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혈액백 스캔들’ 막전막후

목 좋은 자리 딴 나라 주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녹십자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혈액백 담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제재를 받았지만 효력 정지 가처분이 인용됐다. 다만 처분 취소 소송서 패소한다면 2년간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 사업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녹십자 혈액백 사업은 매각될 예정이다. 빈자리는 누가 대신하게 될까.
 

▲ 녹십자`

혈액백은 말 그대로 혈액을 담는 용기다. 둥그스름한 사각형 모양으로 혈액을 저장한다. 혈액사업서 혈액백은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 혈액백에 혈액이 저장돼야 비로소 전국 수요처로 이송될 수 있다.

혈액 사업
유통 핵심

혈액백 수요의 대부분은 헌혈기관서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와 한마음혈액원이다. 특히 적십자사는 국내 혈액공급 90%를 도맡는다. 적십자사는 혈액백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입찰공고를 낸다. 압도적 경쟁력을 보인 곳이 있는데 바로 녹십자그룹이다.

녹십자그룹은 혈액백을 적십자사 등에 사실상 ‘독점 공급’했다. 낙찰점유율은 적십자사 70%, 한마음혈액원 100%에 달한다. 그룹 내 혈액백 담당 계열사는 ‘녹십자엠에스’다. 녹십자엠에스는 국내시장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한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녹십자엠에스 자체 분석 결과 지난 5년간(2014∼2018) 점유율은 평균 72% 정도다.

같은 기간 혈액백 매출은 172억원, 211억원, 206억원, 204억원, 244억원이었다. 녹십자엠에스 전체 매출서 20%대다. 많게는 30%까지 차지할 때도 있었다.


별 탈 없이 지속되던 녹십자 혈액백 사업은 ‘입찰 단가 담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지난해 7월 녹십자엠에스에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을 단행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녹십자엠에스는 태창산업과 2011년, 2013년, 2015년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서 예정 수량을 7대3으로 나눴다. 투찰 가격도 합의했다. 두 회사는 사전 합의대로 각각 70%, 30% 물량을 투찰했다. 이들은 모두 낙찰자가 됐다. 계약 금액만 모두 443억원이었다. 투찰률은 모두 99% 이상이었다.

공정위는 담합 배경을 ‘낙찰자 선정 방식 변경’으로 봤다. 당시 낙찰자 선정 방식은 ‘최저가 입찰제’서 ‘희망수량 입찰제’로 변경됐다. 최저가 입찰제는 1개 업체 100% 납품이다. 반면 희망수량 입찰제는 최저가 입찰자부터 희망 예정 수량을 공급하고, 후순위자가 나머지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결국 전체 물량을 담당하지 못하더라도 가격을 낮춘다면 원하는 물량을 낙찰 받을 수 있는 구조다.

공정위는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이 가격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담합을 이뤘다고 봤다. 녹십자엠에스는 시정명령과 과징금 58억200만원을 부과 받았다. 녹십자엠에스와 소속 직원 1명은 검찰에 고발당했다.

녹십자엠에스 담합 의혹 사실로
패소하면 2년 동안 참여 불가

공정위는 이를 ‘악성담합’으로 봤다. 공정위는 “국민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혈액백 구매 입찰에 장기간 진행된 담합 행위를 제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대다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헌혈 과정에 필요한 용기를 통해 취한 부당이익을 환수했다”고 평가했다.


설상가상으로 녹십자엠에스는 적십자사로부터 ‘부정당 업자 제재 처분’을 받았다. 부정당 업자 제재란 입찰담합 등 부정행위가 드러난 업체에 불이익을 주는 조치다.

제재 결과 적십자사와 거래가 중단됐다. 녹십자엠에스는 그달 10일 ‘거래처와 거래중단’을 고시했다. 제재 기간은 2022년 1월20일까지로 2년 동안 혈액백 사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됐다. 녹십자엠에스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처분 취소 민사소송’ 카드를 꺼내들었다.

녹십자엠에스는 지난달 13일 공시를 통해 가처분 신청이 인용됐다며 민사소송 선고 전까지 입찰 자격을 임시로 부여받았다고 전했다. 승소 시 사업 재개 가능성이 점쳐지지만 패소할 경우 2년간 사업이 불가능하다. 공고했던 혈액백 선두주자 자리가 위태로운 모양새다.

같은 날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사업 부문 분할을 예고했다. 사실상 혈액백 사업을 그만두겠다는 해석이다.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부문만 따로 떼서 전문회사를 설립할 방침이다. 신설 회사명은 ‘녹십자혈액백’이다.

