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명가’ 노루그룹 비밀 승계작전 막전막후

깨지지 않은 장자 대물림 원칙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노루그룹 오너 3세가 지분을 추가로 매입했다.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그는 그룹 내 신성장사업을 손보고 있다. 신사업 특성상 단기간에 수익을 실현하기 어렵다. 다만 그룹 차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실적은 마이너스를 맴돈다. 과연 오너 3세는 성과를 인정받아 승계 기차에 오를 수 있을까.
 

▲ ▲ 한영재 노루그룹 회장 ⓒ노루홀딩스

노루그룹은 ‘노루페인트’로 유명한 중견 상장사로 올해 창사 75주년을 앞두고 있다. 창업주는 고 한정대 회장. 지난 1950년 유럽을 방문한 그는 한 쌍의 노루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남을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노루’를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잡은 것이다.

20개 계열
중견그룹

창업주 슬하에는 3남5녀가 있다. 경영권은 장남 한영재 회장이 물려받았다. 한 회장은 지난 1988년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다. 노루그룹 지배구조 정점에는 ‘노루홀딩스’가 있다. 한 회장은 이곳 최대주주로 그를 비롯한 오너 일가는 45.9% 지분을 갖고 있다.

노루그룹은 여느 중견그룹처럼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노루홀딩스를 중심으로 모두 20개 계열사가 포진해 있는데 상장사는 노루홀딩스와 노루페인트다.

노루페인트는 핵심 계열사로 분류된다. 그룹 매출 절반 이상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노루페인트는 최근 3년간(2017∼2019) 연결 기준 매출액 5500억원, 6100억원, 6400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적자는 없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90억원으로 동기간 가장 높았고, 지난해 순이익은 직전년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상승한 188억원이었다.

노루그룹은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연속 배당을 실시했다. 지난해 배당액은 모두 56억원으로 직전 2년간 배당총액에 비해 10% 늘었다.

노루그룹 3세는 한 회장의 장남 한원석 노루홀딩스 전무다. 한 전무는 지난 2017년 노루홀딩스 이사진에 처음 합류해 현재 여러 계열사에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전무는 올해 들어서만 10차례 넘게 노루홀딩스 지분을 사들였다. 규모 자체가 단번에 부풀려진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승계 후보라는 점에서 관심을 샀다.

75주년 노루 승계 작업 진행 중
단숨에 2대주주로 껑충 어떻게?

사실 한 전무는 이미 오래전 노루홀딩스 지분을 확보한 바 있다. 때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전무는 그해 4월9일 노루홀딩스 지분 5000주를 매입했다. 그룹 지주사 지분을 처음으로 매입한 순간이다. 1986년생인 한 전무의 당시 나이는 만 28세였다.

이후 한 전무는 지난 2015년 1000주씩 10차례, 모두 1만주를 매입했다. 지분은 기존 5000주서 1만5000주로 늘었다. 노루홀딩스 상무보로 승진해 사업전략부문을 맡고 있을 때였다.


가시적인 변화는 2016년 발생했다. 한 전무는 그해 6월 1만720주를 사들였다. 같은 해 12월 한 회장은 41만주를 시간외 매매로 한 전무에게 처분했다. 한 전무는 해당 주식 역시 취득했다.
 

▲ 노루페인트 안양 본사 ⓒ노루

그는 이미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포함해 모두 43만5720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만 30세가 되던 해 노루홀딩스 2대주주로 올라선 것이다.

한 전무가 노루홀딩스 지분을 대거 취득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노루로지넷’이라는 회사가 언급된다. 한 전무가 2014년 상근이사로 입사한 곳이다.

노루로지넷은 현재 노루홀딩스 종속회사지만, 과거 한 회장과 한 전무의 ‘부자 회사’였다. 이들은 노루로지넷서 각각 51%, 49%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 전무가 한 회장으로부터 41만주를 취득하기 한 달 전쯤, 노루홀딩스는 노루로지넷 지분을 사들였다. 당시 노루홀딩스는 노루로지넷 지분 51%를 취득하는 데 76억원가량을 사용했다. 일각에선 해당 거래 대금 상당액이 한 전무에게 돌아간 것으로 본다.

노루로지넷이 70억원 상당의 몸값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내부거래로 추정된다. 노루로지넷은 노루홀딩스와 물류대행 계약을 체결해 일정 수수료를 받았다. 회사가 노루홀딩스로 편입되기 전부터 노루로지넷 매출 상당액은 노루홀딩스서 비롯됐다.

