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3 03:01
『우리 동네(노원구 하계동)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노원에는 도로라고 해봐야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을 구불구불 돌고 돌아 중계동(중계본동)과 상계동(당고개역 부근)으로 들어가는 흙길이 전부였다. 그런데 한 순간 하계동의 논과 밭을 가로질러 도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길에 대해 동네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비상 시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하려고 도로를 일직선으로 만들려는 것이라 했다.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마치 그를 입증하듯 지금에 먹골역을 시작으로 의정부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자갈들이 덮이고 다듬어질 무렵부터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마을을 지나는 버스는 중계동과 상계동을 향하는 버스가 고작이었는데, 그 길로 도봉동에서 종로 5가까지 가는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위 글은 현재 집필 중인 작품 일부로 1976년,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에 발생했던, 동일로(영동대교 남단과 양주시 마전동을 잇는 도로)가 들어서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런데 왜 필자가 느닷없이 위 글을 인용했을까. 물론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서 개최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
1980년 후반에 일이다. 그해 8월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정치 해금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신군부가 참여한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다당제를 목표로 정치판을 새롭게 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유치송과 신상우 체제로 민주한국당(이하 민한당)이, 김종철과 이만섭이 이끄는 한국국민당(이하 국민당)이 등장했다. 지면 관계상 창당 과정에 신군부 세력이 실행했던 공작들에 대해 상세하게 나열할 수 없으나, 당시 정당들은 관제 정당이었었음을 밝힌다. 심지어 새로 판을 짜고 실시됐던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 민주정의당(민정당) 사무총장인 권정달은 “이제는 여당과 야당이 없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시점”이라고 공표할 정도였다. 결국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 관제 야당이었던 두 정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민한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신민당)에, 한국국민당은 김종필 주도로 창당되는 신민주공화당으로 흡수 통합된다. 그런데 이 시점서 제1야당인 국민의힘을 살피면, 혹시나 관제 야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물론 과거 존재했던 정당들처럼 실제로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하는 행태가 그와 유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1년(1505) 8월26일의 기록 중 일부를 인용한다. 『군신·왕세자 등이 책보를 받들어 존호와 축하 전문을 올리다 “천년의 큰 운수를 만나 큰 기업을 운전하시매, 만백성의 환심을 얻으시니 현책(顯冊)으로 존숭하여 마땅하옵기에…(중략)…외국이 복종하여 사신이 남북을 아울러 교통하고, 악당이 개심하여 간사가 그쳐 모조리 선량하게 변하니, 온갖 기강은 예대로 진작되고 온 나라 풍속은 새롭게 옮겨지도다. 끊임없음은 하늘의 운행을 본받으시고 무위(無爲)하심은 지극한 도리의 운용을 밝히시매, 오륜이 이미 펴지고 칠덕(七德)이 다 베풀어졌도다. 그러므로 문모(文謀, 문치)와 무열(武烈, 전장에서 공적)이 아울러 융성하여 그를 사업에 가하였으므로, 예도가 갖추어지고 음악이 골라지는 큰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우뚝하도다. 그 성공하심이여! 오직 대덕(大德)은 반드시 마땅한 이름을 얻는 것이거늘 하물며 백성에게 일찍이 없었던 성군(聖君)임에리까.”』 위 기록과 관련된 부연설명이다. 동 기록은 우리 역사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의 패악질이 극에 달했던, 즉 반정으로 쫓겨나기 바로 전 해에 연산군에게 올린 책보(冊寶, 왕이나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에 함께
필자가 정당 판에 발을 들여놓았던 지난 1980년대 후반, 즉 12대 국회 시절의 상황을 언급해 보려 한다. 당시 우리 사회는 휴대폰은 물론 컴퓨터도 접할 수 없었다. 고작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은 유선 전화와 팩스, 그리고 타자기가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서 국회의원 비서진은 4명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로 5급(별정직 국가공무원) 보좌관 1명, 6급 비서 1명, 7급 1명(운전기사), 그리고 9급 1명(여비서)으로 구성됐었다. 덧붙여 당시 국회의원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 정도였다. 이제 현 시대 상황을 나열하자. 아니,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국회의원에게 제공되는 보좌진은 무려 9명에 달한다. 상세하게 살피면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각 1명씩, 그리고 인턴비서 1명이다. 아울러 국회의원은 차관을 넘어 장관급 대우로 격상됐다. 참으로 기막힌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상적이라면 문명의 발달에 부응해 국회의원의 숫자는 물론 보좌진의 수도 줄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역으로 국회의원 수도 늘고, 또 보좌진의 수는 2배 이상 늘었으니, 문명 발전에 역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이 발전하면서 국회의원들의 업무량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재판 과정서의 일이다. 2심 재판 검사가 1심 재판 검사와 상반된 논고를 내놓자 1심 재판 논고를 맡았던 검사가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거론하며 반박하고 나섰다. 