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원래 좌절된 소망은 열배 백배 안타까운 추억으로 변해 사람을 과거로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법이야. 정신이상이 되기 전에 현실을 바로 보아야지. 아니 뭐 크게 고민하거나 애통스러워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현실에서 후계자로 선정된 딸을 보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 걸. 그 박통 각하 나리님께서 만약 살아 계셨다면 따님보다 훨씬 더 추악한 말로를 걷지 않았을까?”
독선과 독단
“오히려 그때 순직하셨기에 영웅 위인으로 추앙받는 셈이지. 그 당시 점점 주색에 탐닉해 들어가던 상황은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다더군. 정치적 판단에서도 그랬대. 독선과 독단…. 자기는 천재적인 영웅이기에 어떤 난관이나 구렁텅이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과대망상은 꼭 그분뿐만 아니라 흔히 수재들이 잘 걸리는 착각의 사슬이지.”
“따님 대통령도 수재라면 수재지 결코 바보 멍청이는 아니야.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꾸렸다면 훌륭한 현모양처가 될 수도 있었으련만, 괜히 정치판에 뛰어들어(그것도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버지에게 빙의된 자들에게 떠밀려) 부친의 못다 한 꿈을 펼쳐 보이겠노라며 어릴 때부터 배워 익힌 바 비전(秘傳)의 묘술을 시전하지만 청천 하늘을 날긴커녕 점점 추락하고 있잖아. 앞으로 어떤 나락의 구덩이로 떨어질지 몰라.”
“미국, 중국, 일본, 특히 북한 놈들의 방해 때문에 정치를 제대로 해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잖아. 난바다의 거센 파도 속을 일엽편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신세가 외로워 보여.”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시시각각 이성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고군분투해야 살아남는 판인데, 적도 아군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채 독선적으로 옛날 옛적 만파식적이나 늴리리 불어 판도를 잠재울 꿈이나 꾸고 있으니…. 바다 물결이 위험스럽긴 해도 배를 띄워 주는 바탕이건만, 지혜롭게 잘 활용할 생각은 않고 아버지의 몽상에 젖어 태평가나 흥얼거리는 꼴이랄까? 세상이 경천동지할 정도로 바뀌었는데도….”
“아마 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시더라도 글로벌 대양(大洋)을 헤쳐 나가긴 어려웠을 거야. 이미 시효가 만료되고 유통기한이 많이 지났다는 얘기지. 그런데도 여전히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믿고 희희낙락이니 대한민국호가 대체 어찌 될는지….”
“흠, 마치 우국지사 같구먼. 큰 바다보다는 이 하숙에서 어찌 살아낼지 걱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허헛, 누가 할 소릴 사돈이 하는군. 바다가 아니라 이 콘크리트 아스팔트 바닥이라도 마찬가지야. 이 하숙집도 주인이 까딱 잘못 운영하면 침몰해 버릴지 몰라. 저기 저 치킨집이나 슈퍼마켓 또한…. 위정자 나리들은 자기네 당파의 대국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소국도 무시하지 말아야 해.”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국리민복 해쳐
여왕 각하? 점차 금 가는 환상의 유리거울
“나리들께서 당연히 그러겠지 뭘.”
“아냐. 그런 생각이 좀 있다면 개성공단을 제멋대로 마구 폐쇄해서 거기 입주한 수많은 중소기업체 오너와 종업원들을 낭떠러지로 몰아넣진 않았겠지. 그리고 사드를 얼렁뚱땅 배치해 성주군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중국을 자극해설랑 괜스레 국리민복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미래를 봐서 하는 거잖아. 꼭 필요해서 하는 거라구!”
“그래,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그런데… 꼭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설령 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더 많이 심사숙고한 후에 환경 영향 조사를 엄밀히 하는 등 절차에 맞게 했더라면 아마 미국 정부도 한국과 한국인을 자기네의 똘마니가 아니라 동등한 친구로서 대우했을 거야. 그런데 이건 뭐 밀당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팬티를 훌렁훌렁 벗어 버린 꼴이니, 그들이 겉으론 웃을지언정 속으론 우리 대한민국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개성공단, 일본군 위안부, 미군이 움켜쥐고 있는 전시작전권 문제,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등 뭐 하나 주인다운 의식을 갖고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긴커녕 굴종적인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며 낄낄거려대니…. 원 참, 자칭 선덕여왕이 카랑카랑 뱉어내는 통일대박론도 참다운 자기 목소리 같지가 않고, 어딘지 뭔가 뒤에서 누가 조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야.”
“어이, 미친 소리 작작하구 술이나 마셔!”
“설마 막걸리 반공법으로 끌려가진 않겠지?”
“이건 맥주니까 쭉 들이켜고 그 잘난 아가리나 좀 닥쳐!…”
태극기 부대를 비롯한 열혈 지지자들은 아직도 그녀를 여왕 각하로 떠받들고 있었다. 하지만 환상의 유리 거울은 차츰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여왕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다. 하긴 요즘 우파고 좌파고 간에 정당한 비판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우리의 오른손과 왼손뿐 아니라 우뇌와 좌뇌, 오른쪽 눈과 왼쪽 눈, 좌우의 귀·코·입·심장·콩팥·성기마저 서로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 몸뚱이가 어찌 성할 날이 있겠는가.
남북끼리만 아니라 남한 내부마저 분열돼 서로 잘났다며 아웅다웅하는 판이니 우리의 심신, 즉 마음이 어찌 온전할 수 있으리오?
계절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아니다. 좀 어폐가 있는 것 같다. 봄에서 늦봄으로,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선 깊이보다 오히려 얕음이 더 유행하는 듯싶었다.
슬쩍 구경
어느 날, 나는 피에로씨의 권유로 탈북자 단체 사무실에 마실을 가게 되었다. 내심 한번 가 보고 싶었기에 내가 은근히 바람을 넣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만약 그가 권하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그는 마치 무척 비밀스럽고 대단한 아지트에라도 데려가는 양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냥 슬쩍 구경 가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삼각지 부근의 허름한 건물 2층 한구석에 ‘자유대한통일추진문화협회’가 자리해 있었다. 피에로씨는 무슨 암호라도 치듯 이상 야릇한 수법으로 문을 노크했다. 내가 보기엔 유치스러웠으나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