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19만6465m 오른’ 전성기 회계사 등산 예찬론

“건강에 공짜 없습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30여년 간 숫자를 봐온 회계사는 6년째 산에 푹 빠져있다. 산을 공부하고 기록하면서 ‘발전’에 목말라 하는 모습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뽐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하나에 빠져서 ‘그래도 이 분야는 내가 좀 알아’ 이 정도는 돼야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산에 오르는 걸까요?” 기자의 우문에 전성기 회계사는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냐’는 질문과 같습니다”라는 현답을 남겼다.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전 회계사는 등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몇 번이나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아파서…

등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미 순위서 매번 최상위권에 자리한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5년 단위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등산은 지난 20년간 1-1-1-2위를 기록했다. ‘등산은 중장년 남성만 좋아한다’는 인식도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MZ세대가 등산을 더 즐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서 만난 전 회계사는 ‘등산 매니아’를 넘어 ‘등산 덕후(한 분야에 미칠 정도로 빠진 사람)’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산은 물론 교통편, 동호회, 심지어 보폭, 호흡법 등 관련 정보에 해박했다.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에 적어둔 등산 기록은 ‘등반 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꼼꼼하게 정리돼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던 것은 등산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표정이었다. 1964년생, 중년의 회계사는 산과 봉우리, 정상서 본 경치 등을 말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공자는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전 회계사를 보면서 ‘즐기는 자는 산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회계사가 된 그는 2019년 5월 은퇴할 때까지 ‘숫자’와 씨름하며 살았다. “회계사 생활이 지겨워져서”라고 은퇴 이유를 밝힌 그는 비슷한 시기에 등산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였다. 2018년 4월경부터 척추관협착증으로 고생하던 그에게 ‘아파도 참고 걸으라’던 조언이 등산으로 이어졌다. 

2019년 1월부터 오르기 시작
100대 명산 정복…200대 도전

2019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산행에 나선 전 회계사는 6년여 동안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오르고 현재 200대 명산 완등에 도전하고 있다. 전 회계사가 보여준 등산 앱 기록으로는 220회에 이른다. 지금까지 등반한 산의 고도를 합친 거리는 19만6465m에 달했다. 백두산(2744m)을 72번 등반한 수준의 거리다.

전 회계사는 “처음에는 북한산, 두 번째가 관악산, 세 번째는 검단산이었다”며 “같이 간 선배가 검단산 정상서 보이는 산을 가리키면서 용문산이라고 알려줬다. 바로 다음 주말에 용문산에 올랐다. 정상만 찍는 것은 내 스타일과 맞지 않아 긴 코스(11.5㎞)로 설계해 다녀왔다. 그때 등산 앱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1호 기록이 용문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용문산 백운동은 산이 뾰족하게 돋아 있어 한국의 마테호른이라고 불린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가팔라진다.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상서 쉬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할 때 느낌이 아직도 선하다. 지난해 겨울에 다시 한번 다녀왔는데 경사는 여전히 가팔랐다”고 설명했다.

전 회계사는 주로 혼자 산에 오른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차를 이용하거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안내산악회’라는 등산 에이전시를 알게 됐다. 특정 산에 오를 인원을 신청받아 최소 출발 명수 이상이 되면 안내산악회서 버스와 가이드(산행 대장)를 섭외해 산행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1회성 산악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려 220회 
등반 기록

마치 플래시몹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28인승 버스를 함께 타고 등반할 산 입구까지 간다. 산 입구서 각자의 코스로 산을 탄 뒤 정해진 시간까지 공지한 장소로 가면 다시 버스를 타고 처음 출발지로 향한다. 산행 이후 출발할 때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 10분 이상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한다. 

전 회계사는 “산행의 60% 정도는 안내산악회를 이용했다”며 “무박 등반을 하는 경우 새벽 3~4시 사이에 버스서 내리면 28명 내외의 사람들이 각자 부산하게 움직이며 등반 준비를 하고 속속 들머리를 지나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버스서 내리기 30분 전부터 신발 끈을 동여매거나 머리띠를 하는 등 준비에 몰두한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엔 ‘오늘 하루 산행이 어떻게 펼쳐질지’ 두려움도 느껴지고 흥분되기도 한다. 때로는 몸의 신경조직에 뭔가 짜르르 흘러 들어오면서 팽팽하게 긴장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완등한 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에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과 기록한 글은 해당 산을 처음 가는 사람이 보면 바로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세세했다. 언제 출발했고 어디서 쉬었으며, 어떤 코스를 이용해 산에 올랐는지, 심지어 경사도는 어느 정도였는지까지도 적었다.