이로부터 공식적으로 등장했던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사전적으로 ‘검사는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한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조직체의 일원으로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관계에서 직무를 수행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상당히 난해하다. 동일체와 상명하복은 전혀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체는 말 그대로 한 몸으로 수평적 관계를, 상명하복은 수직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동일체와 상명하복을 같은 의미로 나열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상은 어떨까. 검찰청법을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보자. 먼저 검찰청법 제4조(검사의 직무)를 살피면 1항은 검사의 직무와 권한에 대해 규정하고 있고, 2항은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있다. 4조만을 살피면 검사는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 즉 독립된 기관으로 모든 검사는 동일체라 지칭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검찰총장과 일반
조선 후기 유학자인 장복추(張福樞, 1815∼1900)의 ‘사미헌집’에 실려 있는 불개명설(不改名說, 이름을 바꾸지 않는 설) 중 일부를 인용한다. 『어떤 객이 나를 찾아와 나의 이름을 물어보고 마치 근심하며 슬퍼하는 안색이 있는 것 같이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이 사람의 가난을 부유하게 만들고 사람의 천함을 귀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며 나에게 이름을 바꾸기를 청했다. 이에 “이 이름은 바로 나의 조부께서 지어주신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고치겠는가. 아! 가난하고 천한 문제는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돌이켜 반성할 일이 아님이 없다. 내가 만약 마땅히 해야 할 선(善)을 알아 선을 행하기를 부지런히 하면 하늘이 반드시 복을 내리는데 날이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불초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조부께서 이름을 내려주신 본뜻을 체득하지 않고 자포자기를 달게 여기어, 지금 나이가 40세가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한 가지 선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이치로 보아 그렇게 된 것이니, 이름을 고치고 고치지 않는 것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와 복은 자기로부터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장복추는 객이 개명하라는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싱어송라이터인 딸아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평상시에도 연습 중인 경우를 제외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너무 지나칠 정도여서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의외의 답이 나왔다. “아빠, 딴따라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 조금은 황당한 생각이 들어 딴따라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묻자 즉각 ‘우물 안 개구리’라는 역시 의외의 답이 나왔다. 우리 세대에 널리 유행했었던, 아이 세대에게는 다소 생소할 딴따라는 원래 대중예술인들을 낮잡아 부른 용어로 아이의 말대로 우물 안 개구리, 즉 자기 세상에 몰입되어 주변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류를 그렇게 지칭했다. 아이의 답을 듣고 기특하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짓자 아이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말인즉 며칠 전에 구입한 10여권의 책을 거의 독파해가니 새로 책을 구입하게 용돈을 달라는 이야기였다. 각설하고, 최근 대한의사협회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정부가 전공의와 대한의사협회를 고발한 일을 공권력의 폭거로 규정한 결과인데, 이는 앞서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 공공의료 확대 정책을 추진키로 하자 이에 반발해 발생했
『하나님은 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셨어요? 왜 그를 죽게 만들었어요? 성경 속에서 당신의 아들이 죽게 되는 과정을 읽을 때마다 저는 너무 슬퍼요. 자신의 운명을 힘겹게 받아들이고 희생한다. 자신의 운명은 희생 그 자체다. 이렇게 되는 거 아닌가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운명이 정해져 있으면 자유는 없고, 자유가 있으면 운명은 없는 거라고 해요. 그러면 당신의 아들에게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맞나요? 왜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어야만 했나요. 그가 죽고 난 후에 한 번도 세상은 선한 적이 없었는데,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은 게 맞나요? 숭고함으로 포장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가요. 장치라고 하니 생각나서 말인데요. 성경을 읽다보면 억지스러운 장치같은 게 너무 많아 보여요. 소설을 진행하기 위해 사용되는 복선들. 이것도 저의 의심이라면 죄송해요.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쓴 거잖아요.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야 하니 극적으로 써내려가지 않았을까요? 저도 지금 저의 심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평소보다 극적으로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왜 선악과를 먹게 놔두셨어요? 애초에 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드신 거에요? 아니, 왜
