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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25일 11시01분

<긴급기획> 개구리소년 30주기 ①30년 아이들 쫓은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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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 조성 위해 희생됐다”

아이는 열세 살, 아버지는 마흔세 살. 아이는 열세 살, 아버지는 일흔세 살. 아이는 평생 열세 살인데 아버지만 나이를 먹었다. 세월이 하얗게 내린 머리카락, 깊게 패인 주름은 아이 잃은 부모의 슬픔이 남긴 흔적. 1991년 3월26일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아이들은 30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다. [편집자 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 회장은 개구리소년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그의 인생은 개구리소년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 아이들의 흔적을 쫓아 유가족과 동행한 30년 세월은 나주봉 회장을 개구리소년 사건의 또 다른 ‘산 증인’으로 만들었다.
 

▲ 지난 13일,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회장이 &lt;일요시사&gt;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고성준 기자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이하 전미찾모)’ 회장은 매년 2~3월이 가장 바쁘다. 3월26일 개구리소년 추모제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추도사를 쓰느라 머리를 싸매는 것도 이 시기다. 매번 추모제 하루 전날 먼저 대구로 내려가 현장을 살핀다. 20여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해온 일이다.

매년 3월26일
추모제 준비

나 회장은 올해로 66세. 그중 무려 30년을 개구리소년 사건을 쫓는 데 쏟았다. 1991년 7월 인천 월미도에서 아이들을 찾던 개구리소년 유가족과 처음 만나 현재까지 연을 이어왔다. ▲아버지들이 트럭으로 전국을 수색할 때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됐을 때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을 때 등 개구리소년 사건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 회장은 유가족 곁을 지켰다.

강원도 홍천 산골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친이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 됐다. 아버지가 일을 나간 사이 동생들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느라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5세 때 강원도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17세 때 이모의 소개로 인천의 중국집에서 일하다 서울로 오게 됐다.

잘 먹지도 못하고 몸을 혹사하던 중 덜컥 폐결핵에 걸렸다. 기침을 하다 피를 쏟아냈다. 나 회장은 당시 먹었던 약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카나마이신과 마이임부톨. 모두 결핵치료제로 사용되는 약이다. 먹는 건 부실한 데다 독한 약을 먹다 보니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주변 동료들도 그를 멀리했다.

“몸은 아프고 일도 못하고, 삶의 의미가 없었어요. 사이나라고 있어요, 일명 청산가리. 시골에서 꿩 잡고 이러는 데 쓰는 거. 예전에는 약국에서도 그걸 팔았다고. 그래서 그거를 사서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정하고 있었지. 근데 그때 시장에 갔다가 점쟁이를 봤어요. 쌀 뿌리고 엽전 던지고. 그중 한 사람 앞에 앉았죠.”

점쟁이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달밤에 원숭이가 곡을 한다. 뗏장 이불을 덮을 운수”라고 말했다. 뗏장은 ‘흙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의 조각’을 의미한다. 무덤을 파랗게 만들기 위해 덮는 ‘떼’를 뜻하기도 한다.

인천 월미도에서 각설이 공연하다
전단지 나눠주던 유가족 처음 만나

점쟁이는 나 회장이 죽을 운수라고 말해준 것이다. 안 그래도 죽을 마음을 먹고 있던 그에게 점쟁이의 말은 치명타였다. 

소주 두 병과 쥐포 한 마리, 사이나 한 조각을 들고 무작정 한강다리를 걸었다. 추운 겨울 차도 없고 가로등 불빛도 희미하던 거리를 걸으며 소주 병나발을 불었다. 사이나를 삼킬 만큼의 소주만 남기고 전부 마셔버린 그는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봤다. 이미 약해진 몸에 술을 들이 붓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회장 ⓒ고성준 기자

“사이나를 손에 꼭 쥐고 시커먼 강물만 보고 있었죠. 춥고 무섭고 눈물은 줄줄 나고. 술은 계속 오르고. 그런데 그 시커먼 강물 여울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이더라고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우리 엄마. 그 자리에서 바닥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신을 차렸더니 먼동이 뿌옇게 오르더라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시 터덜터덜 걸어서 병원에 갔지.”

