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메이저리거 임창용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23 1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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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불굴의 루키…드디어 ‘꿈의 무대’ 오르다

[일요시사=사회팀] 사이드암 투수 임창용이 메이저리그에 당당히 입성했다. 난관을 헤치고 결국 꿈을 이뤄낸 것이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1995년 해태(KIA 전신)에 입단해 프로 무대에 발을 디딘 지 19년 만에 이룩한 ‘꿈의 무대’ 진입이다.




‘창용불패’ 도전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다부진 포부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던 ‘미스터 제로’ 사이드암 투수 임창용이 빅리그로 승격됐다.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컵스 구단은 지난 5일(한국시간) 임창용을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포함했다고 발표했다. 선수 생활의 고비마다 ‘마이 웨이’를 외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임창용의 패기가 비로소 빛을 발한 것이다.

‘풍운아’ 임창용
빅리거 꿈 이뤘다

시카고 컵스 산하 트리플A 팀인 아이오와 컵스에서 뛰어온 임창용은 9월 확대 엔트리가 시행된 뒤 두 차례 발표된 추가 합류 선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승격이 늦춰지는 듯했지만 지명할당된 투수 마이클 보우든 대신 빅리그에 입성하게 됐다. 이로써 현역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추신수(신시내티), 류현진(LA 다저스)과 함께 3명으로 늘었다. 또 그는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를 시작으로 빅리그 무대에 서게 되는 14번째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과 일본, 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거친 선수로는 이상훈, 구대성, 박찬호에 이어 네 번째이다. 메이저리그를 거쳐 2011년 일본 프로야구 라쿠텐에 입단했지만 부상으로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김병현(넥센)까지 포함하면 5명째다.

컵스는 임창용을 2014년 주요 전력 중 하나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리빌딩에 들어간 컵스는 전반적인 마운드 개편이 시급한 상황이다.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는 가운데 40인 로스터 확장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지난 5일까지 총 9명의 선수를 불러올렸고 이 중 절반이 불펜 요원이다. 지난 5일 불펜 평균자책점이 4.17로 내셔널리그 14위에 처져 있는 컵스의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데일 스웨임 컵스 감독은 2014년 구상을 원점에서 시작할 듯 보인다. 이번 로스터 확장에서 많은 선수를 불러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불펜은 마무리부터 전면 개편이다. 올 시즌 팀 내 혼란을 틈타고 마무리 자리를 꿰찬 케빈 그렉이 불안한 모습을 보였음은 물론 장기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새 판을 짤 가능성이 높다.


스웨임 감독도 “9월에는 페드로 스트롭을 마무리로 시험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내년을 내다본 포석이다. 그러나 스트롭이 마무리로 직행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스웨임 감독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면서 “많은 선수들이 MLB에 올라왔고 오프시즌은 길다. 내년 스프링캠프 때까지 어떤 결정이나 계획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무한경쟁을 예고했다.

결국 임창용도 이제 출발선에 섰다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스프링캠프까지가 진짜 승부처다. 팀에서 기대를 걸고 있지만 임창용 스스로가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전망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임창용은 현재 불펜 요원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단점을 갖고있다. 다만 경험은 가장 풍부하다. 과연 임창용이 자신의 경쟁력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지난 8일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에서 역사적인 메이저리그(MLB) 첫 경기를 치른 임창용은 그 후 2경기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몸 상태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임창용 스스로 “연투가 가능하다”고 자신할 정도로 몸 상태는 어느 정도 올라왔다. 하지만 ‘경기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국내 프로 입단 19년 만에 MLB 입성
선수생활 고비마다 ‘마이웨이’개척

데일 스웨임 시카고 컵스 감독은 일단 임창용의 등판을 ‘지고 있는 상황’에 한정시켜 놓았다. 부담 없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르라는 배려다. 사실 처음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컵스는 올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다. 승리에 대한 압박이 그리 크지 않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MLB 첫 시즌을 맞이하는 임창용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여건이었다. 컵스가 상대적 약체라 이기는 상황보다는 지는 상황이 더 많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창용이 승격한 이후 컵스의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컵스는 임창용의 승격 첫 날이었던 5일 마이애미 말린스전에서 9-7의 역전승을 거뒀다. 임창용이 나올 만한 타이밍이 마땅치 않았다. 7일 밀워키전에서도 8-5로 이겼다. 초반부터 앞서 나가 임창용의 등판은 무산됐다. 9일 밀워키전에서는 1-3으로 졌지만 6회까지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창용은 이날 경기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역전당한 통에 등판 타이밍을 놓쳤다.

