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해웅 기자 = 랭킹 2위를 달리며 순항 중인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권순찬 감독이 지난 2일, 구단 측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비보를 접했다.
배구계에 따르면 권 감독은 이날 오전 흥국생명과 계약에 대해 논의를 가졌으나 “구단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상 경질당했다. 부임 9개월 만에 7개 팀 중 2위로 올려놓은 권 감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다.
흥국생명 측도 “권순찬 감독과 결별한 것이 맞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에 따라 김여일 단장도 흥국생명을 떠나게 됐다. 구단 측은 ‘결별’ ‘헤어짐’이라는 워딩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경질이라고 보는 시각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임형준 구단주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며 “단장도 동반 사퇴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핑크스파이더스를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들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지금까지 팀을 이끌어온 권순찬 감독께는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 감독 주장에 따르면 단장이 출전선수를 내보내라는 이른바 문자메시지(오더)를 보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다. 권 감독은 단장의 오더대로 선수를 경기에 투입하지 않은 게 이번 경질의 이유라고 보고 있다.
통상 축구, 배구, 농구 등 구기 스포츠 종목 감독의 권한은 전략 전술은 물론, 선수 선발 구성 및 기용, 관리까지 도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일 선수 개개인의 컨디션이나 상대팀의 선발 선수에 따른 전략 등을 고려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이다.
배구계에서 부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데다 2022-2023 V리그 시즌을 치르고 있는 감독을 경질하는 케이스는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권 감독은 상대팀에 대한 분석과 선수들의 기량을 감안해 적재적소에 선수를 투입시켜 연승을 이끄는 등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현재 흥국생명은 14승4패를 기록해 승점 42점으로 전체 순위 2위를 달리고 있으며 선두인 현대건설(승점 45점)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선두를 달리고 있는 현대건설과의 원정경기서 승리하며 1위 도약을 기대하던 흥국생명 팬들의 기대도 한껏 고취돼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 감독의 경질은 자칫 팀 자체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실제로 김연경 등 고참 선수들은 경기 보이콧까지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 단순히 흥국생명 팀의 문제가 아닌 ‘구단주나 단장 마음대로 감독을 경질할 수 있다’는 국내 여자 배구계 전체에 좋지 않은 선례로 남을 수도 있다.
배구계 일각에서는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 흥국생명이 감독 경질이라는 험로를 택한 것을 두고 다양한 뒷말이 나온다.
문제는 임 구단주가 직접적으로 권 감독이나 김 단장에게 제대로 된 경질 이유를 밝히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방향성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두루뭉술한 입장 표명으로 되레 당사자들은 물론, 배구팬들마저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내고 있다.
일부 배구팬들 사이에선 지난 2020년 도쿄월드컵서 ‘식빵좌’로 불리며 4강행을 이끌며 대활약했고 현재 V리그서도 엄청난 티켓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김연경이 다른 팀으로 이적해야 할 때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최근 국내 배구계는 OK저축은행 조재성의 병역비리 논란에 휩싸이는 등 흥행에 빨간불이 켜지게 됐다. 논란이 하나둘씩 불거질수록 배구팬들의 관심과 열기는 금새 식을 수밖에 없다.
앞서 흥국생명은 쌍둥이 선수였던 이재영-이다영이 재학 시절 ‘학교폭력’을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당시 이들은 이렇다 할 사과도 하지 않고 이탈리아 리그로 둥지를 옮겼다.
흥국생명 차기 감독으로 어느 인사가 참여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흥국생명도 차기 사령탑 선임 계획에 대해서는 사실상 입을 닫은 상태다. 다만 현재 한창 시즌 중인 만큼 이영수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체제로 팀을 꾸릴 것으로 보인다.
흥국생명은 오는 5일 오후 7시 GS칼텍스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날 경기 내용 및 승패 결과에 따라 이영수 감독대행체제의 성패 여부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