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왜, 내 계책이 마음에 들지 않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면?”
“너무나 출혈이 심한 게 아닌가 생각되어 그럽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출혈이 아니지요.”
“그 이야기인즉슨.”
“그저 잠시 맡겨둔다 생각하면 될 일이오.”
“그렇다면 제 집사람도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사의 부인까지 말이오?”
“전방위로 압박하자는, 그리고 저희 집에 보관하고 있는 보물도 함께 털어 넣자는 말씀입니다.”
연개소문이 대답 대신 선도해의 손을 잡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 대야성 성주로 부임한 김품석이 휘하 막료들과 함께 상견례 겸해 성의 경치 좋은 곳에서 부부동반 연회를 열었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한 여인이 허리가 휘어질 듯 사뿐사뿐 행사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얼큰한 술기운에 분위기가 고조될 대로 고조 된 품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행사장으로 들어선 여인이 정 중앙에 있는 품석에게 다가오는가 했더니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지(17등급 중 13등급으로 4두품이 올라설 수 있는 최고위직) 검일의 곁에 멈추어 섰다.
막 술잔을 기울이려던 검일이 여인의 출현을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주님, 제 안 사람입니다.”
“대야성 최고 미인이 드디어 나타났구려.”
품석이 답할 겨를도 없이 바로 곁에 있던 사지인 모척이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여인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변해갔다.
“그래도 형이 사람 보는 눈은 있소이다.”
검일이 다시 맞장구를 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나, 어서 성주님 내외분께 인사드리지 않고.”
여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가까이 다가가 다소곳하게 고개 숙였다.
동시에 품석의 눈에 여인의 뽀얀 가슴살이 들어왔다.
“애랑이 성주님 내외분께 인사드립니다.”
“허허, 이런 곳에 진주가 숨어 있었구려.”
가뜩이나 고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자 품석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사를 마친 검일의 아내가 사뿐히 자리를 옮겨 검일 곁에 자리 잡았다.
“성주님!”“말해보게.”“늦게 참여한 제수씨에게 벌주 한잔에 가야금 연주 어떻겠습니까?”
다시 모척이 걸쭉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일었다.
“그리하세요. 새로 부임한 성주님 내외분께 우리 대야성의 진수를 보여드립시다.”
모척의 곁에 앉아있던 사지 용석이 거들고 나섰다.
“성주님, 우리 제수씨의 가야금 연주는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를 모르면 신라 사람이 아니지요.”
모척의 추임새에 용석이 다시 거들었다.
“모두의 뜻이라면 따라야 도리 아니겠는가?”
품석이 그윽한 시선으로 애랑을 주시했다.
시선을 받은 애랑이 고개를 숙이자 검일이 다짜고짜 아내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어서 성주님 분부 받들도록 하게.”
얼떨결에 일어난 애랑이 다른 여인들의 질시의 시선을 받으며 성주 앞으로 다가갔다.
품석이 급히 자신의 잔을 비우고는 애랑에게 건네고 잔을 채웠다.
잔을 받은 애랑이 살며시 고개 돌려 입에 대었다가 떼어냈다.
“아니, 그 잔을 다시 성주님께 드리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간접적으로…….”
모척의 걸쭉한 소리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소녀는 술은…….”“허허, 왜 그러십니까. 평소 주량이 세다고 자랑하시면서. 다만 임자를 만나지 못해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석의 말에 아내를 바라보는 검일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빨리 마시고 성주님께 따라드리게.”
대야성 성주 부임…최고 미인 등장
여색 쫓는 못된 습성 결국 드러나
애써 흥분을 감추고 이야기한다고 했으나 목소리의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품석과 검일의 눈치를 살피던 애랑이 조심스럽게 잔을 비워내고 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잔을 채우기 위해 상반신을 기울인 애랑의 가슴골이 조금 전보다 더욱 깊게 품석의 시선에 들어왔다.
“자, 그러면 이 잔은 대야성 최고 미인의 가야금 연주를 위해 마시도록 할 터이니 모두 잔을 들기 바라네.”
한껏 기분이 들뜬 품석의 제안에 모두 잔을 비워냈다. 이어 한 병사가 으레 그랬다는 듯 가야금을 가져왔다.
모척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 강제적으로 애랑을 앉히고 병사에게 가야금을 받아 건넸다.
모두의 시선이 애랑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바로 곁에 자리한 품석의 시선이 강하게 꽂혔다.
한잔 술 탓인지 혹은 피할 수 없는 자리임을 의식했는지 애랑이 차분하게 자리 잡고 가야금의 음을 고르기 시작했다.
팅 하는 소리가 봄날의 한적함을 가르기를 잠시 화사한 봄의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애랑의 가야금 소리에 꿈속에 깊이 빠져든 듯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가야금을 안고 있는 애랑의 모습이 숨 쉬는 소리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고혹적으로 비쳐졌다.
잠시 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품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지금까지 살면서 가야금 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랐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일의 안사람에게 술 한 잔과 비단 한 필로 보답코자하니 받아주시게.”
곁에서 가시눈으로 바라보는 부인, 고타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석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게 무슨 행동이에요?”
연회를 파하고 거처에 돌아오자마자 고타소가 품석을 몰아세웠다.
“무엇을 말이오?”
“사지 검일의 계집을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고요?”“내가 어떻게 했다고 그러오.”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보기에 참 딱하십디다.”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럼 안 그랬다는 말입니까?”
“그저 성주로서 성의 단합을 위해 조금 관심을 기울였기로서니 그게 무슨 흠이 된다고 그렇게 타박하는 게요?”
고타소가 품석의 구차한 변명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만히 있으니 더 무섭소.”
“지금 내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러면.”“이제야 외숙부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요. 그래서 그를 새기는 중입니다.”
“갑자기 외숙부라니. 무슨 말이오?”
외숙부는 물론 김유신을 지칭했다.
“당신 없는 자리에서 내게 각별히 주의를 주십디다.”“무엇을 말이오?”
“뭐긴 뭡니까. 반반한 계집만 보면 침을 질질 흘려대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못된 습성을 막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어허, 말이 참 심하구려.”
“그러면 없는 말 했습니까?”
“그거야.”
품석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