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부안현에 숨어있는 보물이 계량이 말고 또 있다는 말인가.”
“너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니.”
“하찮은 소녀를 두고…….”“허 허, 그럼 지금 계량은 나를 하찮은 놈으로 간주하는 게 아닌가.”
“무슨 말씀을!”
웃음꽃 만발
계량의 동그랗게 뜬 눈에서 마치 눈물이 흘러내릴 듯 반짝였다.
“그렇지 않고. 모름지기 유유상종이라 했거늘, 그럼 내가 하찮기 때문에 우리 계량이 하찮은 사람이 아니냐 이 말이야.”
동그랗게 뜬 눈이 다시 한쪽으로 살짝 기울면서 계량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으리, 너무 하시옵니다.”
말을 마친 계량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유희경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유희경도 주위로 시선을 한번 주더니 못이기는 척하며 계량의 손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어린 계집아이가 마치 보지 못할 것을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계량이 그 정도로 칭찬하는 모습을 보니 내 궁금해서 견딜 수 없군. 그런데 아무러면 우리 계량이 만큼 하려고.”
아버지뻘 되는 유희경의 웃음이 능글맞으면서도 그 얼굴에는 순진한 천연덕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괜스레 그 모습을 보시고 저를 잊어버리시면 아니 될 일이옵니다.”
“계량을 잊어버린다고. 허 허, 이거 서화담 선생과 황진이 그리고 박연폭포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그 직소폭포에서 또 다른 서화담과 황진이가 될 수 있다 이 말인고.”
계량이 대답 대신 유희경의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을 유희경의 겨드랑이로 올려 그곳을 휘감았다. 두 몸의 한쪽이 흡사 접착제로 달라붙어있는 듯이 보였다.
“어험.”
유희경이 급작스러운 계량의 행동이 어색해서 막상 헛기침을 내뱉었지만 그것이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계량의 터질 듯한 가슴이 주는 신선한 자극에 오히려 은근히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유희경의 고개가 계량에게 돌려졌다.
코를 계량의 머리카락에 대보았다.
코끝을 스치는 계량의 머리카락에서 묘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좀 더 코를 머리카락에 밀착시켰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 냄새의 진원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심사 같아 보였다.
비단 계량의 몸에 발라졌을 향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향내를 뚫고서 드러나는 묘한 기운이 유희경의 오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무슨 냄새가 나는지요.”
유희경이 즉답을 피하고 한 번 더 계량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글쎄 딱히 무슨 냄새라 말하기는 힘들고…….”
계량이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가는 유희경을 잡은 팔을 놓았다.
그리고는 저만치 앞서 나가더니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으로 다가갔다.
계량이 조그마한 손으로 꽃을 소중하게 감싸고 유희경이 했던 마냥 코를 그곳에 가까이 댔다가는 마치 음미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하게 그 냄새를 맡겠다는 듯이 그 행위를 반복했다.
다가선 유희경이 지그시 계량의 행위, 아니 방금 전 자신의 행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리,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유희경과 계량 직소폭포서 행복한 시간
꽃 찾아든 나비처럼…사람 사이의 향기
유희경으로서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의 의미, 꽃의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함의 의미를 알아챈 계량 역시 자신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 꽃은 바로 산국이에요. 산국.”
말을 마친 계량이 자리를 옮겨 역시 다른 꽃을 손에 감쌌다.
“이 꽃은…….”
유희경이 역시 미소만 보내고 있다.
“이 꽃은 애기똥풀이구요.”
꽃의 이름을 말하고는 계량이 다시 자리를 옮겨서 다른 꽃으로 이동했다.
흡사 나비가 꽃을 찾아 자리를 옮기듯이, 이 꽃 저 꽃으로 꽃의 이름을 물었다가는 자신이 답을 하면서 옮겨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희경에게 갑자기 묘한 생각이 찾아들었다.
그리도 많은 모든 식물들이 거의 꽃을 피우고 그 꽃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신기했다.
꽃을 만지며 자신을 바라보는 계량에게 다가섰다.
“그 꽃의 이름은 무엇인고.”
계량이 대답하지 않고 코를 그곳에 밀착시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그 꽃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겠다는 듯이.
유희경도 가만히 계량의 옆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자신의 얼굴을 꽃의 향기에 도취되어 있는 계량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계량이 맡고 있는 꽃 내음인지 계량의 내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파고 가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희경의 손이 저절로 계량의 가녀린 어깨를 감쌌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던 계량의 몸이 순간 유희경에게 기울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가 싶더니 서로의 입을 찾아 포개고 있었다.
유희경의 다른 한손이 계량의 허리를 휘감았다.
서로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완전히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서 꼴깍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희경이 계량의 허리를 휘감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 상태에서 잠시 전 행동의 긴 여운을 음미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곁에 한 송이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계량이.”
“네, 나으리.”
“내가 말이야…….”
유희경이 말을 잇지 못하자 그윽한 시선으로 유희경을 바라보던 계량이 다시 밀착해 들어왔다.
묘한 일이었다.
마치 계량의 몸에 접착제가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착착 휘감겨 오는 그 몸을 느낄 때마다 묘하디 묘한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나으리.”
“내가 말이야, 꽃이 꽃인 걸 이제야 느끼고 있어.”
“네?”
“이전에는 꽃을 봐도 그저 꽃이려니 하고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꽃이 왜 아름다운지 그리고 거의 모든 식물들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전에는 느끼지 못하셨나요?”
“부끄럽지만 이전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어.”
계량이 피식하며 유희경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면 지금의 마님은 어쩌구요.”
“글쎄, 지금 내 부인을 두고 이렇다 이야기하기는 곤란하지만 남녀 간의 사이에도 이런 냄새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야.”
“그것이 왜 그런데요.”
“그래서 계량에게 답을 구하려 하는 거 아닌가.”
떨어졌던 계량이 다시 밀착해 오자 양팔이 저절로 계량의 어깨를 휘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인 모양이구나. 지금까지의 나를 벗어던지게 만든 원인이 바로 이 냄새 때문인 듯해.”
사랑의 실체
계량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유희경에게 기울였다.
“그렇지 바로 이것이 사랑이라는 요상한 실체야.”
계량을 두른 팔에 힘을 넣었다. 그러자 흡사 자신을 벗어나서 온 세상을 품은 듯이 포만감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리, 저 역시도 그렇…….”
계량이 미처 말을 맺지 못했다.
유희경이 꽃을 찾아든 나비처럼 계량의 입을 그리고 온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