 갖고 있는 의미는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라는 의미까지 함축된다.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오타쿠에 대한 인식은 분명 일본에 비해 좋지 않다. 일본에서는 불경기 시기 오타쿠의 활약이 있으면서 이미지의 전환이 이뤄진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계기가 없었고 히키코모리와 동일한 존재나 오타쿠가 소비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여서 타문화에 대한 추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거부감도 있다.

한때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해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페이트’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공개했던 A씨는 당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베개를 껴안으며 비상식적인 모습을 연출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오타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방송이었다.
이후 A씨는 한 커뮤니티를 통해 한 여성과 데이트 하는 모습의 사진을 올리며 수많은 오타쿠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지?” 등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친 필요없다
신작 애니 사수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은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의 과업을 달성했다.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일본의 대중문화도 괄목 성장했다. TV보급 전 세대별 맞춤 만화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고질라’ ‘울트라맨’ 등의 작품들이 쏟아지며 각종 만화 관련 프라모델(피규어)이 붐을 이뤘다. 오타쿠 예비군 양성의 시작이었다.

당시 오타쿠는 존재 자체의 명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유별난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수동적인 형태 속에서 스스로가 콘텐츠를 발굴한 것이다.

80년대 말 세상 밖으로
2000년대 들어 양성화

이후 오타쿠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계기가 있다. 89년 6월, 사이타마와 도쿄 등지에서 발생한 연속 유아 납치살인사건이 발생해 여아가 납치·살해된 것. 당시 유아연쇄살해사건의 피의자 미야자키 쯔토무의 방에서 6000개 이상의 비디오테이프와 많은 잡지들이 나왔다. 매체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두고 ‘오타쿠에 의한 범죄’ ‘오타쿠식 범죄’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오타쿠는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되며 오타쿠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화살의 방향이 틀어졌다.

이처럼 오타쿠는 시작부터 차별적으로 비추어졌다. 자신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오타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조금씩 달라졌다. 만화 및 게임과 같은 분야에서 오타쿠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어나며 각 분야의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일본 내 재평가가 이뤄지게 됐다. 그리고 세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오타쿠는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의 오타쿠는 넘쳐나는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좀 더 유용하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불황 속 블루오션
주목받는 키덜트

최근에는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하는 ‘키덜트’(kid와 adult의 합성어)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한마디로 ‘어른아이’, 장난감 사는 어른을 뜻한다. 다 큰 성인이 무슨 장난감이냐 비아냥댈 수도 있지만 건담이나 피규어 등 성인용 장난감을 전혀 거리낌없이 구입하는 사람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키덜트 산업은 매해 급성장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키덜트 관련 제품 시장 규모는 현재 5000억원에 이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20∼40대 키덜트들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키덜트 장난감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들의 구매력에 힘입어 키덜트 시장은 불황 속 블루오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키덜트 문화의 시장성을 눈여겨본 갤러리아백화점은 서울 강남의 압구정 명품관에 키덜트 장난감 매장 두 곳을 입점시켰다. 키덜트 장난감 매장은 잘 빼입은 남성들로 북적인다.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오리지널 키덜트 장난감인 건담과 피규어 마니아에 이어 최근에는 무선조종용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비주류 문화로 취급받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제는 당당하게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장난감…
‘그들의 문화’블루오션 부상

16년차 피규어 마니아인 김성재(26)씨. 그는 현재 취업준비에 한창인 경영학도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자기관리에 철저한 멋진 대학생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평범한 외모와 달리 그의 방은 온갖 피규어로 가득했다.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등 피규어만 모아둔 진열장이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심취한 그는 일본 관련 콘텐츠에 해박했다. 심지어 일본어로 회화도 가능하다. 그리고 방에 있는 피규어 대부분은 일본에서 직접 사온 것들이었다. 김씨는 “누가 보면 오타쿠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피규어를 모으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며 “하나하나 모을 때마다 뿌듯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피규어에 대한 애정을 노래에 담은 이도 있다. 스토리텔링 음악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랩퍼 팻두는 음악만큼이나 피규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마니아로 알려졌다. 곰인형 모양의 일본산 아트토이 베어브(BearBrick)이 그의 주요 수집품이다. “피규어 수집 취미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밝힌 팻두는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베어브릭에 관한 음반을 발표한 바 있다.