문재인 대통령의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경축사 전문 중 일부를 인용한다. “국민 여러분, 2016년 겨울, 전국 곳곳의 광장과 거리를 가득 채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정신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촛불을 들어 다시 한 번 역사에 새겨놨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 정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과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광복이 이뤄졌는지 되돌아보며,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입니다.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리 언어의 모순에 대해 살펴본다. 바로 ‘국민 여러분’이란 표현에 대해서다. 정치판 출신으로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류의 표현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이 대목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었다. 동 표현에 달라붙는 ‘여러분’이란 불필요한 단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다. 이를 위해 ‘국민’과 ‘여러분’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 1495년 1월1일의 기록을 인용한다. 『옛적에 임금이 돌아가시면 백관이 총재의 명령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여 애통해 하시는 때이어서 무릇 명령하실 것을 감히 독재(獨裁)하지 못하시고 한결같이 총재에게 의탁하시니, 총재의 책임이 평일보다 더욱 중합니다.』 상기 기록은 1494년 12월24일 아버지인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보지 않던 연산군에게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成世明)이 아뢴 내용 중 일부로, 동 기록에 등장하는 총재는 이조판서를 의미하나 조선조에는 원상(院相)의 직으로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국정을 의논하던 임시 관직을 지칭한다. 여하튼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 상기 기록을 인용했다. 먼저 독재란 단어의 등장과 관련해서다. 필자는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우리 역사에서 독재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 단어는 그 전까지 전혀 사용된 적 없었고, 연산군 시절 딱 두 차례 등장하고는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즉 조선조 통틀어 연산군 시절에만 등장했던 단어가 독재라는 말이다. 하여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곰
필자는 지난 6월 초 <일요시사>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윤미향 의원과 관련해 ‘윤미향으로 21대 국회 진단한다’는 글을 게재했었다. 해당 글을 통해 그가 국회의원 임기 시작 전에 민간인 신분으로 국회 소통관서 기자회견을 한 점, 그가 공개적으로 자인했던 세 가지 항목을 나열하며 그는 원천적으로 공과 사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역설했었다. 아울러 그를 감싸는 집권여당의 행태를 살피며 21대 국회 역시 최악의 국회가 될 것이라 장담했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 윤희숙 의원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는 최근 국회 5분 연설서 주택 임대차 3법을 반대하며 행한 연설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통합당은 극도의 찬사까지 보내고 있는데 필자의 시선에는 천만에다. 한마디로 윤미향과 ‘도긴개긴’에 불과할 뿐이다. 왜 그런지 연설 내용문 중 도입부를 인용해본다. “저는 임차인입니다. 제가 지난 5월 이사했는데, 이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집주인이 2년 있다가 나가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동 연설문을 접하자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사람이 제정신을 지니고 있는지 아연하기만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고려 제17대 임금인 인종 13년(1135)에 일이다. 서경(평양)을 기반으로 한 묘청, 정지상 등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수도인 개경(개성)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이유로 서경으로 수도 이전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다. 그러자 인종은 김부식 등 개경파를 앞세워 토벌에 나서고, 난을 일으킨 지 1년 만에 서경천도운동은 그 막을 내린다.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난의 주도 세력은 표면상으로 풍수지리설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을 살피면 개경파의 독주에 대한 서경 세력의 불만서 비롯됐다. 결국 이 난으로 공을 세운 김부식 등 문인 세력의 권력 독점은 ‘무신란’(고려 후기에 무신에 의해 일어난 난)으로, 뒤이어 고려 왕조가 패망으로 치닫는 계기가 된다. 동 난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묘청 등이 주장한 칭제건원(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금국(금나라) 정벌에 대해 ‘조선역사상 1000년 내의 제1대 사건’이라 규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한데,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대신 독자들께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밝히고자 한다. 