이후 그를 가엾게 여긴 약사가 치료를 도와주면서 폐결핵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3년을 꼬박 앓고 나서야 완치가 된 그는 서울 청량리에 자리 잡았다. 그때가 1980년 5월,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려 했지만 단속이 심해지면서 연이은 실패를 맛봤다. 결국 각설이 분장을 하고 춤추면서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일에 뛰어들었다. 1991년 7월, 그가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때라고 말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폐결핵 걸려
자살 생각도

“인천 월미도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3명이 한 팀이어서 돌아가면서 쉬고 있는데 저쪽에서 ‘우리 아이들을 찾아주세요’ 이런 소리가 들리고 40대 정도 된 남자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어요. 그때는 온 바닥에 껌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떤 여자가 그 전단지로 자기 하이힐에 붙은 껌을 떼는 거예요. 아니, 그걸 보는데 마음이 좀 이상했어요.”

1991년 3월26일 개구리소년 사건이 일어나고 아버지들은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7월 땡볕 아래 다섯 아버지들이 아이를 찾아달라고 전단지를 돌리는 모습이 나 회장 눈에는 그렇게 안쓰러웠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들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나눠주겠다며 한 묶음을 받아왔다.

이것이 바로 개구리소년 아버지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개구리소년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버지들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각설이에게로 취재 요청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후 나 회장과 아버지들은 청량리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상황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함께 각설이 공연을 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그를 떠나갔다. 

나 회장은 그때부터 아예 대구로 내려가 아버지들과 동행했다. ‘청량리 털보 각설이’로 불렸던 나 회장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 회장이 각설이 공연을 통해 모금한 돈과 사회 각계의 후원으로 개구리소년 사건의 현상금이 마련됐다. 당시 개구리소년 전단지에 적혀있던 4200만원이라는 액수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사무실 내부에 실종 전단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다. ⓒ고성준 기자

“읍 단위는 빼고 군 단위 이상의 마을은 다 가봤어요. 혹시나 새우잡이배 같은 데 팔려 갔을까봐 작은 섬에도 들어가서 찾아봤죠. 그 사이에도 시장통 같은 사람 많은 곳에 가서 공연도 하고요. 다들 먹고 살기 힘든 때라 아버지들도 넉넉지가 않았어요. 어떻게든 벌어야 했죠.”

그렇게 3년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나 회장과 아버지들은 남은 가족들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트럭은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나 회장도 서울 청량리로 돌아와 다시 노점을 차렸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노점 리어카에 실종아동의 전단지가 항상 비치돼있었다는 점. 

노점 리어카에
전단지 붙이고

“개구리소년을 찾으러 다니는 동안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이 주신 전단지를 하나둘 받아 왔습니다. 그걸 노점 리어카에 붙였어요. 시민들이 그걸 보고 제보를 해주시더라고요. ‘어디에 봉사를 하러 갔는데 아이를 봤다’ 이렇게. 그럼 또 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나 회장이 지금까지 전국의 고아원, 기도원 등을 뒤져 찾아낸 실종아동은 수백여명에 이른다. 나 회장이 실종아동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 전과도 잔뜩 쌓였다. 누군가는 훈장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나 회장은 창피한 기록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2001년 서울시민대상과 함께 받은 상금 300만원으로 지금의 전미찾모 사무실을 만들었다. 나 회장이 시화공장에 직접 찾아가 짜온 컨테이너는 2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량리역 2번 출구 쪽에 놓인 노란 컨테이너 벽면은 실종아동들의 전단지로 빼곡하다. 실종아동 부모들, 실종아동 문제를 개선하겠다던 정치인들, 경찰, 동네 주민 등이 전미찾모를 드나들었다. 
 

▲ 개구리소년 30주기 추모비

정신없이 바쁜 나날 중에도 나 회장은 개구리소년 사건을 잊지 못했다. 나 회장은 지난 2~3월 3번에 걸쳐 진행된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개구리소년 사건에 대해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상한 사건’ ‘의문 투성이’ 등이라고 표현했다.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유가족 이상으로 훤히 꿰고 있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실제 사망원인 등에 있어서는 나 회장과 유가족의 생각이 다르기도 하다. 나 회장은 정치적 상황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적 불안감 조성을 위해 개구리소년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의견이다.