2011년 베어브릭을 소재로 7곡의 노래가 담긴 ‘베어브릭 인 러브’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베어브릭을 좋아하는 이들과 사연을 나누고 싶어 자비를 들여 음반 3000장을 찍은 뒤 이 가운데 2500장을 한 아트토이 판매점을 통해 베어브릭 애호가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용인송담대에는 토이캐릭터창작과가 생길 만큼 피규어 시장이 산업적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오타쿠 원한다

오늘날 오타쿠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로 부상했다. 오타쿠 관련 시장은 매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오타쿠에 대한 편견이 점점 희석되면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제 오타쿠 문화는 현대사회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저력 있는 비주류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오타쿠 천국’일본에선…
섹스보다 만화 “출산률 저하”

지난달 24일 영국 BBC 방송은 2060년 일본 인구가 현재보다 3분의 1이나 감소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출생률이 이처럼 감소하는 원인 중 하나는 아기를 낳기 위한 성관계보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에 더 열광하는 ‘오타쿠의 급증’이다. 오타쿠는 취업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인간관계, 특히 여성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16∼19세의 일본 남성 가운데 36%가 오타쿠였다. 이는 불과 2년 새에 두 배로 늘어난 수치인데 문제는 이러한 증가세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16∼19세 남 36% 오타쿠
불과 2년새 2배로 늘어

누리칸(38)과 유게(39)라는 오타쿠는 실제 여성이 아니라 게임 속의 여주인공인 린코와 네네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누리칸과 유게는 모두 30대 후반이지만 게임을 할 때는 자신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이라고 생각한다. 누리칸은 “게임 속에서는 언제나 고등학생이 될 수 있고 어린 애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게 역시 “게임 속에서는 내가 원하기만 하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남성들 가운데 이처럼 오타쿠가 점점 늘어나는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일본의 젊은 남성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 원인일 수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만큼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부양해야 할 자식을 낳아야 할 결혼과 같은 인간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