김부식과 <삼국사기>의 탄생에 대해서다. 발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21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한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해본다. ‘20대 국회는 국민들의 평가가 낮았는데, 그 중 가장 큰 실패는 협치의 실패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각 당 대표, 원내대표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등 다양한 기회를 활용해 협치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는 특정한 누구의 탓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입니다. 21대 국회는 대결과 적대의 정치를 청산하고 반드시 협치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로 상기 내용을 인용했다. 첫 번째는 문 대통령 취임 이후 등장해 문 대통령의 전매특허가 된 ‘협치’란 단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함이다. 문 대통령과 측근들이 협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언급하는 협치는 한자로 ‘協治’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여러 언론서 協治로 언급하는 데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필자의 추측이 옳은 듯하다. 그런 경우라면 단어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이야기다. 다수의 사람들은 協治에 대해 ‘여당과 야당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해 중요 현안들을 처리하는 것’이
지금까지 필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관련해 <일요시사>를 통해 세 건의 칼럼을 게재했었다. 첫 사례는 박 전 시장이 2016년 10월, 1998년에 발생했던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 한나라당의 사주로 이뤄졌다는 공개 발언에 대해서였다. 공교롭게도 해당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나라당 대변인실 운영부장으로 재직하던 필자는 사건 초기부터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중심 역할을 했었다. 결국 동 사건은 김대중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부 사람들의 충성경쟁으로 빚어진 해프닝으로 결론 났다. 그런데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을 그는 무책임하게도 동 사건이 한나라당의 사주로 발생했다는 가당치 않은 공개 발언을 했고, 그래서 필자는 ‘박원순 시장, 귀하가 총풍사건을 아시오!’라는 제하로 가열하게 질타했었다. 두 번째는 2018년 8월 강북구 삼양동 소재 옥탑방서 서민의 삶을 체험하겠다며 ‘생쇼’를 연출하던 그의 행태, 그리고 그에 소요되는 경비를 사비가 아닌 서울시 재정으로 충당했던 일에 대해서다. 당시 그가 언론에 공개한 거창한 사진과 함께 ‘박원순 시장 더위 먹었나!’라는 제하로 옥탑방의 실체에 대한 그의 무지는 옥탑방서 생활하는 많은 서민들의 공분을 살 것이라며 질타했었다.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상대로 검언유착 사건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법무부가 공개한 추 장관 명의의 수사 지휘서를 살피면 ‘현재 진행 중인 전문수사자문단(자문단) 심의 절차를 중단할 것’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대검찰청 등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수사한 후 수사 결과만을 검찰총장에게 보고하고 조치할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추 장관은 지휘권 발동 배경에 대해 “이번 사건은 검찰총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현직 검사장이 수사 대상이므로 검찰총장의 수사지휘와 관련해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투명한 절차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 언급했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첫 번째 지시사항 즉, 자문단 심의 절차에 대한 지시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지시사항인 중앙지검 수사팀에 대한 지휘감독서 손을 떼라는 지시는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근거로 검찰 측은 검찰청법 제12조(검찰총장) 2항 “검찰총장은 대검찰청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검찰사무를 총괄하며 검찰청의 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에 근거해 “장관의 위법한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찰권이 발동
무더운 여름날 필자의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독자들을 위해 소설 한 번 써보자. 최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절제되지 않은 발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글의 소재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며 ‘하나는 그게 실제로 대통령의 뜻에 따른 행동일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그게 대통령의 뜻이 아니라, 차기대권을 노리는 추미애 장관의 돌발행동일 가능성’이라 했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너무 비약하고 있다. 정치판 출신 소설가인 필자가 살필 때 추 장관의 공격적인 발언과 행태는 진 전 교수가 주장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추 장관의 격한 발언은 문 대통령이 청와대서 주최한 제6차 공정사회 반부패정책협의회 직후에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보면 된다. 