녹십자엠에스는 이를 전부 매각할 예정이다. 매각이 어려울 경우 신설 회사 지분 100%를 보유할 계획이다. 녹십자엠에스 아래 자회사를 두는 방식으로 분석된다.

분할 명분은 ‘전문성 제고’와 ‘경영 효율화’다. 실제로 녹십자엠에스는 2018년에 이어 지난해에 적자를 기록했다. 2018년 녹십자엠에스 매출액과 영업손실, 당기순손실은 차례로 863억원, -59억원, -112억원이었다.

담합 적발
2년 정지

지난해 매출액은 8.99% 상승한 940억원이었다. 영업이익도 24.93% 상승했지만 -44억원에 그쳤다. 당기순손실은 오히려 큰 폭으로 늘었다. 무려 45.61% 감소한 -163억원이었다.

혈액백 사업에 제동이 걸린 가운데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이 부각된 만큼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녹십자엠에스 혈액백 사업 분할 예정일은 오는 5월1일로 해당 안건은 주주총회서 통과 여부가 갈릴 예정이다. 주총은 이번달 24일 열린다.

안건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통과될 전망이다. 녹십자엠에스 최대주주는 ㈜녹십자로 특수관계인과 자기 지분 합은 63.24%다.

녹십자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처분 취소)소송에 대한 선고 전까지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 참여 자격이 있다”며 “혈액백 사업부가 녹십자엠에스서 벗어난다면 혈액백 입찰에 변화가 발생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녹십자엠에스가 사업권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입찰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녹십자엠에스가 직격탄을 받은 사이 약진이 관측되는 업체가 있다. 독일계 다국적 기업인 ‘프레지니우스카비’로 글로벌 헬스케어 회사 프레지니우스 자회사다. 현재 100여개 나라에 혈액백을 공급한다.
 

▲ 혈액백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혈액백 세계시장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지난해 3분기 녹십자엠에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혈액백 및 관련기기’ 상위 업체 중 프레지니우스카비가 이름을 올렸다. 프레지니우스카비는 북미·유럽·아시아 지역서 1위를 기록했다. 매출액만 12억3600만달러. 한화로 1조5000억원에 가깝다.

프레지니우스카비는 국내에 2개 법인을 뒀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와 프레제니우스메디칼케어다. 이 중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가 혈액백 사업을 진행 중이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의료기기와 수액제, 자가수혈 및 임상영양에 전문 치료제를 제공한다. 법인은 지난 2009년 설립됐다.

다국적 기업
시장에 입성?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2017년 말 국내 혈액백 시장 진출을 밝혔다. 당시 박주호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대표는 “국내 제품으로만 공급하던 혈액백 사업에 다국적 기업이 참가해 우수한 품질과 유사 시 안정적 공급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2012년부터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에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장벽에 가로막혔다. 입찰 조건 때문이었다.

적십자사는 지난 2013년 4월 입찰공고에 ‘국내 직접 제조가 가능한 자’라는 조건을 신설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혈액백을 해외서 제조했다. 2018년 ‘국내 직접 제조’라는 제한이 풀리면서 문이 열렸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그 해 4월, 160억원 규모의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에 도전했다.


하지만 포도량 미달로 고배를 마셨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측은 즉각 반발했다. 이미 100여개 국가서 자사 혈액백을 사용하고 있고,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입찰 최종 낙찰자는 녹십자엠에스였다.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이중·삼중·사중백 5개 품목서 모두 낙찰자로 선정됐다.

시민단체 역시 성명을 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적십자사가 입찰공고와 다르게 자의적 기준을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내 학계와 해외 혈액백 사용국 대부분은 포도당과 분리된 과당 전체량을 합산한다”며 “유독 적십자사는 과당을 불순물로 보고 제외해 전체 포도당 함량이 미달된다며 탈락시켰다”고 강조했다.

약 6개월 뒤 열린 국회 국정감사서도 입찰 관련 지적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적십자사 국감서 “혈액백 입찰을 둘러싼 적십자와 녹십자 관계는 동맹을 넘은 담합관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 박경서 적십자 회장 ⓒ적십자사

신 의원은 “입찰 공고 때마다 입찰 조건이 자꾸 변동된다”며 “결국 녹십자엠에스 등 국내기업만 낙찰됐다”고 밝혔다. 당시 신 의원은 적십자사 감사실이 작성한 ‘혈액관리본부 혈액백 구매계약 관련 민원 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설명했다.

