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 본선 진출 쾌거 홍명보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

  • 정혜경 jhk@ilyosisa.co.kr
  • 등록 2012.03.20 10: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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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새로운 전설 써내려가는 ‘영원한 리베로’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지난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한국과 카타르의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최종경기가 0-0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골 장면은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축구팬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없다. 우리 대표팀은 이미 지난달 22일 열린 런던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A조 5차전에서 오만을 3-0으로 완파하며 조 1위를 확정해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아시아 국가로는 사상 최초다. 이처럼 우리 대표팀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  배경엔 홍명보 감독이 있다.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에서 명지도자로 거듭난 홍 감독이 걸어온 길을 재조명해봤다.

어린 시절 작은 체구로 감독 요구 부응 못 해 스트레스
볼 컨트롤로 체격 극복하고 탄탄한 기본기 쌓아 주목

홍명보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여동생만 둘인 집안의 외아들이어서 축구에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로서는 하나 뿐인 아들이 축구보다는 공부를 해 집안을 꾸려 나가길 바랐던 게 너무나 당연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홍 감독은 결국 축구를 선택했다.

부모님 반대에도
결국 축구 선택

그러나 축구가 늘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시절 유난히 작은 키가 문제였다. 늘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였다. 이런 신체조건 탓에 감독 선생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홍 감독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경쟁이 덜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키가 여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광희중학교에 입학했다. 감독 선생님이 요구했던 체력과 체격의 수준은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커지고 강해졌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몸집이 큰 선수들과 충돌이라도 하면 튕겨져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부상에 대한 공포감이 언제나 따라다녔다. 홍 감독이 작은 체구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볼 컨트롤’에 있다. 볼 컨트롤이 돼야 그 다음 패스도 할 수 있고 상대 선수들이 접근하기 전에 재빨리 패스를 해 신체 충돌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으로, 이를 통해 홍 감독은 탄탄한 기본기를 쌓게 됐다.


중학교 때까지 평범한 선수였지만 기본기가 잘 준비돼 있었기에 그는 향후 무럭무럭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구명문 동북고에 진학한 뒤 키가 자라면서 덩달아 축구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고교 2년과 3년 연거푸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해 고려대까지 진학했다.

미드필더로서 고교와 대학시절 명성을 날리던 홍 감독에게 중요한 기로가 왔다. 당시 남대식 고려대 감독이 주전 수비수가 졸업해 생긴 빈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대학교 3학년에 포지션을 바꾸는 것은 사실 대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당시에 대해 홍 감독은 “수비수 보직 전환에 불만이 있었지만 팀내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며 “어떻게 하면 수비를 잘 봐야 하는지 그때부터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돌이켰다. 공격 중심의 축구에서 수비로 포지션이 바뀌자 축구 전체를 보는 시각이 더 넓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비수로 활동하던 대학 4학년, 1990년은 홍 감독이 처음 태극마크를 달던 해였다. 그 해 2월4일 노르웨이 친선경기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말까지 13년간 그가 뛴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는 135차례로 아직도 역대 최다기록이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강을 이룩한 뒤,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상대 공격의 ‘맥’을 읽고 차단해내는 판단력과 지능적인 플레이가 압권이었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수비라인 및 팀 전체를 통솔하는 리더십이야말로 10년 넘게 홍명보를 ‘한국대표팀 부동의 수비수’로 존재하게 만든 근원이었다.

그라운드 전체를 꿰뚫는 폭넓은 시야와 전방으로 연결하는 날카로운 패스, 노련한 경기운영능력과 적절한 위치선정은 홍 감독에게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라는 호칭을 안겨줬다. 즉, 실상 가장 공격적인 수비수이면서 가장 수비적인 공격수, ‘리베로’의 전형이었다.

홍 감독은 프로선수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던 1992년엔 이회택 감독의 지휘아래 팀 우승에 기여해 신인으로는 K리그 최초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히며 화려한 출발을 했다.


축구 외에 언어·문화
배우러 일본·미국행

1994~1996년 3년 연속 K리그 베스트11에 뽑힐 정도로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쳤고, 일본프로축구에서 포항으로 복귀한 2002년에도 역시 베스트11에 선정됐다. 국가대표와 프로축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그의 명성은 국내외에 널리 퍼져나갔다.