신시내티 원정 첫 경기였던 10일 경기에는 선발 트래비스 우드가 7이닝 6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 역투를 펼치며 2-0으로 이겼다. 임창용보다는 기존부터 활용했던 필승조들이 먼저 부름을 받았다. 2-0으로 앞선 8회에는 장기적인 기대주인 페드로 스트롭이 마운드에 올라 1이닝을 책임졌고 9회에는 팀 마무리 케빈 그렉을 올려 임창용에게는 경기 끝까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임창용과 추신수와의 맞대결이 미뤄졌다. 임창용 승격 이후 컵스가 3승2패로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한가닥 위안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인고의 세월 끝에
드디어 밟은 MLB

임창용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지역우선 드래프트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첫해를 대부분 2군에서 보냈다. 당시 해태 2군 감독이였던 김성근 감독의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입단 2년차때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96년 20살 임창용과 34살 김정수가 뭉쳐, 마치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 마리아노 리베라-존 웨틀랜드처럼 불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정규 시즌 1위, 팀의 8번째 우승에 공헌했다.

97년 풀타임 마무리로 데뷔한 임창용은 14승 8패 26세이브를 기록하며 해태의 마지막 우승에 공헌했다. 이해에 임창용은 불펜과 마무리로 135이닝을 소화하였는데, 이는 93년 선동열이 125이닝 소화한 것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창용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98년 시즌 최다인 34세이브를 기록하며 22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구원왕에 오른 바 있다.

99년 삼성에서 보낸 첫 시즌,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38세이브와 2.14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두 부문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위기 상황 때마다 부르면 항상 나온다”는 뜻으로 자사의 휴대폰 브랜드인 “애니콜(Anycall)”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혹사에 가까울 만큼 많은 경기를 소화해냈다. 2000 시즌까지 삼성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임창용은 두산 베어스의 진필중과 함께 한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 양대 산맥으로 꼽힐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2001 시즌부터 그는 마무리 투수에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옮겼다. 2001 시즌 14승, 2002 시즌 17승, 2003 시즌 13승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쌓으며 김진웅, 배영수와 함께 삼성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2002 시즌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정규 시즌 및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그는 국가 대표로도 많은 활약을 펼쳤는데,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등 세 개의 국제 대회에 출전하여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

프로 야구 2003 시즌이 끝난 뒤 선동열이 삼성의 수석 코치 겸 투수 코치로 새롭게 부임하면서 그는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옮겼다. 그해 임창용은 정규 시즌 36세이브, 평균 자책점 2.01을 기록하며 여전히 최강 마무리투수임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에 구위가 떨어지면서 포스트시즌에선 좋지 못한 기량을 보여 줬다.

2004 시즌이 끝난 뒤 자유 계약 선수(FA)가 된 임창용은 일본 프로 야구(NPB)에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 구단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끝내 영입을 포기하였고, 그의 높은 몸값에 대한 부담과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이 빌미가 되어 한국의 다른 구단에서 선뜻 그의 영입을 조심스러워 했었다. 결국 소속 구단 삼성과 재계약을 맺으며, 심정수, 정민태에 이어 리그 전체에서 고액 연봉 3위를 기록했다.

추신수, 류현진
그리고 임창용

2005 시즌은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이자 임창용이 FA 계약 후 맞이한 첫 시즌이었다. 그는 다시 선발 투수로 보직을 옮겼지만, 2004 시즌 말부터 계속된 제구력 및 구위의 난조로 5승 8패 3홀드, 평균 자책점 6.50이라는 그의 프로 생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것은 그에게 혹사의 후유증이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 것이기도 했다. 2005 시즌 도중 팔꿈치 부상을 당한 임창용은 결국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다. 2006 시즌에는 재활에만 전념하였으며, 그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되어서야 1군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6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선 연장 12회에 구원 투수로 등판해 한화의 중심 타자 김태균을 상대로 148 km/h의 강속구를 뿌리며 삼진을 잡아 조금씩 부활을 알렸다.

한국인 14번째 빅리거…역대 최고령
시속 160km 공포의 ‘뱀직구’주무기

2007 시즌, 에이스 배영수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가운데 구단과 팬은 선발 투수 임창용에게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기량은 회복되지 못했고, 5승 7패 3홀드, 평균 자책점 4.90이라는 성적으로 2005 시즌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여 줬다.