단숨에
2대주주로

노루로지넷이 노루홀딩스 종속회사가 되기 전 3개년도 매출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노루홀딩스는 2014∼2016년 노루로지넷에 운반비 등의 명목으로 217억원, 235억원, 248억원을 지급했다. 당시 노루로지넷 매출액 전체서 74∼75%를 차지하는 비중이었다.

노루홀딩스는 이후 노루로지넷 지분을 완전히 취득했다. 한 전무는 노루홀딩스 2대주주로 올라선 뒤 특별한 지분 매입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매입 소식이 알려진 건 올해부터다.

그는 지난 3월27일과 30일 모두 1만5843주를 매입했으며 추가 매입은 그 다음달에도 계속됐다. 한 전무는 그달 10차례 노루홀딩스 지분을 확보했다. 취득한 지분은 모두 4만6496주로 집계됐다.

한 전무는 노루홀딩스 지분율을 3.28%서 3.75%로 높일 수 있었다.

한 회장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지만 그룹 내 위치는 공고하다. 한 전무는 경영 보폭을 차츰차츰 넓히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 전무는 노루그룹서 8개 계열사에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 노루 코일코팅 태국법인 ⓒ노루

한 전무는 국내 법인 ‘노루코일코팅’ ‘노루알앤씨’ ‘더기반’ ‘노루로지넷’ ‘디아이티’ 등에서 임원직을 수행하고 있다. 노루알앤씨에서는 비상근 이사를, 나머지 회사에서 상근 이사를 맡고 있다. 더기반과 디아이티에서는 대표이사로 근무 중이다.

해외 법인은 홍콩 노루홀딩스, 싱가포르 노루홀딩스, 노루 밀라노디자인스튜디오 등이다. 한 전무는 홍콩과 밀라노 법인서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전무가 임원으로 있는 회사 중 주목받는 곳은 농업회사법인 더기반이다. 노루그룹은 더기반을 신성장동력의 산실로 낙점한 지 오래다. 동시에 노루그룹 후계자가 대표이사로 있다는 점에서 업계 안팎의 이목을 끌었다.

더기반은 종자 육종 및 육성연구 등 농생명업을 영위한다. 출범과 동시에 신성장동력이 될 것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화학회사가 농생명 분야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목이 집중됐다.

노루그룹은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노루홀딩스는 더기반 설립 이듬해인 2016년 아시아태평양 종자협회(APSA) 한국총회 개최를 앞두고 후원금 1억원을 전달한 바 있다.

당시 한 회장은 “성공적인 개최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겠다”며 “더기반도 국내외 종자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룹 차원서 더기반을 지원하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실어준 셈이다.


노루그룹은 더기반을 장기적 관점서 이끌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규설 전 더기반 대표이사는 2016년 <한국농업신문>과의 인터뷰서 “한국서 지금 종자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종자는 어느 외국기업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라며 종자사업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단기간 승부를 보기 위해 농업에 진출하지 않았다”며 “노루는 70년간 화학 분야에만 집중했고, 농업을 미래 성장산업으로 생각해 다시 30년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당장의 실적에 좌고우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되지만 성적표만 놓고 봤을 때 더기반 실적은 초라하다. 2017∼2019년 회사 매출액은 13억원, 33억원, 71억원으로 수직상승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3년 연속 적자로 영업손실은 66억원, 78억원, 48억원으로 꾸준히 마이너스다. 순손실 역시 62억원, 86억원, 65억원 등에 그쳤다.

노루홀딩스와 경영진은 유상증자 방식으로 매년 더기반을 지원했다. 노루홀딩스는 지난해까지 유상증자를 통해 더기반에는 3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했다. 더기반은 이에 보답하듯 2018년 태국 현지에 법인을 설립하며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노루그룹은 더기반 외에도 ‘기반테크’라는 회사를 함께 키우고 있다. 기반테크 역시 농생명 분야서 뛰고 있다.

장남 회사
실적 부진

기반테크는 ‘노루기반’의 전신이다. 종자개발과 농산물, 농자재까지 유통·가공·판매한다. 그 외에 온실 설계 시공이나 첨단온실 IoT시스템 등을 다루기도 한다. 노루그룹은 기반테크가 실시한 유상증자에 참여, 20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입한 바 있다.