지난 2012년 적십자사는 입찰자격에 ‘3년간 연 13만 유니트 이상 납품 실적’ 요건을 추가하려고 했다. 당시 국내 혈액백 대부분이 녹십자엠에스서 비롯된 점을 미뤄봤을 때, 신규업체는 진입하기 어려웠다.

회사는 아예 사업 매각 예정
칠전팔기 해외기업 기회 얻나

다만 적십자사 감사실은 그해 12월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해당 요건은 삭제됐다. ‘국내 제조시설 생산’이라는 요건도 지난 2013년 추가됐는데 결국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국내 혈액백 시장서 철저히 배제된 셈이다.

당시 박경서 적십자사 회장은 “전혀 죄가 없다고 해도 질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투명성 강화 방안 보고를 요청했고, 박 회장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지난해 5월 혈액백 낙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적십자사는 혈액백 이중·사중백 긴급 공고를 게재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최종 낙찰자가 됐다. 당시 경쟁자는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이었으며 낙찰금액은 45억원가량이었다.

일각에선 녹십자엠에스 혈액백 사업 전망이 흐릿해지면서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것으로 예측한다. 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측은 <일요시사>에 “올해 계약 일정에 맞춰 입찰을 통한 혈액백 공동구매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프레지니우스카비가 입찰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앞서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모기업 프레지니우스 슈테판 슈투름 회장은 지난 2018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서 혈액백 사업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슈투름 회장은 적십자사 등 혈액백 입찰 참여에 대해 “프레지니우스가 한국 시장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생각한다”며 “프레지니우스 포트폴리오 중 한국서 선보이는 제품 수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제품도 한국서 출시할 예정이다. 한국 소비자를 위해 어떤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적절한지 살펴보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프레지니우스 제품은 경쟁품 대비 적절한 가격에 선보일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고, 제품과 서비스는 품질 측면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며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낙찰 경험
언제 시작?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매년 흑자를 내고 있지만 실적은 하락세다. 2016∼2018년 회사 매출은 655억원, 649억원, 640억원 순이다. 영업이익은 59억원, 46억원, 23억원으로 감소했다. 당기순이익 역시 32억원, 18억원, 5억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률은 9.0%, 7.1%, 3.6% 이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지난해 5월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서 낙찰자로 선정돼 그해 8월부터 혈액백을 공급하고 있다”며 “올해 역시 적십자사 혈액백 수급 계획에 따라 입찰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적십자사 회장의 읍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혈액 수급난으로 적십자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달 4일, 박경서 적십자사 회장은 호소문을 통해 “전 국민 헌혈과 혈액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적십자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에 대응해 등록헌혈자 헌혈 참여 요청, 약정단체 헌혈 확대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혈액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 회장은 “개인 헌혈자 수가 지난해 보다 2만명 이상 감소했고, 2월2일까지 헌혈 예정이었던 145개 단체가 헌혈을 취소했다”며 어려움을 전했다. 이어 “대한적십자사는 체온 측정, 마스크 착용 등 직원 개인위생을 강화했고, 헌혈의집과 헌혈버스에 대한 소독 작업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헌혈 동참을 독려했다.

지난 1월 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장도 비슷한 내용의 헌혈 참여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다. 상황이 당장 급반전을 보일 가능성은 적지만 헌혈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시의회 의원과 직원 30여명은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했다. 같은 날 해군작전사령부는 사흘간 헌혈 운동에 동참했다. 장병, 군무원 등 참가 인원만 430명이었다.

같은 달 26일에는 동아오츠카 임직원들이 본사 앞 헌혈버스서 헌혈 릴레이를 이어갔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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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신흥시장 라오스는 지금···