2007년 시즌에도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내면서 뭔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동기 부여를 찾게 된다. 고민 끝에 임창용은 일본 리그 진출을 다시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2004년 시즌 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와 맺었던 2년 FA 계약이 끝나는 시점인데다 삼성 구단은 그가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조건없이 풀어주기로 미리 합의해 놓았었기에 일본 진출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007년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가 끝나자마자 그는 일본 진출을 하고 싶다고 구단측에 말했고, 흔쾌히 동의를 받았다. 2005년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을 뿐더러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단 새로운 리그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더 중요했기에 “인생의 황금기는 한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체된 나를 깨우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기며, 몸값이 낮더라도 상관없이 어떻게든 일본에 진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일본 프로 야구단 중 센트럴 리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그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다. 2007 시즌이 끝난 뒤 야쿠르트는 에이스 투수 2명, 용병 세스 그레이싱어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좌완 이시이 가즈히사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임창용 영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창용은 결국 야쿠르트와 2년 계약, 연봉 1500만엔(약 1억2400만원)에 합의함으로써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했다.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한 임창용은 팀의 간판 마무리 투수로서 2008년 첫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했다.

강타자 농락할
여전한 뱀직구

200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개막 첫 경기 때 셋업맨으로 등판했으나, 마무리 이가라시 료타의 부상으로 바로 그 다음날 마무리로 등판하면서 일본 진출 후 첫 세이브를 따냈다. 이 날 첫 삼진을 잡은 선수는 놀랍게도 이승엽이었다.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줌으로써 현재까지도 팀의 주전 마무리로 2009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도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팀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에 일조했다. 팬들로부터 야쿠르트 ‘수호신’이라는 말과 함께 ‘미스터 제로’ ‘이무타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강속구는 마치 뱀처럼 빠르고 꾸불꾸불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하여 ‘뱀직구’라 불리며, 최고 구속은 일본에서 세 번째로 빠른 160km/h이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 중 최초로 올스타전 팬 투표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진출 2년 만에 스스로 퀼리티를 높여, 실력을 인정받고 첫해 기본 연봉 30만 달러, 2010년 50만 달러(추정)에서 2010년에는 200% 증가한 기본 연봉 160만 달러에 재계약을 했다. 그러나 2012년 시즌 중 발생한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에 전념했으나 결국은 그해 11월15일 야쿠르트에서 방출되었다.

2012년 12월14일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이로써 역사상 4번째로 한국 프로 야구 , 일본 프로 야구 , 미국 메이저리그 순으로 활약하게 된 선수가 됐다. 그리고 엔트리에 올라와 2게임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임창용은?>