국내 프로축구 활동 5년 만인 1997년에는 일본프로축구로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홍 감독은 모든 것이 권태로워지기 시작한 때였다. 목표의식도 사라졌다. 그 탈출구로 홍 감독은 일본행을 선택했다. 처음엔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로 옮겨 활약하다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그 해 J리그컵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진출 초기엔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 진출했던 1997년 일본프로축구엔 한국 선수가 2명밖에 없었다. 또 국내에서 정상급으로 뛰던 선수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컸다. 조언을 해줄 사람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기에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데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우로 변해갔다. 선진화된 일본축구를 배우고, 나름대로 성숙한 일본사회의 문화적인 영향도 받았다. 당시에 대해 홍 감독은 “한국처럼 녹초가 되도록 뛰지 않아도 되는, 어느 포지션에서든 협력플레이가 잘 되는 일본축구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선수와 지도자 간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또 은연중에 일본을 무시하는 생각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물론 프로선수,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삶
아시아 국가 최초로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 대기록

이후 홍 감독은 2002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로 잠시 복귀했다가 2003년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했다. LA갤럭시로 진출한 것은 축구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배움의 욕구가 컸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 홍 감독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운동선수, 기부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체험도 했다. 홍 감독은 이런 외국의 경험에 힘입어 역대 한국인 코치로서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와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을 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홍 감독은 2004년 10월8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선수로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부터 A대표팀과 올림픽팀 코치를 거쳐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어 2009년부터는 청소년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아 본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하지만 홍 감독의 데뷔를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들도 많았다. 그러나 2009년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작성하며 이런 시선은 불식됐다. 이후 홍 감독은 올림픽팀 감독을 맡아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거머쥐는 등 지도자로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홍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은 지난달 2월22일 새벽 끝난 2012 올림픽 축구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 오만과의 원정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두면서 남은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각조 1위에게 주어지는 본선행 티켓을 잡았다.

이에 따라 우리 대표팀은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아시아 국가로는 사상 최초다. 지난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한국과 카타르의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최종경기가 0-0 무승부로 막을 내렸음에도 축구팬들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한 이유다.

홍 감독의 목표는
올림픽 메달 획득

그러나 정작 한국 축구가 올림픽 본선에서 그동안 거둔 성적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1948년, 2004년 대회에서 8강 진출에 성공한 것이 역대 최고성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별리그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박주영, 이근호, 기성용, 이청용 등 최고의 멤버들이 나섰던 4년 전 2008년 베이징대회에서도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지금 홍 감독의 목표는 명확하다. 올림픽 메달의 숙원이다. 축구팬들과 관계자들의 바람 역시 마찬가지다. 넘지 못했던 올림픽의 벽을 무너뜨려달라는 것이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슬슬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홍명보라는 존재의 힘은 그렇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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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진법사·노상원 연결고리 추적