범죄 신흥시장 라오스는 지금···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라오스가 동남아의 마지막 프런티어이자 신흥 투자처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국제 범죄자들의 주요 거점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수력발전과 광물, 인프라 개발을 앞세운 투자시장이 활발하게 성장하는 반면, 불법 콜센터를 중심으로 한 사이버 범죄 산업도 동시에 팽창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 투자와 범죄가 교차하는 이 구조는 라오스를 단순한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국제 금융·사이버 범죄의 회색지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최근까지 라오스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과거 한국이나 중국에서 인식해 온 단순 전화 사기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대거 이동 범죄 온상 라오스 스스로도 더 이상 ‘내륙 봉쇄국’이 아니라 ‘육상 연결국’을 자임하며 철도와 도로, 에너지, 도시 인프라를 국가 도약의 기반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밝은 전면 뒤에는 국제 범죄도시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지고 있다. 투자시장과 범죄 산업이 동시에 팽창하는 이중 구조다. 라오스에서 발생하는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투자사기는 전화와 메신저, SNS를 결합한 다층적 구조가 정착됐다. 가짜 투자 플랫폼과 암호화폐, 외환(FX) 거래를 미끼로 한 고도화된 금융사기가 핵심 수법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범죄는 국경 지대와 특별경제구역을 거점으로 운영된다. 미얀마·태국과 맞닿은 북부지역 경제특구 일대는 외국 자본과 외국 인력이 밀집한 구조를 악용하기 쉬운 환경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겉으로는 카지노나 리조트, 개발사업사무소로 위장하지만, 내부에서는 각국 언어를 담당하는 인력이 분업 형태로 사기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발송한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내 대규모 범죄조직들이 현지 단속을 피해 라오스 등 인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황도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지난 10월19일 양기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라오스에 체류 중인 한국인 민간봉사단체 관계자는 국제 통화에서 “라오스 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캄보디아 범죄조직의 라오스 이동 가능성을 물었지만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들었다”고 전했다. 교민사회에서는 태국발 마약 범죄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캄보디아발 범죄조직까지 유입되면 감당이 어렵다며, 한국 정부가 후임 대사를 조속히 임명하고 경찰·영사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이 범죄들이 ‘라오스 현지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피해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 전역, 유럽과 북미까지 확산돼있다. 라오스는 범죄가 실행되는 물리적 공간일 뿐, 자금은 국제 금융망과 가상자산을 통해 순식간에 국경을 넘는다. 캄 ‘프린스그룹’ 라 ‘킹스 로만스’ 해외투자 뒤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보이스피싱 조직은 가짜 투자 수익 인증 화면과 조작된 거래 내역을 제시해 신뢰를 쌓고, 일정 금액 이상이 입금되면 추가 투자나 긴급 송금을 요구한 뒤 출금을 차단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반복한다. 일부 사례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라오스 광산 개발, 에너지 프로젝트, 부동산 사업을 사기 시나리오에 끼워 넣어 ‘현지 실물 투자’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범죄 구조가 인신매매와 강제노동과 결합돼있다는 점이다. 고수익 IT·마케팅 일자리를 제안받고 라오스로 입국한 외국인들이 여권을 압수당한 채 콜센터에 감금돼 사기를 강요받는 사례가 국제 언론과 인권단체 보고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폭행과 협박이 뒤따르고, 탈출을 시도하면 몸값을 요구받는 구조도 확인됐다. 이는 단순 금융사기를 넘어 국제적 인권 범죄이자 조직범죄로 분류되는 이유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일대에 밀집했던 대형 범죄단지가 해체되며 조직이 점조직 형태로 흩어지고 있다는 점도 불안 요인이다.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현지 단속 이후 웬치로 불리는 범죄단지 상당수가 텅 비었고, 이들 조직원 상당수가 라오스와 태국, 미얀마 접경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골든 트라이앵글’은 과거 세계적인 마약 생산지였지만, 최근에는 다국적 피싱 사기의 온상지로 탈바꿈했다. 울창한 산림 지역에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 장비를 설치해 전 세계를 상대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라오스 북부 보케오 지역에는 ‘범죄단지’를 넘어선 ‘범죄마을’도 존재한다. 중국 카지노 그룹 킹스 로만스가 99년간 임차해 카지노와 호텔을 운영하는 이 지역은 사실상 외부 접근이 차단된 치외법권에 가깝다. 불법도박과 마약 밀매, 스캠 사기, 암호화폐 자금세탁이 복합적으로 이뤄진다는 의혹이 제기돼왔고, 미국은 이미 2018년부터 킹스 로만스를 초국가범죄 기업으로 지정해 제재하고 있다. 캄보디아에 프린스그룹이 있다면, 라오스에는 킹스 로만스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경 넘는 나쁜 놈들 마약 범죄 역시 라오스의 또 다른 어두운 단면이다. 최근 라오스 공항에서 마약을 소지한 채 출국을 시도하다 적발되는 한국인이 급증했다. 비엔티안과 지방 공항에서 잇따라 체포된 사례들은 대부분 헤로인과 케타민, 필로폰 등 대량의 마약을 포함하고 있다. 라오스 형법은 마약 범죄에 극히 강경하다.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사형이나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고, 미수나 공범 역시 동일하게 처벌된다. 실제로 2019~2020년 비엔티안 공항에서 필로폰을 소지하다 적발된 한국인 2명은 현재까지도 장기 복역 중이다.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이 “타인으로부터 물건을 위탁받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하는 배경이다. 