▲전남 광주 출생
▲해태 타이거즈
▲방콕 아시안게임 한국 야구 국가대표
▲삼성 라이온즈
▲시드니 올림픽 한국 야구 국가대표
▲부산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
▲시카고 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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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불확실성의 시대에 가장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관계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새 정부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한 적신호가 이제 눈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균열이 시작된 걸까? 우리나라 외교는 한미동맹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꾀한 때도 있지만 대체로 한·미 혹은 한·미·일 관계가 우선시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와 미국이 삐걱거리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고 있다. 상수였는데 변수됐나 지난 12일 미국 이민 당국에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귀국했다.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은 총 317명으로 남성 307명, 여성 10명이다. 이 가운데 1명은 잔류를 택했다. 지난 4일, 미국 이민 당국의 불법체류 및 고용 전격 단속에서 체포돼 포크스턴 구금시설 등에 억류된 지 8일 만이다. 이들은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중에 체포·구금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조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을 급히 방문했다. 당초 이들은 지난 10일(현지시각)에 전세기를 타고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미국 측 사정’으로 지연됐다. 외교부는 이번에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향후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미국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현 외교부 장관은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에게 이들이 신체적 속박 없이 신속히 귀국하고 향후 미국에 재입국하는 데 불이익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미국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고 한다.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미국을 떠나는 방식을 두고 우리나라와 미국 간의 이견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진 출국’을, 미국은 ‘추방’을 언급한 것이다. 자진 출국 방식으로 귀국하면 향후 ‘5년 입국 제한’ 등의 불이익이 없다. 반면 추방 명령으로 미국을 떠나면 영구적으로 기록이 남아 최대 10년간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8일 크리스티 놈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이 이번 사안과 관련해 “법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출국 형태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다행히 미국 측과 조율이 이뤄지면서 자진 출국 형태로 귀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루비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과 도출한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이 사안에 대한 한국인의 민감성을 이해하고 있다. 특히 미국 경제·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국의 투자와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야 “700조원 줬는데도?”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측이 원하는 바대로 가능한 한 이뤄질 수 있도록 신속히 협의하고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상황이 봉합되는 모양새지만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의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인 체포·구금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이민 당국의 모습을 두고 동맹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미국 측은 한국인 체포 과정에서 수갑을 채웠고, 이들을 환경이 열악한 수용소에 구금했다. 야권에서 ‘외교 참사’가 일어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6일,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이후 내놓은 논평에서 “이재명정부는 700조원 선물 보따리를 미국에 안겼지만 회담은 공동성명조차 발표하지 못한 채 끝났다”며 “그 결과가 고스란히 현대차-LG 합작 공장 단속 사태로 돌아왔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국민 사이에서는 실컷 투자해 주고 뒤통수 맞은 것 아니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700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약속해 놓고도 국민의 안전도, 기업 경쟁력 확보도 실패한 것이 이재명정부의 실용 외교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관세 협상,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미국에 5000억달러(약 700조원)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도 지난 6일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수갑 채우고 수용소 넣고 장 대표는 “이번 사태는 단순한 불법체류자 단속을 넘어 앞으로 미국 내 한국 기업 현장과 교민 사회 전반으로 피해가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수많은 한국 기업이 미국 전역에서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국가적 차원의 리스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국 측과 방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조 장관은 루비오 장관 등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책과 대미 투자 한국 기업 관계자들의 비자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 장관은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새로운 비자 카테고리를 만드는 등 다양한 방안 논의를 위한 ‘한미 외교부-국무부 워킹그룹’ 신설을 제의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한미 관계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미 관계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관세 등을 무기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동맹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삐걱거림’은 이정부 출범 초기부터 감지됐다. 미국 백악관은 이재명 대통령 당선과 관련해 처음 내놓은 메시지에서 중국을 언급해 ‘이례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백악관은 지난 6월3일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한미동맹은 철통같이 유지된다”면서도 “한국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진행했지만 미국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하며 반대한다”고 말했다. 백악관의 메시지를 두고 이정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 견제, 실용 외교를 표방하는 이 대통령이 중국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관세를 두고 이른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다소 소강상태가 되긴 했지만 갈등의 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분위기만 화기애애? 관세 협상이나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도 여전히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 시한으로 정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미국과 타결을 이뤄냈다. 당초 한미FTA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의 관세는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0’이었기에 타격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언급한 상호 관세 25%를 15%로 낮추는 데는 합의했지만 과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루비오 장관의 방한이 취소되는가 하면 ‘한미 2+2 통상 협의’를 앞두고 미국 측의 취소로 구윤철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길을 돌리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이 먼저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기준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이 지속됐다. 결국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에서 정리됐고 동시에 천문학적인 수준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때도 관세 협상 결과를 두고 이견이 나타났다. 우리 정부 측은 쌀, 소고기 등 농산물 개방은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면 개방을 말했다. 또 대미 투자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보였다. 이견은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고도 조율되지 않은 모양새다. 미국 측은 관세 협상 타결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대통령의 방미를 언급했고 실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앞에 두고 면박을 주는 등의 돌발 행동을 보인 바 있어 우려가 제기됐지만 무난하게 마무리됐다는 평을 받았다. 문제는 명문화된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달 25일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했지만 공동합의문은 발표하지 않았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동맹의 성과와 협력 의제를 문서화해 왔다. 당선 메시지에 중국 언급 정상회담 합의문도 없어 당시 공동합의문이 나오지 않은 데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제기될 정도였다. 정상회담에서 각종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지만 구체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결과였다. 특히 자동차 관세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업계는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했다. 관세 협상에서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으로 타결했지만 문서로 명시되지 않은 것이다. 안보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인 지난달 2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동발표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정상 간 논의 내용은 상당 부분 생중계됐고 나머지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양국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했다”고 말했다. 위 안보실장은 “문건을 만들어내기까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가 협의를 하면 마무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온 조 장관의 발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투자 부문에서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어 수용하지 않았다”며 공동합의문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이어 “미일 간 합의문 내용을 보면 왜 우리가 협상을 지연해 가면서까지 안을 만들고 있는지 이해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본은 관세 협상에서 제조업·항공우주·농업·에너지·자동차 등 분야에서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내용의 합의를 진행했다. 또 합의 불이행 시 미국이 관세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굴욕 협상’이라는 말도 나왔다. 조 장관은 “일본의 타결 협상안을 보면 우리가 비슷한 협상안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여러 문제점이 많다”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며 협상을 강하게 하다 보니 합의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품목 관세가 부과될 때 최혜국 대우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불확실성 해소될까?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자리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타국을 대하는 방식은 이제 변수를 넘어 상수가 되는 모양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한미 관계를 더 흔들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