건진법사·노상원 연결고리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정부는 여러 비선 실세가 있었다. ‘V0’ 김건희씨의 최측근인 건진법사 전성배씨, 군 인사를 좌지우지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 이들에게는 ‘무속’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씨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위기일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건진법사 전성배씨와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 등이 서로 일면식이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명씨와 전씨는 김건희씨 및 윤석열 전 대통령과 직접 만나거나 통화했다. 노 전 사령관만이 김씨와 윤 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알았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 김건희 일가를 잘 아는 이들은 위의 인물들이 각자의 존재를 인지해 왔다고 한다. 윤석열정부 초기부터 이른바 ‘비선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범하자 기웃기웃 윤 전 대통령은 국민의힘 예비후보 시절부터 논란을 달았다. 지난 2021년 TV 토론회 당시 그의 손바닥에서 ‘王’ 자가 세 차례 포착됐다. 이는 김씨의 무속 의혹과 겹치면서 지지율 폭락을 가져왔다. 전씨는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본부에서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월 윤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전씨가 윤 전 대통령의 등에 손을 올리고 사무실을 소개하는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전씨가 ‘고문’으로 네트워크본부의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했다는 의혹과 함께 ‘무속인’이 캠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선거대책본부는 “(전씨는) 고문으로 임명된 바 없다”고 해명한 뒤 네트워크본부를 해산했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전씨의 영향력은 위축되지 않았다. 최근 검찰 수사에선 전씨가 2022년 지방선거 당시 최소 3명의 공천 청탁을 했고, 비슷한 시기 통일교 전 고위간부 윤영호씨가 전씨에게 김씨에게 줄 선물용 목걸이를 전달한 정황 등이 확인됐다. 전씨는 당시 ‘윤핵관’으로 꼽혔던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과 선거 운동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른바 ‘건진법사 게이트’를 수사한 서울남부지검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부장검사 박건욱)가 확보한 문자 메시지를 보면 2021년 12월 윤 의원은 전씨에게 ‘권성동 의원과 제가 빠지는 게 (윤석열) 후보에게 도움이 될까’라고 묻는다. 전씨는 ‘후보는 끝까지 같이 하길 원하는데 빠진다고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검찰 조사에서 전씨는 “사람들이 제가 힘 있는 줄 안다”며 이런 의혹들을 부인했다. ‘무속인 논란’ 이후 기자 등을 피해 숨어 지냈다고도 했다. 전·노 윤석열 캠프 외곽 그룹서 활동 “정권 초기부터 셌다” 일면식 있었나 검찰 조사에서 한 진술과 달리 전씨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윤 전 대통령 당선 후 더 커졌다. 검찰은 2022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를 전후해 전씨가 받은 경북 영주시장·경북도의원 등의 공천에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취지의 문자들을 확보했다. 또 전씨가 경북 봉화군수·경남 합천군수·경기 성남시장 후보 등과 관련해 윤 의원에게 청탁을 시도한 정황도 파악했다. 청탁을 한 사람 중 일부는 실제로 당선됐다. 전씨는 검찰에 “공천 부탁이 아니라 추천”이라고 답했다. 김건희 특검팀은 최근 전씨 휴대폰을 포렌식하며 ‘건희2’로 저장된 인물과의 대화 내역 일체를 확보해 분석 중이다. 전씨는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22년 4월19일 ‘건희2’로 저장된 번호로 8명의 이름과 근무 희망 부서를 적은 명단을 보냈다. 8명은 대부분 윤 전 대통령 대선캠프 내 ‘네트워크 본부’에서 일했다. 전씨는 “사모님께 말씀드렸다. 꼭 해주시라고 당부했다”는 취지의 문자를 이어 보냈다. 그러자 ‘건희2’로 저장된 인물은 다음 날 전씨에게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답했다. 김씨 측은 전씨가 ‘건희2’로 저장한 번호의 실제 사용자는 김씨의 ‘문고리 3인방’으로 꼽히는 정지원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다. 특검팀은 지난달 25일과 31일 두 차례 정 전 행정관을 불러 조사했다. 특검팀은 정 전 행정관을 상대로 전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전씨가 보낸 메시지를 김씨에게 전달했는지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특검팀은 전씨가 윤 전 대통령 및 김씨와의 친분을 내세워 다수의 공직 희망자로부터 인사 청탁과 공천 청탁을 받고 거액의 금품을 수수했다고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윤석열 캠프 출신이다. 그는 윤석열 캠프서 국방·안보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특보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노 전 사령관은 주로 출근하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제의로 캠프에 몸담기 시작했다. 노 전 사령관의 역할이 국방·안보 정책 자문을 뛰어넘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겨레>가 지난 5월 단독으로 보도했던 노 전 사령관 기사를 보면 그는 2020년~2021년 사이 ‘식목일행사계획’ ‘YP(윤 전 대통령 추정)작전계획’ ‘YR(와이알)계획’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비상계엄 특별수사단(특수단)이 압수한 노씨의 유에스비(USB)에 있던 문건으로,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가 주된 내용이다. 공천 청탁 금품 수수? 식목일행사계획 파일에는 ‘분노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검찰총장) 퇴임 시 행동 ▲퇴임 후 동력 유지 방안(예) ▲퇴임 이후 정치 참여 방안(2~3개월 야인 생활 후) ▲대선 카드 준비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퇴임 시기에 대해 “자의로 퇴임 시 지금의 몸값을 최대한 유지하여 내년 4월 서울시장 선거 직전이 유리, 기자회견은 ‘더 이상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퇴임합니다’라고 간명하게 함”이라고 적었다. 2021년 4월 치러졌던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에 윤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에서 사퇴해야 한다는 뜻인데, 윤 전 대통령은 실제로 서울시장 선거 한 달여 전인 3월4일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이후 행보와 관련해서 노 전 사령관은 문건에서 “국민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현 시국 상황에 대한 우려와 인식을 공유하여 지도자급으로서의 이미지를 노출”시키고 “재래시장, 청계천, 남대문, 지하철 등에서 몰래카메라의 형식으로 소박하고 인간적인 냄새를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깜짝 행보”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았다. 