기반테크는 2014년, 더기반은 2015년 설립됐다. 노루홀딩스는 더기반과 기반테크가 설립되자 지분을 매입하며 종속회사로 편입시켰다. 그만큼 그룹 차원서 상당한 자금이 투입됐다. 신사업이 안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는 분석이다.
 

다만 두 법인이 현재까지는 노루그룹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룹 지주사 노루홀딩스는 계열사를 모두 종속회사로 뒀다. 즉, 모든 계열사 실적이 노루홀딩스에 반영된다는 분석이다.

눈길이 가는 건 노루홀딩스 실적 감소세가 가파르다는 것이다. 반면 그룹 전체 실적을 좌지우지하는 노루페인트는 크게 떨어지거나 뒤지지 않는다. 그룹 내 몇몇 계열사서 노루홀딩스 실적을 끌어 내릴 만한 부진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노루홀딩스는 지난 2014년 연결 기준 영업이익 337억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15년 더기반과 기반테크가 종속회사로 편입되면서 노루홀딩스 영업이익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노루홀딩스 영업이익은 272억원, 227억원, 172억원, 102억원으로 크게 줄었다.

오너 3세 그룹 지원 받아 신사업
계속되는 마이너스 흑자는 언제?

그룹 주력 매출처인 노루페인트 영업이익은 오히려 노루홀딩스를 뛰어넘었다. 같은 기간 노루페인트 영업이익은 306억원, 311억원, 277억원, 226억원, 291억원 등이었다.

같은 기간 더기반과 기반테크 순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기반의 경우 -3억원, -34억원, -65억원, -86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기반테크도 -13억원, -24억원, -46억원, -100억원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한 전무가 대표이사로 있는 더기반의 지난해 부채비율은 392%에 달한다. 또 금융기관으로부터 시설 및 운영자금 대출 명목으로 지난해 기준 300억원이 넘는 차입금이 존재한다.

더기반은 오너 3세 한 전무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로 그룹서 결정한 신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회사 운영과 실적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전망이다.

더기반은 지난 2016년 경기도 안성에 농생명연구 연구단지를 설립해 둥지를 틀었다. 당시 연구단지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맞춤형 종자가 개발될 것이란 기대를 모았다.
 

▲ 더기반 안성 연구단지 ⓒ노루

더기반은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더기반 육종&생명공학연구소’도 두고 있다. 세부적으로 육종연구소 7개팀, 생명공학센터 4개팀, 연구기획 및 지원 1개팀으로 구성돼있으며 인원은 모두 60명이다.

최근 3년간 더기반 연구개발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15억원, 46억원, 56억원 등으로 늘었다. 연구개발비 대비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중 처음 100% 아래로 내려왔다. 지난 2017년과 2018년은 각각 109.8%, 141.6%였다.

투자는 계속
실적 언제쯤?

노루그룹에선 더기반을 포함해 총 9개 계열사가 농생명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각 계열사들은 종자연구를 포함해 야채, 과일, 화훼 등을 생산·유통·판매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보통신기술 서비스업과 농업 관련 장비 개발 등을 담당한다.

신사업부문 전체 실적은 호전세를 보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노루홀딩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농생명부문은 지난해 대비 외부수익과 영업이익이 나란히 늘었다. 외부수익은 5억8300만원, 영업이익은 78억원 정도 증가했다. 구조조정과 사업구도 재편에 따른 사업안정화 결과로 분석된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노루 오너 3세 이사회 출석률

한원석 전무는 노루홀딩스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사회 출석률은 임원들의 성실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진다.

지난해 한 전무의 이사회 출석률은 겨우 절반을 넘은 56%였다. 이사회 임원 가운데 가장 낮은 출석률이었다.

아버지인 한 회장이 기록한 70% 출석률보다 낮은 수치다. 지난해 노루홀딩스 사내·사외이사 평균 출석률 79%이었다. 한 전무는 노루홀딩스 2대주주다.

물론 한 전무는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더기반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다만 한 전무가 불참할 당시 상정된 안건들은 신성장동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 전무가 대표이사로 있는 더기반과 관련된 안건들도 꽤 있었다.

지난해 한 전무는 ▲더기반 일반대출 지급보증 제공 ▲기반테크 유상증자 ▲더기반 일반자금대출 연대보증 제공기간 연장 ▲더기반 운전자금대출 2건 지급보증 제공 등이 안건으로 올라왔을 때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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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