반면 우철원군의 아버지 우종우씨는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봤고, 그래서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 있다. 

실종아동들 대부로 인생 바뀌어
고아원·기도원서 수백명 찾아내

30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같은 상황을 보고 들은 나 회장과 유가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릴 만큼 개구리소년 사건에 의문점이 많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 회장은 개구리소년 사건을 놓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큰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사회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구리소년 추모비 건립을 추진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유가족들은 당초 추모비 건립을 반대했다고 한다. ‘아직도 개구리소년 사건에 매달려 있느냐’ ‘지들(아이들)이 산에 가서 죽은 거 아니냐’는 등 유가족과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말이 쏟아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나 회장은 오래 전부터 개구리소년 추모비 건립을 밀어붙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 가고 있는 개구리소년 사건이 추모비 건립으로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 나 회장은 지난달 27일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와룡산 세방골과 추모비 건립 예정 장소를 찾아 묵념하고 소주를 뿌렸다. 200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철규(김종식군 아버지)씨도 추모했다.


김씨는 아들의 유골을 보지 못했다. 
 

▲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사무실 전경 ⓒ고성준 기자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너희가 땅속에 오랜 세월 묻혀 있다 뭍으로 나왔는데, (그동안)너희들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이제 며칠 후면 너희 5명의 이름을 새겨 넣은 아담한 추모비를 마련할 것이다. 그동안 어두운 곳에서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만 이제부터 너희들의 이름을 알리고 범행의 실체가 밝혀지는 그날까지 너희들 아버지와 아저씨가 열심히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도와주거라. 그리고 종식이 아버지, 우리 지켜봐 주시고 당신 몫까지 우리가 힘을 합쳐서 범인을 꼭 잡아서 처벌하는 그런 시간이 되도록 만들어 주세요.”

나 회장은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개구리소년 사건을 쫓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제 인생에서 개구리소년 사건을 빼면 나주봉 자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명확한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개구리소년 사건의 범인을 향해서도 말을 남겼다. 

범인 본다면
“꼭 알려주길”

“혹시라도 범인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 아이들을 왜 죽여야 했는지, 그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공소시효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섯 아버지들 가운데 한 분은 돌아가셨고 세 분은 병석에 누워 있고 이제 활동하시는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분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꼭 알려 주십시오. 정말 답답하고 울분이 터집니다. 꼭 좀 알려 주십시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개구리소년 30주기 추모제 ‘추모비 공개된다’

오는 26일 대구 와룡산 선원공원에서 ‘개구리소년 추모제 및 기원비 제막식’이 열린다.

3.5m(가로)×1.3m(세로)×2m(높이)의 화강석 재질로 제작된 조형물은 ‘엄마의 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주는 포근함, 보호막, 안식처’ 등을 상징한다.

꽃바구니 안의 꽃송이 5개는 개구리소년 5명을 의미한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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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줄 타는 안철수 사생결단 플랜

