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법정관리 후폭풍

이대로 한국경제도 침몰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한진해운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회생 여부를 놓고 한진그룹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거듭하던 채권단이 추가지원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양상이다. 법정관리행이 결정된 상황에서 본격적인 청산 수순이 예고된 상태. 한진해운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가운데 벌써부터 연쇄 후폭풍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한진해운 주채권단은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서 한진해운에 대한 신규 자금지원 불가 결정을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이는 국내 1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사실상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장일치 결정
자금줄 말랐다

채권단은 실사 결과를 토대로 한진해운이 내년까지 1조원 이상 자금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평가했다. 운임이 현재보다 하락할 경우 부족한 자금 규모는 최대 1조7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봤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그간 채권단은 한진그룹 측에 부족자금 해결방안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일부 자금만 자체 조달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이에 채권단은 한진그룹 측의 제시안에 대해 수용이 불가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간 채권단과 한진그룹은 한진해운의 앞날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거듭해왔다. 한진그룹은 국내 해운산업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와 채권단의 한진해운 지원이 절실하다는 입장이었다. 지난달 25일 최대 주주(지분률33.2%)인 대한항공이 4000억원 규모의 신규 자금을 지원하고 부족자금이 발생시 조양호 회장 개인과 기타 한진 계열사가 1000억원을 추가로 지원한다는 내용의 부족자금 조달방안을 제시했다.


반면 채권단은 한진그룹의 추가적인 유동성 지원 없이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불가피하다는 원칙론을 강조해왔다. 추가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용선료 인하 ▲사채권자 채무조정 ▲해운동맹 가입 등을 내세워 자율협약을 추진해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한진해운이 내놓은 5000억원 수준의 자구계획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용석 산업은행 구조조정 본부장은 “4000억원을 지원한 뒤 유상증자가 끝나고 부족할 경우 1000억원 한도로 지원한다는 것”이라며 “600억원이라고 밝힌 미국 롱비치터미널(TTI) 지분 역시 담보 등으로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채권단 추가지원 중단 ‘초강수’
법원 기업회생개시…청산 수순

결국 한진해운은 채권단의 추가 지원 불가방침이 정해진 이튿날 서울중앙지법에 기업회생절차 개시신청서를 냈고 법원은 하루만에 법정관리를 결정했다. 만약 법원이 회생신청을 받아들이면 한진해운은 부채를 조정 받고 구조조정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이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한진해운은 청산 절차를 밟게 된다. 원칙대로라면 법원은 청산보다는 회생 가능성을 우선순위에 놓고 각종 현황을 파악하게 된다. 업계에선 청산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진해운이 채권·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청산 수순을 밟아야 하는 까닭이다.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일단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을 현대상선이 인수하는 방식을 타진하고 있다. 두 회사를 합병하면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부채까지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자산 인수를 통해 한진해운의 이점만 흡수하겠다는 심산이다.

정은보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달 31일, 한진해운 회생절차 신청에 따른 금융시장 영향 점검 및 대응계획을 통해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을 현대상선이 인수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 부위원장이 밝힌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은 ▲선박 ▲영업 ▲네트워크 ▲인력 등이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이미 핵심 자신을 한진그룹 계열사 등에 처분한 상황이다. 한진해운은 평택 콘테이너 터미널 지분과 부산신항만 지분 등 국내 핵심자산은 물론 아시아 8개 항로 영업권과 베트남 틴깡가이멥 터미널 지분 등을 매각했다. 보유 선박 등은 법정관리에 돌입하면 상거래 채권 채무자 등이 회수해 갈 가능성도 존재한다. 남은 것은 항만과 항로 운영권 등에 불과하다.

사실상 부도?
공중분해 위기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는 해운업 전반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진해운이 1위 국적선사인 만큼 당장 수출물량 수송에 차질이 우려될 뿐만 아니라 물류비용 증가로 이어질 거란 계산이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 만큼 단기적으로는 수출 물량처리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내다봤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한진해운 파산하면 미주 0.3∼1.0%, 구주 0.8∼1.6% 등 수출가격이 상승해 수출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선주협회는 17조원의 피해 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다. 한국 해운산업 자체가 붕괴되는 동시에 해운업과 필수불가결한 관계인 조선업, 항만업 등 산업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동시에 대규모 실업 사태도 우려된다. 해운선사는 화물을 연결해주는 알선업체, 육상운송업체, 급유업체, 선용품업체, 도선사, 항운노조 등 수많은 업종과 연관돼 있다. 당장 해운이나 항만, 화물차 관련 일자리만 2300개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개인투자자와 협력업체의 피해다. 개인투자자가 65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보유한 만큼 선량한 투자자의 피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법정관리와 함께 기존의 모든 채권, 채무가 동결되기 때문에 담보가 없는 회사채 투자자들은 원금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한진해운이 발행한 회사채(영구채 제외) 잔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총 1조1891억원이다. 이 가운데 공모사채가 4210억원을 차지하고 사모사채가 7681억원이다.