또 “현 정치체제와 일정 기간 거리 두기를 하다가 내년 9월을 목표로 국민의힘에서 모셔가는 형식으로 영입” “AN(안철수 추정) 등 여타의 후보군을 모두 참여시켜서 경선을 하고 여타의 후보군이 꼼짝없이 경선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게 사전에 정리 작업” 등의 내용도 포함됐다. 실제로 윤 전 대통령은 검찰총장 사퇴 4개월 뒤인 2021년 7월 영입 제안을 받고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YP작전계획’ 문건에는 ‘정의로운 법조인’이라는 ‘Y의 현재의 모습’을 바탕으로 “연예인, 중도좌파도 끌어들이는 과감한 인물 영입”을 통해 “후원 지지 그룹 구성”을 하는 방안이 담겼다. 이어 “친박, 비박을 포용하는 탕평책”을 사용하고 “좌파 중량급을 영입”해서 “당권 장악”을 한 뒤 “대선 성공”을 하는 단계를 순서도 형식으로 그렸다. 막강한 영향력 아울러 “좌파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을 좌파 적폐 척결 차원에서 폐지”하고 “한미일 안보 축을 기본으로 하고 한일관계를 적폐 청산과 국민적 인기 영합 차원에서만 다룰 것이 아니고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정책적 내용이 적시됐다. ‘YR계획’에는 “국립묘지 참배,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 두루 참배” 등 내용이 적혔다. 실제 윤 전 대통령은 2021년 10월26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박정희·김대중·이승만·김영삼 전 대통령 순서로 묘소에 참배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11일에는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았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11일 경찰 조사에서 “(2022년)윤 전 대통령이 대선캠프를 구성했을 때, 김 전 장관이 제게 일을 도와달라 부탁했는데 성 관련 범죄 경력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며 “(그 대신에) 대선 토론 때 안보 관련 분야 질문 및 답변 내용에 대해 초안을 잡아주면, (상대 후보의) 역공 대비 등을 세밀히 검토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윤 전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김 전 장관이) ‘대통령 지지도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냐’고 묻길래 ‘검사 출신이라 말이 친화적이지 않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줘라’고 했다”며 “(시장에 가서) 생선 같은 것도 만지면서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광주 5·18(행사)에 참석해라. 그들도 같은 국민”이라며 “일단 내려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 건의해라. 이왕 대통령이 됐으면 전라도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 윤 전 대통령은 지난 2023년 7월엔 부산엑스포 유치 홍보를 위해 부산을 찾은 뒤 자갈치시장서 붕장어를 맨손으로 만졌다. 또 2022년 5월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광주를 찾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노 전 사령관은 “나중에 티브이(TV)를 보니까 제 말대로 다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책·현안 모두 비선 실세 말대로 실현 김·노 라인 물적 증거 없어 수사 필요 전씨와 노 전 사령관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의외로 ‘일본’과 무속이다. 김건희 특검팀 관계자 4~5명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건진법사 전씨의 법당으로 들이닥쳤을 당시 ‘일본 신상’의 존재가 처음 드러났다. 전씨의 법당은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 면적만 279㎡(약 84.4평)에 이르는 단독 주택 2층에 있다. 2층(90.18㎡)엔 거실과 큰방, 작은방, 화장실이 있고, 1층(134.02㎡)은 일반 가정집 형태 생활공간으로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2층 법당으로 올라가는 내부 계단이 설치돼 있다. 2층 거실과 큰방에 각각 부처상과 일본 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상을 모신 불당과 신당이 한 개씩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씨가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자 신도(神道)의 주신으로 일컫는 아마테라스를 모신 건 한국 전통 무속이 일제 시대 신사 참배 등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작은방은 테이블과 방석이 깔려 있는 응접실 형태의 손님 대기실인데, 전씨는 이 방에서 공천 헌금 의혹이 제기된 2018년 자유한국당 영천시장 예비후보와 사업가 이모씨, 축구선수 이천수 등을 만났다. 복수의 정보사 간부들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일본어를 매우 잘한다. 육사 졸업 후 일본에서 수년간 거주한 까닭이다. 노 전 사령관이 일본 동북대 석사 위탁교육을 받는 동안 그의 딸들은 현지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 전 사령관과 같이 근무했던 한 군 관계자는 “노 전 사령관이 일본에 오래 거주하지는 않았다. 일본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터라 신사에도 자주 갔었다”고 전했다. 주변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2019년부터 경기도 안산 본오동 ‘아기보살’ 점집에 얹혀살았다. 등기부 등본에는 이 점집의 소유주가 아기보살 윤모씨로 돼 있다. 왜 하필 일본? 윤씨와 노 전 사령관을 잘 안다는 한 지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기보살 점집에 가보면 노씨가 트레이닝복이나 잠옷 차림으로 있기도 했다. 점 보러 오는 손님이 많은 집이라 노씨가 손님들 줄도 세우고 그랬다. 1년쯤 지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노씨가 실은 자기가 장성 출신이라고 그러기에 ‘웃기지 마라, 나도 군대 ‘장’ 출신’이라고 대꾸해 줬다, 병장. 그런데 몸집도 탄탄하고 해서 장군 출신이 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데 사는구나 짐작했다. 노씨는 후배 군인들을 데려와 점을 보게 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