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어둠이 점점 짙어지자 외로움도 진해졌다.
차가운 밤바람이 몰아치며 어린 시절부터 움터 온 고독감을 지푸라기마냥 떨게 했다.
그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그런 감정은 더 깊고 절실할수록 존재의 본질을 직면케 하는지도 몰랐다.
환락의 거리
보산리 입구로 들어서자 길이 한층 넓어지면서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거리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에 내걸린 간판엔 Lucky Club, Paradise Hall, DOWNTOWN SHOW, Cat’s Story, Casanova, Little Angels, Cicago Jack, Seven Star, Las Vegas Club 따위의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반짝거렸다.
서울의 번화가에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간판이 많았지만 대체로 한글로 적혀 있었는데, 도발적이고 울긋불긋한 영어 글자들을 보자 무척 낯설었다.
근무 시간이 끝났는지 길엔 미군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대에서 벗어나온 젊은 백인과 흑인들은 활기차고 자유분방스러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만해 보이는 모습으로 환락의 거리를 활보하고 배회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휘황한 네온사인 조명이 섞여 이리저리 흘렀다.
그들은 마치 입대하기 전 자신이 놀던 아메리카 뒷골목의 유흥가에라도 온 듯 여유만만했다.
이미 한잔 걸친 치들은 클럽에서 고른 이국땅의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와 함께 또 다른 생의 몽상과 환희를 찾아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놓았다.
덩치가 거대한 그들에게 안긴 아담한 한국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털이 숭숭 난 커다란 팔을 가진 백인과 흑인들은 아가씨의 가녀린 허리를 안고 곧 구겨 버릴 듯이 쓰다듬으며 허옇게 웃었다.
청운이 찾는 블루문blue moon 클럽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나쳐 버렸는지도 몰랐다.
청운은 목을 좀 축이고 지친 다리도 쉴 겸 적당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모든 클럽의 문 앞에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어 문득 갈증이 더 심해졌다.
‘이것 참…… 오아시스 없는 사막 같군.’
그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절룩절룩 걸었다. 마침 맞은쪽에서 홀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자 청운은 다가서서 물었다.
“혹시 블루문이란 데가 어딘지 아세요?”
“그건 여기 없어요.”
여자는 껌을 씹으며 붉디붉은 입술로 대꾸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청운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런 건 이 세상에도 없고 저 달나라에도 없는 허무맹랑한 사람들의 환상이에요. 꿈 깨고 지금 살 일이나 걱정하는 게 좋아요.”
“난, 친한 형을 만나 보려고 블루문을 찾는 거예요.”
청운은 그쯤 하고 다른 행인에게 물으려고 발짝을 뗐다. 그런데 그 여자가 빨간 하이힐 뒷굽으로 길바닥을 똑똑 울리며 걸어가면서도 말을 계속했기 때문에 청운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쳇, 블루문이라구? 세상에 그딴 푸른 달이 어디 있겠어? 환상으로 남도 속이고 자기 자기마저 속이려고 지어낸 것일 뿐……. 그래도 혹시 몰라 백과사전을 한번 찾아 봤지. 환상마저도 아닌 찌질한 현실이야. 대기 중에 먼지 농도가 짙어지면 미세한 먼지들이 붉은 계통의 빛은 산란시키고 나머지 색은 통과시켜 달이 푸르게 보일 수 있다더군.”
여자의 긴 머리칼은 물을 들였는지 자줏빛이 감돌았고 끝부분이 곱슬곱슬했다. 겨울 밤바람이 찬데도 여자는 몸매가 잘 드러나는 매끄러운 우단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것도 붉었다. 각선미를 뽐내는 하얀 종아리를 제외하곤 온몸에서 붉은 색깔을 뿌리며 그녀는 살랑살랑 걸어갔다.
적어도 뒷태 하나만큼은 주간지 화보에서 본 여배우나 미스코리아의 몸매에 못잖아 보였다.
보산리 입구 들어서자 새로운 풍경
모든 클럽 문에 ‘한국인 출입금지’
“혹시 클럽 쑈 무대에서 활동하는 피에로 또는 코리아 채플린을 아세요? 꽤 유명하다던데…….”
청운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아마 블루문 클럽을 아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곧장 또박또박 걸었다. 옆얼굴이 달처럼 창백했다.
“호호…… 개도 입귀가 찢어지도록 웃겠네. 뭐, 유명한 배우라구요?”
“그럼 무명 배우인가 보죠? 아무튼 피에로 형을 알긴 아는군요. 지금은 뭘 해요?”
여자는 대꾸 없이 코웃음을 치곤 율동적으로 걸었다 얼마 후 거센 바람을 피하듯 슬쩍 비켜 서더니 갑자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직접 물어 봐요. 호호…….”
그러고는 어느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청운은 눈을 들어 간판을 쳐다보았다. 없었다.
영어도 한글도. 다만 건물 지붕 위에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푸른 달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은은한 빛을 허공에 뿌리고 있었지만, 진짜 달이 아니라 내부에 네온사인이 장치된 둥근 플라스틱 통이었다.
청운은 출입문 앞으로 슬슬 다가갔다. 클럽의 기도를 보는 성싶은 목이 굵은 사내가 힐끗 쏘아보았다.
“혹시 여기가 블루문입니까?”
청운의 물음에 사내는 한번 더 훑어보고 나서 심드렁히 대꾸했다.
“흐음, 그런데요.”
“혹시 여기 피에로라는 희극 배우가 있는지……?”
“누구요? 피에로가 어디 한두 놈이어야지.”
“본명은 김순식이라고 하는데…….”
사내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헌데 형씬 걔하곤 어떤 사이유?”
“의형제간입니다.”
“흐흣, 요즘 세상에 의형제라니 웃기는군. 흠, 아무튼 일단 조용히 들어가서 한번 물어 보슈.”
“예, 고맙습니다.”
청운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곧 피에로 형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나머지 문지기가 악당이든 개구리든 우선 고맙기만 했다.
저 아득한 선감도에서 고락을 같이하다가 마침내 목숨마저 걸고 탈출을 감행했으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험한 바다 한가운데서 헤어져야 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청운으로서는 그런 이색 지대에 처음 들어가 보는 셈이었다. 물론 청량리 풍전 나이트클럽과 유사한 업종이겠지만 왠지 모를 다른 느낌이 밀려들었다.
덩치 크고 야릇한 체취를 풍기는 백인과 흑인들만의 유흥장이라서 그럴까?
혹은 그들과 바짝 붙어 얼려 미소 짓는 여자들 때문인가? 아니면 미군부대가 바로 앞에 진을 치고 있어서 그 후광 때문에……?
청운은 어둑스레한 구석쪽에 서서 신세계 같은 홀의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코리아 채플린
휘황찬란한 조명이 교차하는 널찍한 원형 공간에서는 귀청을 찢을 듯한 팝송 곡조에 맞춰 남녀들이 뱀장어처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미꾸라지와 뱀장어랄까.
홀 천장에 매달린 오색 미러볼이 서서히 돌며 환상적인 색색가지 빛을 조합해 춤추는 남녀들의 얼굴과 몸 위에다 뿌렸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