그 자리서 문 대통령은 “지난주 법무부와 검찰서 동시에 인권 수사를 위한 TF를 출범했다”며 “권력기관 스스로 주체가 돼 개혁에 나선 만큼, ‘인권수사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과감한 개혁 방안을 마련해 국민들이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바로 이 대목이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주도로 북한의 대남정책이 강경 적대 노선으로 선회한 일을 두고 두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첫째는 김여정의 분노의 중심에 대북전단 살포가 자리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물론 김여정이 <노동신문>에 자신의 명의로 밝힌 담화문서 대북전단이 “최고 존엄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며, 모든 남북관계 단절을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이에 대해 통일부는 즉각 탈북자 단체에 대북 전단 살포 중단을 요청하고 그를 방지할 법안까지 만들겠다고 했다. 탈북자 단체의 별 의미 없는 전단 살포 행태도 못마땅하지만, 통일부가 김여정의 분노의 본질이 대북전단 살포라 판단하고 대응하는 일은 참으로 한심스럽다. 그는 단지 구실일 뿐임을 삼척동자도 가늠하리라 본다. 둘째는 북한정권서 김여정이 전면에 등장한 일에 대해 한국의 유력 언론은 물론 주요 외신까지 김정은이 김여정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의 건강에 치명적인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권력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근시안적 사고다. 자고로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필자가 근무하는 중소기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이어가자.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하나는 월급은 반드시 제 날짜에 지급하고, 다른 하나는 정년퇴직, 즉 해고가 없다. 이에 대해 부연설명하자. 먼저 월급에 대해서다. 완제품을 출고시키면서 어느 정도 매출액을 파악할 수 있는 필자 입장서 살필 때 월급을 제 날짜에 지급하는 일이 신통하게 보일 정도다. 매출액에 비해 인건비 비율이 과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사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제 날짜에 월급을 지급받지 않은 적이 없다. 회사서 직원들 월급을 제 날짜에 정상적으로 지급하기 위해 금융권서 대출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다. 다음은 해고가 없다는 대목이다. 사실 해고가 없는 게 아니라 해고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항상 일손이 딸리기 때문이다. 입사했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장기간 머물지 못하고 회사를 떠난다. 그런 이유로 상시로 직원을 구할 정도다. 외관상 살피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 있다. 업무 수행량은 회갑을 넘긴 필자가 감당할 정도이고 월급날이 되면 어김없이 돈이 들어오는데, 그를 견디지 못하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지난 5월 초 <일요시사>에 게재했던 ‘김종인의 80대 기수론’을 통해 “40대 중에서 경제전문가가 차기 대권을 잡아야한다”는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었다. 그 이유로 정치 영역, 특히 한 국가의 지도자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의 몫이 아니고, 또 인간 수명이 82.8세(2020년 1월 기준)인 점을 들어 40대는 시기상조로, 그의 주장은 본인이 직접 권력을 잡겠다는 욕심으로까지 확대해석했었다. 그런 그가 5월 후반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40대 기수론과 관련해 질문받자 “젊은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하니까 젊은이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렇다고 ‘40대다, 50대다’ 연령대에 고정시켜 생각할 것은 아니다. 40대서 못 찾으면 대선을 포기할 건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아닌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고 언급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의 생각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 대목서 혹시 김 위원장이 필자의 칼럼을 읽어 보고 느낀 바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어난다. 그것은 필자가 지적했던 두 가지에 대해 정확하게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5월 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사이에 갈등을 살피면 짧지 않은 정치판 경험에 소설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흥미로운 의심이 일어난다. 양쪽이 주장하는 대목에 대한 진실 여부가 아니라 시점에 관한 문제다. 이번 사건을 세밀하게 살피면 4월에 실시된 21대 총선 전에 충분히 불거질 수 있었는데 교묘하게 그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점에 이슈화된 데에는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이 할머니를 회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다. 총선 중에 동 사건이 이슈화된다면 민주당으로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할머니 본인이 시간을 조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가능하다. 총선 전, 혹은 총선 기간 중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는 코로나19로 여타의 사건은 크게 이슈화되기 힘들었고, 그를 간파한 이 할머니가 의도적으로 연기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자꾸 전자, 즉 민주당의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대목에 의심이 가중되고 있다. 이 할머니의 대응을 살피면 단순한 미움 차원이 아니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