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준규의 아내로 더 잘 알려진 진송아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담백하게 전합니다. 3대가 배우의 길을 걷는 가운데, 주위의 남자들을 내조해온 진송아의 시선으로 우리네 일상을 되돌아봅니다. <편집자 주>
누구나 단꿈에 빠져 있는 새벽, 문득 그런 질문이 스친다. ‘왜 좋은 기억보다 힘들고 아픈 기억이 강렬할까?’. 이번에는 내 삶에 초라함을 느끼게 해준 하나의 프레임을 들여다볼까 한다.
시아버지가 당대 최고의 스타였기 때문에 당연히 남편은 ‘금수저 오브 금수저’였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우리 수중에는 3000만원이 전부였다. 시어머니와 아들 둘, 우리 부부가 서울에서 방 세 개짜리 집을 찾기에는 버거운 금액이었다.
겨우 방배동의 반지하 집을 얻었다. 불을 켜놔야 앞을 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애초에 욕심이 많지 않았던지라, 그럭저럭 살만은 했다. 장마철, 유난히 천둥 번개가 심했고, 창문을 치는 빗소리가 공포감마저 돌게 한 그날만 빼면 말이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발밑이 축축했다.
처음엔 실수로 물을 쏟은 줄 알았는데, 불을 켜고 나니 입이 떡 벌어졌다. 발목까지 물이 차 있었었다. 거실은 이미 물바다였다.
남편을 깨웠지만, 남편이라고 별 수 있나. 그저 얼굴만 마주 봤다. 워낙 큰 상황이 닥쳤기 때문일까, 우리는 웃음으로 현실을 자각했다. 마침 시어머니와 큰애가 시누이 집에 간 바람에 우리 둘만 감당하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걸레질했다. 그날이 남편이 걸레질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날로 기억한다.
힘겨운 하루를 보냈는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졌다. 바닥 끝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대화가 기억난다. 밤새 전쟁을 치른 이후 하늘은 유난히 청명했던 것 같다.
힘들었던 시기는 짧지 않았다. 둘째를 가졌을 때도 고난은 이어졌다. 정기검진은 건너뛰기 일쑤였다. 배는 불러오는데, 아이를 낳을 준비도 되지 않았다. 큰애와 여섯 살 터울이라 아기 물품이 없었다. 도움받기도 쉽지 않았다.
남편이 여기저기에 손을 벌렸다. 천 기저귀부터 젖병까지 받을 수 있는 건 몽땅 받아냈다. 분윳값을 줄이려고 백일까지 젖을 먹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찌 살았나 싶은 시간이다. 그랬던 우리 둘째가 이제 24살이 됐다니, 흘러간 시간이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
그사이 내 남편은 드라마와 예능을 휩쓰는 스타가 됐다. 연기로도 예능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비단 내 남편뿐이랴, 대한민국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는 나라가 됐고, 노래 한 곡으로 전 세계를 열광시키기도 하며, 현재 넷플릭스 1위를 거머쥐는 창작자들이 많다.
지금 우리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문화강국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이의 노력이 뒤에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없이 지금의 내 남편이 있을 수 없듯이, 수많은 배우와 감독, 제작자 뒤에 묵묵히 이들을 도운 ‘안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작금의 문화강국 이미지는 국민 전체가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도 아버지를 따라 연기자의 길을 걷는다. 아직 잘 알려진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각자 위치에서 매일 치열함을 드러낸다. 내 자식들도 남편처럼 오랫동안 힘들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이 감내해야 할 수많은 순간이 있을 테다. 대부분 배우가 그렇게 성장하듯이 말이다.
늘 선택받아야 하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 집 세 남자는 기꺼이 이 길을 가고 있다.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극복하기 위해 하루하루 싸워나가는 이들이 유난히 대견하다. 그들의 꿈이 이뤄질 날을 고대한다. 국민 대다수가 배를 곪았던 약소국에서 전 세계를 주름잡는 문화강국이 된 것처럼. 그 꿈이 이뤄지기까지 나 역시 힘껏 도울 생각이다. 마지막 빛나는 웃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