그런 전 회계사도 속리산에서는 심하게 ‘알바(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알바는 일종의 등산 용어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뜻한다. 계획한 코스를 ‘본업’으로 치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알바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전 회계사는 “혼자 다른 데 가서 헛짓하다 오는 것”이라면서 웃었다. 

성취감
엄청나

전 회계사는 “등산 앱을 켜면 내가 등로서 어느 쪽으로 벗어나 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그걸 보고 찾아가면 얼추 찾는데 속리산에서는 느낌으로는 왼쪽으로 가는데 실제로 내 움직임은 왼쪽으로 가질 않더라. 정말 난감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가만히 앉아 쉬고 있는데 뿔 달린 사슴이 지나갔다. 산에서 사슴을 처음 봤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결국 그는 속리산 법주사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위 옆이나 계곡 근처를 지날 때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설명했다. 평지 길은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흔적이 남는데 바위 옆이나 계곡은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아 인근을 지날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다는 것이다. 

전 회계사는 산에 오르기 전 ‘설계’, 즉 준비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설악산은 봉우리가 매우 많은데 그 이름을 다 알기 위해 인터넷 ‘키워드’를 기록해둘 정도였다. 그는 “산에 올라서 보이는 봉우리의 이름을 다 알아야 한다. 내가 보고 그 봉우리 이름을 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산행 기록을 보고 인터넷 자료를 뒤져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여러 차례 돌려보고 난 후에 산행을 시작한다. 그러고 산에 가서는 주요 장소마다 사진을 찍고 기록한다. 산행을 마친 뒤에는 산의 경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보며 또 공부한다. 산을 오르는 것을 넘어 탐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 회계사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재미있다’는 표현과 함께 ‘발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등산을 통해 발전하고 등산을 위해 발전하는 삶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에게 등산을 다닌 6년의 시간은 ‘체득’의 과정이었다. 산행하면서 본인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6년 동안 산행하면서
최적화된 방식 찾아내

전 회계사는 “산에서 내려올 때 스틱(등산 장비)이 유용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하체를 단련하기 위해서다. 무릎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하체에 부하를 줘야 한다. 또 보폭을 크게 해 허벅지에 부하를 주기도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호흡과 스태핑의 조화와 균형에 대해서도 말했다.

전 회계사는 “호흡의 들숨과 날숨의 주기는 수시로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사도에 따라 보폭의 크기, 스탭핑의 완급, 호흡의 완급 등 3가지를 잘 조절하면서 산행하면 덜 지치고 꾸준히 할 수 있다. 몸의 에너지를 100% 쓰는 게 아니라 80%만 쓴다는 생각으로 걸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회계사가 이렇게 산에 푹 빠진 이유는 뭘까? 전 회계사는 ‘성취감’을 첫 번째로 꼽았다. 그는 “농담처럼 하는 말인데 세상에 없는 게 3가지가 있다.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짜가 없다. 등산은 ‘공짜가 없다’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취미다. 힘들게 올라갔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그것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행복과 고통은 서로 등을 대고 붙어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면 고통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고통을 참고 올라가면 거기에 비례한 만큼 행복이 다가온다. 쉽게 산에 오르면 그 행복감이 덜하다”고 덧붙였다.


‘밋밋한’ 산보다는 오르기 어려운 산을 등반했을 때 더 큰 행복함을 느낀다고도 했다. 전 회계사의 다음 목표는 200대 명산을 완등하는 것이다. 또 백두대간 종주도 꿈꾸고 있다. 

고통과 행복
비례한다

이어 “산에 가면 모든 게 다 좋다. 높은 곳에 올라 뻥 뚫린 산하, 겹겹이 펼쳐진 산 그리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정말 너무 좋다. 또 힘들게 올라간 뒤 편안하게 난 능선길을 걷는 느낌, 땀을 뻘뻘 흘리고 난 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느낌도 좋다. 피곤한 즐거움조차 좋다”고 등산을 예찬했다. 

 

[전성기 회계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한국공인회계사
▲미국공인회계사 시험 합격
▲세화회계법인(1990. 9~1993. 4)
▲세동회계법인(1993. 5~1999. 5)
▲안진회계법인(1999. 6~2019. 5)
▲Deloitte 안진회계법인 부대표
▲Deloitte 안진회계법인 금융산업감사 부문 그룹장 및 Country Leader 역임
▲신한회계법인(2023.10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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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