남녀가 만나 교제를 하더라도 섹스를 하거나 결혼하는 비율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최근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제하는 일본 커플 가운데 1주일에 한번이라도 성관계를 갖는 커플은 27%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가운데 혼외 출생아의 비율은 2%에 불과하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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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불확실성의 시대에 가장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관계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새 정부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한 적신호가 이제 눈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균열이 시작된 걸까? 우리나라 외교는 한미동맹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꾀한 때도 있지만 대체로 한·미 혹은 한·미·일 관계가 우선시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와 미국이 삐걱거리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고 있다. 상수였는데 변수됐나 지난 12일 미국 이민 당국에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귀국했다.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은 총 317명으로 남성 307명, 여성 10명이다. 이 가운데 1명은 잔류를 택했다. 지난 4일, 미국 이민 당국의 불법체류 및 고용 전격 단속에서 체포돼 포크스턴 구금시설 등에 억류된 지 8일 만이다. 이들은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중에 체포·구금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조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을 급히 방문했다. 당초 이들은 지난 10일(현지시각)에 전세기를 타고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미국 측 사정’으로 지연됐다. 외교부는 이번에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향후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미국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현 외교부 장관은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에게 이들이 신체적 속박 없이 신속히 귀국하고 향후 미국에 재입국하는 데 불이익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미국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고 한다.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미국을 떠나는 방식을 두고 우리나라와 미국 간의 이견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진 출국’을, 미국은 ‘추방’을 언급한 것이다. 자진 출국 방식으로 귀국하면 향후 ‘5년 입국 제한’ 등의 불이익이 없다. 반면 추방 명령으로 미국을 떠나면 영구적으로 기록이 남아 최대 10년간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8일 크리스티 놈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이 이번 사안과 관련해 “법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출국 형태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다행히 미국 측과 조율이 이뤄지면서 자진 출국 형태로 귀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루비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과 도출한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이 사안에 대한 한국인의 민감성을 이해하고 있다. 특히 미국 경제·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국의 투자와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야 “700조원 줬는데도?”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측이 원하는 바대로 가능한 한 이뤄질 수 있도록 신속히 협의하고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상황이 봉합되는 모양새지만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의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인 체포·구금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이민 당국의 모습을 두고 동맹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미국 측은 한국인 체포 과정에서 수갑을 채웠고, 이들을 환경이 열악한 수용소에 구금했다. 야권에서 ‘외교 참사’가 일어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6일,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이후 내놓은 논평에서 “이재명정부는 700조원 선물 보따리를 미국에 안겼지만 회담은 공동성명조차 발표하지 못한 채 끝났다”며 “그 결과가 고스란히 현대차-LG 합작 공장 단속 사태로 돌아왔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국민 사이에서는 실컷 투자해 주고 뒤통수 맞은 것 아니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700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약속해 놓고도 국민의 안전도, 기업 경쟁력 확보도 실패한 것이 이재명정부의 실용 외교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관세 협상,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미국에 5000억달러(약 700조원)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도 지난 6일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수갑 채우고 수용소 넣고 장 대표는 “이번 사태는 단순한 불법체류자 단속을 넘어 앞으로 미국 내 한국 기업 현장과 교민 사회 전반으로 피해가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수많은 한국 기업이 미국 전역에서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국가적 차원의 리스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국 측과 방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조 장관은 루비오 장관 등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책과 대미 투자 한국 기업 관계자들의 비자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 장관은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새로운 비자 카테고리를 만드는 등 다양한 방안 논의를 위한 ‘한미 외교부-국무부 워킹그룹’ 신설을 제의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한미 관계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미 관계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관세 등을 무기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동맹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삐걱거림’은 이정부 출범 초기부터 감지됐다. 미국 백악관은 이재명 대통령 당선과 관련해 처음 내놓은 메시지에서 중국을 언급해 ‘이례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백악관은 지난 6월3일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한미동맹은 철통같이 유지된다”면서도 “한국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진행했지만 미국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하며 반대한다”고 말했다. 백악관의 메시지를 두고 이정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 견제, 실용 외교를 표방하는 이 대통령이 중국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관세를 두고 이른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다소 소강상태가 되긴 했지만 갈등의 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분위기만 화기애애? 관세 협상이나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도 여전히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 시한으로 정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미국과 타결을 이뤄냈다. 당초 한미FTA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의 관세는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0’이었기에 타격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언급한 상호 관세 25%를 15%로 낮추는 데는 합의했지만 과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루비오 장관의 방한이 취소되는가 하면 ‘한미 2+2 통상 협의’를 앞두고 미국 측의 취소로 구윤철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길을 돌리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이 먼저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기준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이 지속됐다. 결국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에서 정리됐고 동시에 천문학적인 수준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때도 관세 협상 결과를 두고 이견이 나타났다. 우리 정부 측은 쌀, 소고기 등 농산물 개방은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면 개방을 말했다. 또 대미 투자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보였다. 이견은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고도 조율되지 않은 모양새다. 미국 측은 관세 협상 타결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대통령의 방미를 언급했고 실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앞에 두고 면박을 주는 등의 돌발 행동을 보인 바 있어 우려가 제기됐지만 무난하게 마무리됐다는 평을 받았다. 문제는 명문화된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달 25일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했지만 공동합의문은 발표하지 않았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동맹의 성과와 협력 의제를 문서화해 왔다. 당선 메시지에 중국 언급 정상회담 합의문도 없어 당시 공동합의문이 나오지 않은 데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제기될 정도였다. 정상회담에서 각종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지만 구체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결과였다. 특히 자동차 관세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업계는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했다. 관세 협상에서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으로 타결했지만 문서로 명시되지 않은 것이다. 안보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인 지난달 2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동발표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정상 간 논의 내용은 상당 부분 생중계됐고 나머지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양국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했다”고 말했다. 위 안보실장은 “문건을 만들어내기까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가 협의를 하면 마무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온 조 장관의 발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투자 부문에서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어 수용하지 않았다”며 공동합의문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이어 “미일 간 합의문 내용을 보면 왜 우리가 협상을 지연해 가면서까지 안을 만들고 있는지 이해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본은 관세 협상에서 제조업·항공우주·농업·에너지·자동차 등 분야에서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내용의 합의를 진행했다. 또 합의 불이행 시 미국이 관세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굴욕 협상’이라는 말도 나왔다. 조 장관은 “일본의 타결 협상안을 보면 우리가 비슷한 협상안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여러 문제점이 많다”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며 협상을 강하게 하다 보니 합의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품목 관세가 부과될 때 최혜국 대우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불확실성 해소될까?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자리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타국을 대하는 방식은 이제 변수를 넘어 상수가 되는 모양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한미 관계를 더 흔들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