똥줄 타는 안철수 사생결단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정권교체에 대한 여론은 정권 재창출에 대한 여론보다 높다. 그러나, 여당의 이재명 대선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고 있진 않은 모양새다. 야권 대선후보가 여러 명이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은 야권 대선후보를 하나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대선후보들은 구체적인 단일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선 전 단일화는 철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화두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대선후보들은 그동안 후보 단일화를 첫 번째 승리 조건으로 여기곤 했다. 2022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식 대선후보 등록이 시작도 되기 전에 야권에서는 벌써부터 단일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국민의힘의 내홍 논란을 딛고 약진을 이어간 후부터다. 좁혀진 차이 자존심 싸움 합친다고 무조건 당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야권 대선후보들은 단일화에 유독 집착한다. 1987년 대선에서 단일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탓이다. 1987년에 제6차 국민투표로 대통령 5년 단임제가 확정된 후, ‘양김’의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여권 대선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이기려면 야권 대선후보가 한 명이어야만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후보는 본인의 승리를 장담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열망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보들은 그 표가 다 본인에게 올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는 ‘사자필승론’을 주장하며 다자구도가 오히려 본인에게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 후보는 지역 표심을 중심으로 대선판을 그렸다. 그는 노태우·김영삼이 영남 표를 나눠 받고, 김종필이 충청 표를, 그리고 본인이 호남 표를 독식해 당선된다는 계산을 했다. 하지만 야권 단일화는 실패했고, 최종 대선에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모든 후보가 출마했다. 김 후보가 그렸던 대선 판세와는 달리, 실제 대선에선 지역색보다는 정치색이 후보들의 희비를 갈랐다. 보수 지지자들의 표는 한 명의 여당 후보에게 결집된 반면, 진보 지지자들의 표가 두 명의 야당 후보에게 분열된 것이다. 결국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최종 당선됐다. 이때의 이변을 대한민국 역대 대선후보들은 잊지 않았다.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의 역사가 이후로 끊임없이 쓰여졌다. 1997년엔 김대중·김종필 후보가, 2002년엔 노무현·정몽준 후보가(정 후보 후에 지지 철회), 2012년에는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단일화에 성공했다. 김대중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 후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2012년 문재인 후보는 낙선했다. 사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 입장에서는 안 후보와의 단일화가 썩 반가운 주제는 아니다. 단일화설이 나온다는 의미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어느 정도 좁혀졌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후보 간의 지지율 추이는 과거에 비해 많이 좁혀졌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만해도 윤 후보는 야권의 압도적인 차기 대통령 감이었다. 지난해 5, 6월에 실시된 대통령 적합도 관련 모든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는 지금의 대선후보들을 크게 따돌리며 단독 질주했다. 지지율 급상승…선두권 합류 한계 ‘혼자는 어려워’ 어느 쪽 선택할까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리 의혹이 있는 정치계 인물 모두를 기소하는 강골 검사로 이름을 알렸던 윤 후보는 국민들에게 ‘공정과 정의’라는 기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검찰총장 임기 시절 막바지에는 문재인 대통령, 추미애 법무부 장관 등과 대립각을 세우며 인기는 배가 됐다. 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청와대 인사인 조국 전 민정수석의 비리를 조사하는 모양새는 윤 후보에게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주는 동시에 야권의 정치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수개월간 이어진 ‘조국 수사 논란’은 윤 후보를 자연스레 야권의 잠룡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의 인기가 점차 사그라든 것은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부터다. 공직자에서 정치인으로 직업을 한 번에 바꾼 윤 후보에게 정치인의 언행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윤 후보는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 선거운동을 이어갈 때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고, 정치부 기자들은 그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대중에게 여과 없이 전달했다.