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 3년(1421) 10월의 일이다. 상왕(태상왕)으로 물러난 이방원이 세종을 위시해 여러 신하들과 경기도 임강현(臨江縣, 장단군 대강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 군장리(軍藏里)에 이르러 오찬을 하는 중에 불현듯 입을 연다.
“도성을 수축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이 원망하게 될 것이나 잠깐 수고함이 없고서는 오랫동안 편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그 괴로움을 담당하고, 편한 것으로 주상에게 내려 주는 것이 또한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방원의 언급에 따라 세종은 곧바로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전국 8도에서 인원을 동원해 북악(北岳), 낙산(駱山), 남산(南山), 인왕산(仁旺山)을 잇는 기존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겠다. 다수의 사람들이 당시에 이루어진 석성 축조작업이 세종에 의해 이루어진 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세종 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방원으로부터 비롯됐고 또한 이방원이 직접 지휘하고 감독했었음을 밝힌다.
여하튼 이 대목서 의문이 일어난다. 왜 이방원은 세종이 보위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나서 굳이 돌로 성을 구축했느냐의 문제다. 그 답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서 찾아야 한다.
시간은 태종이 보위에 앉아 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건국되던 시점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다. 물론 명나라에 지극정성으로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종 7년에 명나라는 명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남(安南, 베트남)을 토벌하고 사신을 통해 이방원에게 조서를 전달한다. 말이 조서지 명나라가 왜 안남을 토벌했는지에 대한 일종에 경위서다.
그를 받아든 이방원은 즉각 명나라의 공갈협박을 알아채고 명나라를 상대로 이중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외형상으로 명나라에 대해 지극정성으로 사대의 예를 취하면서 내적으로는 군비 확충과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을 돌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 역사(役事)는 명나라와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러한 사실이 명나라에 전해지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위상을 드높인다.
이 대목에서 이방원의 말 대로 ‘내가 그 괴로움을 담당하고, 편한 것으로 주상에게 내려 주는 것’이 효력을 발휘한다. 이방원이 수고로움을 자처해 석성을 축조함으로써 아들인 세종이 명나라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외교 참사를 넘어 국치(國恥)”라며 “국민은 문 대통령의 이번 중국방문을 ‘정유국치’로 기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당 역시 대변인 성명을 통해 “홀대, 굴욕, 폭력의 상처만 남은 방중 정상회담이었다면 외교, 안보 참사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공세를 이어갔다.
문 대통령의 중국 방문 중에 발생한 일들을 살피면 두 야당의 주장이 억지는 아니다. 그러나 야당의 주장에 앞서 우리가 새겨둬야 할 속담이 있다.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다. 개인 간도 그러하지만 국가 간 외교에서는 외형보다 실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차원서 섣부른 판단에 앞서 향후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두고 볼 일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