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쉐마미술관서 고 황창배 화백의 22주기 기획초대전 ‘괴산의 그림쟁이’를 준비했다. 황 화백은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한 작가로, 이번 전시는 작고 22주년을 기념해 그의 발자취와 정신을 기리는 취지로 마련됐다.
황창배 화백은 서울서 태어나 대학까지 서울서 마친 ‘서울 토박이’ 작가다. 그런 그가 서울 화실을 정리하고 충북 괴산의 외딴 사과나무골 옆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은 1990년이다. 운명하기 전 마지막 10년을 보낸 곳도 괴산이다.
화법 버리고
황 화백은 1947년 서울 태생으로 초·중·고를 다녔고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1978년 31세의 나이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서양화 화단에서는 반국전 운동이 일어나는 등 전위미술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반면 한국화와 조각은 국전을 통해 화단에 진출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했던 시기였다. 그렇다 보니 동양화가의 대통령상 수상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명지전문학교에 재직 중이던 황 화백은 대통령상 수상의 부상으로 유럽미술관 순방 기회를 얻게 됐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서양의 현대미술을 접했다. 이후 동덕여대, 경희대,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로 재임하던 그는 5년 뒤 교직을 떠나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의지의 산물이 작업실 이전이었다. 50대부터 운명하기 전까지 황 화백의 인생서 가장 많은 걸작을 남긴 곳도 바로 괴산의 화실이었다. 청주대학교 대학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청주와도 인연을 맺었다.
황 화백은 한국화 ‘秘52’로 국전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 동양화 화법을 모두 버렸다.
국전 대통령상으로 두각
작업실 옮겨 마지막까지
쉐마미술관 관계자는 “한국 화단의 대부분 작가가 고리타분한 기법을 고수하면서 변함없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는 것이 통례였던 당시 사정에 비춰볼 때 황 화백의 태도는 대단한 용단이 아닐 수 없다”며 “진정한 창의적 작품을 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황 화백은 보수적인 한국화의 현대화를 위한 선두주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동안 대상의 표현에 있어 가치를 묘사하는 데 역점을 뒀던 한국화의 전통적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서양화의 현대회화서 볼 수 있는 방법, 즉 대상을 재해석하고 해체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변형시키고 재분석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
황 화백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이자 장점은 천부적 재능의 필력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 나무나 꽃, 새 등의 형상은 구상과 추상의 특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만큼 매우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최광진 미술평론가는 황 화백의 독보적 조형세계를 가리켜 “황창배 화풍”이라고 말했다.
쉐마미술관 관계자는 “미술사적으로 볼 때 황 화백의 화풍은 서양화의 신표현주의적이면서 우리 전통의 민화적 요소를 현대화시키는 방법을 차용하고 있다”며 “54세 일기로 운명한 뛰어난 천재 화가를 회상하며 괴산서의 10년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작품과 자연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창의적 작품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요. 계절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보노라면 끝내 경탄을 금할 수 없어요. 아, 저토록 신비로운 꽃, 봄이면 싹이 돋는 풀 하나에서도 생명의 신비로움에 가슴 떠는 것.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 실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너무 달라요. 너무 신기해 작업이 안될 지경이었어요.(황창배 <여성백과> 1992년 4월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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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창배는?]
▲학력
경복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동대학원 졸업
▲경력
동덕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1982~1984)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1984~1986)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1986~1991)
경기대학교 조형대학원 교수(1995~1997)
동덕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초빙교수(1995~1997)
▲수상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77)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대통령상(1978)
선 미술상(1987)
토탈미술상(1991)
대구 석재문화상(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