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이나 ‘부정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발언 ‘개사과 논란’ 등 윤 후보는 정치인으로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여러 차례 노출하며 유권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지지율 2%였던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에게 경선 막판까지 쫓기는 초접전 양상을 허용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경선 때의 실책은 윤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에도 이어졌다. “노동자 사망은 노동자 탓”이나 “부득이하게 국민의힘을 선택했다” “전두환을 지지하는 호남 사람들도 많다” 등의 실언을 쏟아내며 당 안팎에서 윤 후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쏟아졌고, 이는 지지율 하락세로 이어졌다. 특히,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극심한 마찰을 겪을 당시에는 지지층인 ‘이대남’을 안 후보에게 내주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에게 몇 주간 지지율 1위 자리를 허용했다. 정권교체 여론이 60%에 육박하는데도 여당의 후보에게 진다는 것은 윤 후보에게 매우 뼈아픈 지점이었다. 이는 “정권교체는 원하지만 윤 후보는 싫다”는 뜻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후보 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왔고, 이때 안 후보와의 격차는 많이 좁혀졌다. “안 후보와 단일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크게 대두된 것도 이때다. 국민의힘? 국민의당? 요즘 야권 대선 레이스 양상은 홍 의원과의 경선 때를 떠올리게 한다. 야권 후보 중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윤 후보가 미미했던 지지율의 안 후보에게 추격 받고 있는 중이다. 경선 레이스와 대선 레이스의 한 가지 다른 점은 안 후보를 이긴다 해도 대선의 ‘최종 승자’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지지율을 안 후보에게 빼앗겨 야권 표가 분열되면 이 후보에게 대권을 내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윤 후보에게 단일화는 ‘달갑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숙제로 다가온다. 윤 후보에게 단일화는 자신의 지지율 하락을 인정하고, 승리를 위해서 야권의 선택지를 하나로 줄여야 하는 과정이다. 지난해만 해도, 윤 후보는 단일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단일화에 대한 생각이 일절 없다”고 일관해왔다. ‘국힘 원팀’을 만드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국민의당까지 챙겨야 한다는 의견에 늘 난색을 표해온 것이다. 그러던 그가 지난 11일 “단일화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며 입장을 미온적으로 바꾸었다. 시험이 다가오자 숙제를 끝내는 학생처럼, 윤 후보도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압박을 서서히 받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안 후보 측의 입장은 아직도 강경하다. 본인으로 단일화가 성사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수차례 단일화를 경험한 안 후보는 그때마다 좋지 않은 기억을 쌓았다. 안 후보는 나름 큰 희생을 감수했는데, 그만한 결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단일화의 기억을 회상한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그랬고, 2012년 대선 때도 그랬다. 안 좋은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안철수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지난 16일 안 후보는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안일화(안철수로 단일화)라는 말이 시중에 떠돈다고 하더라”며 “정권교체를 바라는 야권 지지자들이 어떤 후보가 더 적합한 후보인지, 더 확장성 있는 후보인지를 보고 판단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 “내가 야권의 대표선수로 나가야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고, 국민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안 후보에게는 ‘중도 확장성’이라는 주요한 무기가 있다. 유권자들에게 안 후보는 보수색보다는 중도 색이 강한 후보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으로부터 자유롭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는 늘 대립각을 세워왔다. 따라서 안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한다는 명분도 서고, 보수당을 찍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도 된다. 안 후보는 현재 대선 레이스에서 지지율이 윤 후보에게 크게 밀리고 있지만, 야권 단일화 적합도에서는 윤 후보보다 10%포인트 넘게 웃돈다. 안 후보가 말했듯이, 야권 대선후보로 가장 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또 양보? 당선 포기? 반면, 윤 후보에게는 조직력이 있다. 비례대표 3석이 전부인 국민의당과는 달리 국민의힘은 국회 106석을 확보하고 있다. 전국에 지역구가 있으며 선거운동을 할 인력도 압도적으로 많다. 무엇보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대선에서 ‘이겨왔던’ 전례가 많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배출한 경험이 있다. 민주당과 대립하며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 전략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다. 또, 지지율 측면에서도 윤 후보가 안 후보보다 많이 앞서 있다. 한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 지지율로 올라온 안 후보지만, 국민의힘이 내홍을 끝내면서 윤 후보가 지지율을 거의 다 회복하고 있다. 윤 후보는 지난 7일 이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총회 자리에서 극적으로 화해하며 원팀 의지를 굳건히 했다. 이후 홍보전에 이 대표가 큰 힘을 실어주며 하락세를 그리던 윤 후보의 지지율은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순항이 이어지는 윤석열표 대선호가 안 후보와 단일화하는 것은 여러 모로 명분에 맞지 않는 상황이다. 