이에 대해 정 부위원장은 “해운 대리점과 선박용품 공급업 등 협력업체에 대한 매입이 채무(637억원) 중 상당 부분 피해가 예상된다”며 “특별 대응반과 지역 현장반을 통해 밀착 지원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덧붙였다.

현실로 다가온
연쇄 피해 우려

회사채 투자자 가운데 개인 비중이 적고 기관 투자가도 분산돼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1조2000억원의 회사채 중 개인 투자자의 보유액은 800억원 규모로 추산됐다. 은행권에 번질 파장도 크지는 않을 것으로 진단된다. 신용공여액이 1조원에 달하지만 채권단 대다수는 충당금을 충분히 쌓아 둔 상태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선 예상외로 충격파가 크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상당수다. 현재 해운업이 공급 과잉에 따른 업황 불황인 데다, 새롭게 출범할 해운 동맹에서 한진해운 퇴출 후 노선을 재정비할 것이기에 해운업이 입을 타격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의 물량은 대부분 해외 물량이라 이는 다른 머스크 등 해외 선사들이 가져가게 될 것”이라며 “국내 물량 역시 현대상선에서 흡수가 가능해 중장기적으로는 큰 타격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자손실·조선업 피폐·실업 ‘3중고’
‘모럴헤저드’ 오너 일가에 비난 봇물

이런 상황에서 한진해운을 위기로 몰아 넣은 총수 일가와 채권단, 감독기관인 정부에 대한 책임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에게는 원색적인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형국이다.

최 전 회장은 남편인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이 사망한 이듬해인 2006년에 한진해운 최고경영자로 취임했다. 그러나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영권을 승계받아 급박하게 돌아가는 글로벌 해운업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 전 회장은 한진해운의 1차 유동성 위기 때 제대로 된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채권단을 설득할 기회를 잃었다. 2014년 조 회장에게 회사 지분은 물론 경영권까지 넘긴 이후 현재는 한진해운 경영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다. 한진해운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에서 빠져나간 셈이다.
 

최 전 회장의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약 1900억원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자구책 마련 과정에서 유동성 확보가 절실했던 한진해운에 단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신청을 발표하기 전 한진해운의 잔여 보유 주식을 전부 처분해 미공개 정보로 주식 거래를 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최 전 회장이 매도한 한진해운 주식은 소액 주주들이 매수했으며 오너가의 손실은 순수한 개미들이 대신 떠안았다.


어쩌다 이지경
누구의 책임?

채권단과 정부를 향한 비판도 거세다. 한진해운의 주채권단은 지난 5월부터 조건부 자율협약을 신청해 용선료 조정과 선박금융 상환유예 등을 진행한 한진해운의 노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업에 10조원이 넘는 유동성 자금을 투입하면서 해운업에만 자체적인 해결을 요구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즉, 경영진과 채권단, 정부의 ‘등 떠밀기’식 대응이 이뤄지는 사이에 한진해운이 걷잡을 수 없이 표류했다는 주장이다.


<djy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한진해운의 굴곡진 40년

1977년 5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사로 설립된 한진해운은 국내 해운업의 산 증인이다. 1978년 중동항로에 이어 이듬해 북미서안 항로와 1983년 북미동안항로 등을 연달아 개척하며 한국 컨테이너 선사의 역사를 썼다. 1988년 대한해운과의 합병을 통해 종합해운사로 변모했고 1994년에는 컨테이너 100만TEU 수송실적을 기록했다. 현재 200여척 1000여만톤 선박으로 전세계 60여개 항로를 운영하며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2002년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별세와 동시에 형제 간 계열분리 작업 과정에서 3남 조수호 전 회장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2006년 한진해운의 계열분리 작업이 완벽히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조수호 회장이 돌연 사망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당시 조 회장 부인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한진해운 대표이사에 취임했지만 이 과정에서 한진해운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해운업계 침체로 수천억원대 적자를 냈다.

2009년 한진해운홀딩스를 지주사로 새 출발했지만, 최 회장 휘하의 한진해운은 금융위기로 인한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2013년 한진그룹으로부터 2500억원을 지원받기에 이르렀다. 최 회장은 결국 이듬해인 2014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겼다.

경영권을 넘겨받은 조양호 회장은 해운업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항공에서 1조원을 끌어다 투입하는 등 한진해운 살리기에 전력을 다했다.

이 때 일시적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지만 업황이 날로 악화되며 또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잠깐의 호황이 찾아왔을 당시 비싼 값에 장기계약 했던 용선료를 체납했고, 글로벌 경쟁 업체들의 성장에 따른 운임료 하락, 세계 경제 불황으로 인한 물동량 감소 등이 발목을 잡으며 누적 적자가 수조원대로 불어났다.

결국 이를 버티지 못했던 조양호 회장은 올 1월 경영권을 포기했다. 채권단과의 자율협약에 돌입한 지 8개월 만인 지난달 30일 채권단은 추가 자금 지원을 포기하며 사실상 청산 수순에 돌입하게 됐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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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