라오스 정부 역시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불법 콜센터 단속과 외국인 범죄자 검거, 장비 압수와 추방 조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단속이 강화될수록 범죄조직이 인접 국가로 이동하는 ‘풍선효과’는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취약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범죄의 위치만 바뀔 뿐 산업 자체는 유지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범죄 환경은 라오스 투자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다. 라오스는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 요소를 갖춘 국가다. 수력발전과 광물, 재생에너지, 일부 농업·임산물 가공 분야는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행정 절차의 불투명성, 계약 집행의 불확실성, 외환 규제와 금융 접근성 문제는 오래된 리스크다. 여기에 사이버 범죄가 결합되면서 정상 프로젝트와 사기성 프로젝트의 경계는 더욱 흐려지고 있다. ‘정부 승인’ ‘양허권 보유’ ‘현지 고위 인맥’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공식 검증 없이는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동남아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 라오스의 개발 모델 역시 기회와 위험이 교차한다. 인프라를 외부 차관과 ODA로 먼저 구축하고 성장을 통해 상환하는 구조는 철도와 도로, 병원, 상수도 같은 가시적 성과를 냈다. 그러나 정부 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60% 후반으로 추정되고, 낍(KIP)화 약세는 상환 부담을 키우고 있다. 빚으로 지은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산이 아니라 부담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경고다. 현장에서는 인프라가 완공돼도 운영 시스템과 인력, 수요가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다만, 한국 정부는 ‘메콩강 내륙국’으로 외교적 지평을 넓히기 위한 포석으로 라오스를 지목했다. 해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 개발 속도가 더딘 메콩강 유역 내륙국 시장을 선점해 경제협력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 마지막 정상회담 대상국으로 라오스를 선택한 이유다. 이 대통령은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했다. 이날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라오스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것은 12년 만이다. 라오스는 대표적인 메콩강 유역의 내륙 국가로 꼽힌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젖줄인 메콩강은 중국 칭하이성에서 발원해 윈난성과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흐른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에 이어 '3대 교역국'으로 꼽히는 베트남을 비롯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의 해양국과 활발한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해온 반면 라오스와 미얀마, 캄보디아 등 메콩강 유역 내륙국과 비교적 교류가 적었다. 조원득 국립외교원 아세안인도연구센터장은 “(한국의) 경제협력이나 투자는 베트남 등에 집중됐고 동남아의 내륙 국가에 대한 실질적인 투자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최근 몇 년간 (한국이) 한미일 외교에 집중하다 보니 (내륙국에 대한) 정치·외교적인 관심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범죄로 얼룩 이면엔 ‘기회의 땅’ 무궁무진 천연 광물과 수력발전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메콩강 유역 국가들은 베트남처럼 경제적으로 한 단계 높은 층위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아닌 국가들로 구분돼있다”며 “메콩강 지역 개발의 최대 수혜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얀마는 군부독재라는 문제가 있고 캄보디아는 온라인 ‘스캠’(사기)으로 대표되는 치안 문제가 있다”며 “한국이 메콩 지역 개발을 위해 손잡고 일할 수 있는 국가는 현재로선 라오스”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해양국들뿐 아니라 내륙국들과 교류·협력 등을 통해 아세안에서 영향력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아세안의 GDP 규모는 약 3조8000억달러(약 5590조원)로 국가로 치면 세계 5위 수준이다. 인구 규모는 6억7000만명으로 세계 3위다. 미중 갈등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불확실성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4강’을 넘어 아세안 등 신흥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약 6개월 만에 G7(주요 7개국), 유엔(UN·국제연합)총회,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해 상생과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며 자유무역 질서 및 다자주의 회복에 힘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통룬 주석과의 확대회담에서 “라오스가 통룬 주석의 리더십 하에 내륙 국가라는 지리적 한계를 새로운 기회로 바꿔 역내 교통·물류의 요충지로 발전한다는 국가 목표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이 과정에서 한국이 든든한 파트너로서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양국 간 호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더욱 확대·발전시켜서 양국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수익 보장? 의심부터 결국 라오스의 투자시장과 보이스피싱 범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적 공백과 국경 지대의 느슨한 관리, 외국 자본과 인력 유입이 만들어낸 회색지대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자라난 두 개의 얼굴이다. 라오스는 여전히 기회의 땅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이제 철저한 검증과 리스크 관리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 됐다.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투자 제안일수록, ‘이미 현지에서 잘 돌아가고 있다’는 말일수록 냉정하게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 라오스 투자시장의 성장과 국제 범죄 산업의 확산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구조가 낳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결과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