정계 전문가들은 ‘윤일화’도, ‘안일화’도 아닌 ‘무일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고 있다. 양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후보 단일화를 하려면 여러 이해관계들이 맞아야 하고, 희생정신도 강해야 한다. 김대중·김종필의 이른바 ‘DJP연합’ 때처럼 말이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야권의 1위 대권주자로 달리고 있었다. 1997년 9월 <조선일보>가 공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30%에 육박하는 지지율 받았고, 김종필 후보는 약 3%의 지지율을 받았다. 단순 수치만 봐도 10배가량 차이나는 것이었다. 단일화 없이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김대중 후보였지만, 그는 김종필 후보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하며 연합을 이뤄냈다.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후보 자택에 직접 찾아가 연합할 것을 제안하면서다. 현재의 안 후보처럼 아쉬울 게 없다며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던 김종필 후보는 김대중 후보를 만난 후, 연합에 동의하며 김대중정부에 들어가 일할 것을 약속했다. ‘실리냐 고집이냐’ 딜레마 완주하고 지방선거 출마? 김종필 후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양보’ 덕분이었다. 이날 DJP연합 논의에서 김종필 후보는 내각제 개헌과 경제 부처 인사권이 보장된 ‘실세형 총리’의 자리를 약속받았다. 후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국민의정부의 경제 관료들은 실제로 김종필 후보가 지명한 인사로 채워졌다.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대표적인 예다. 윤 후보가 안 후보와의 단일화를 성사시키려면, 안 후보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단일화를 제안해야 한다. 김대중 후보가 그랬듯, 차기 정부 인사들의 일부 인사권을 넘겨주고 힘 있는 자리를 약속하지 못한다면, ‘윤일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후보만큼 윤 후보가 당내의 권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본인의 권력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윤 후보 혼자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안 후보 측 또한 김종필 후보처럼 윤 후보의 제안을 선뜻 수락하지는 않을 모양새다.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대선에 참여했다’는 기존 입장이 여전히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일화를 하고 대선을 완주한 경험과 하지 않고 완주한 경험 모두 갖고 있다. 낙선을 하더라도 끝까지 대선을 완주해 이름값을 높인 뒤, 곧 있을 지방선거나 재보궐선거에 나가는 것도 그에게는 좋은 방법이다. 1997년 당시의 김종필 후보와는 달리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셈이다. 지지율이 높은 후보가 많은 것을 양보해서 지지율이 낮은 후보와 연합을 하는 ‘DJP연합’의 그림은 지금의 윤 후보와 안 후보가 ‘그려야 할’ 그림과 많이 닮아있지만, 맞지 않는 이해관계와 양보 의지가 없는 양 후보에게 ‘그릴 수 없는’ 그림이 돼있다. 국민의힘 이 대표는 MBC 라디오에 출연해 “저희의 지지층이 일시적으로 이전돼 수치가 상승한 것에 너무 고무돼 안일화 이런 말도 만드셨더라”며 “인터넷 가 보면 안일화보다는 간일화(간 보는 단일화)라는 단어가 더 뜬다”고 주장했다. “이번엔 다르다” 자신만만한 국민의힘 측의 입장과 안 후보에 대한 조롱이 섞인 발언이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이 대표는 내가 무서운 것”이라며 “정치인들은 아무런 신경 쓸 게 없으면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위협이 될 때만 발언한다”며 맞받았다. 양측은 현재 단일화는커녕 갈등 양상으로 가기 직전이다. <ingyu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여권 단일화는? 야권이 만일 단일화에 기적적으로 성공한다면 여권도 단일화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선거에서는 같은 색의 후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진보색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정의당의 심상정 대선후보 또한 여권 단일화에 대한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다. 이 후보는 지난해 10월 “중요한 분기점인 내년 대선은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기 때문에 개혁 진영이 최대한 힘을 모아야 한다”며 “여권 대통합을 해야 한다. 심 후보 본인은 완주 의지를 표명하는데,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다. 그때 가서 우리가 함께 이길 수 있는 길을 국민이 제시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박빙의 상황 속에서 상대가 단일화한다면, 개혁 진영도 뭉쳐야 한다는 게 이 후보의 의견이다. 그러나, 심 후보는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는 “많은 국민이 ‘이런 대선은 본 적이 없다’며 혀를 차고 있다”며 “34년 양당 정치가 보여준 민낯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있다고들 하신다. 그럼에도 염치없는 양당정치는 또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려고 단일화에 대한 미련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지율 정체에 따른 정의당 선거대책위원회 해산과 며칠간의 칩거 후, 심 후보의 입장도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심 후보가 대선을 끝까지 완주해서 얻는 정치적 자산보다 단일화로 얻는 정치적 자산이 더욱 크다면, 여권의 단일화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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