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끝에 돌아온 손학규 민주당 새 대표

쓸개 곱씹으며 ‘민심탐험’…대권고지까지 ‘첩첩산중’



 지난 3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민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됐다. 지난 2008년 18대 총선 패배 후 돌입했던 2년간의 칩거생활을 깨고 정계로 복귀한지 불과 2개월만의 일이다.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손 대표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손학규, 대체 그는 누구인가. <일요시사>가 구석구석 들여다봤다.

노동자들 권익 위해 노동 운동 뛰어들어
인하대·서강대서 제자들 사랑받는 정치학 교수로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이었으며 모친 역시 한때 교직에 몸을 담았다. 부친은 손 대표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차량전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이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모친은 자식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새벽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농사를 지었다. 저녁에는 나무를 하러 나갔다. 안타까움에 주변에서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했지만 그의 모친은 “내 남편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돌아가셨으니 이제 7남매 기르는 것은 내 일”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대입 후 운동권
징역살이 1년

손 대표는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 중고등학교 시절 손 대표는 공부 뿐 아니라 서클 활동 역시 열심인 학생이었다.
중학교 시절 손 대표는 밴드부에서 활동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관악기를 들고 행진하는 밴드부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밴드부에서 손 대표는 트럼펫을 연주했다.

중학교 3년 간 열심히 연습을 했기 때문에 트럼펫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연극부에 가입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손 대표는 연극부 활동에 몰두했다. 혹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손학규는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런 현실은 그가 온전히 공부에만 힘을 쏟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손 대표는 사회 현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토론은 강의실 뿐 아니라 교정의 잔디밭, 심지어 허름한 대포집까지도 이어졌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차례가 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변을 토하곤 했다.
손 대표는 당시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권’에 발을 들이게 됐다. 시위대 맨 앞줄에서 플래카드를 들거나 돌격대 역할을 했다. 단식 농성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단식 농성을 하더라도 슬쩍슬쩍 나가 배를 채우고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손 대표만은 언제나 단식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도지사시절 외자·기업유치 일자리 창출로 호평
2년간 칩거생활 깨고 2개월 만에 당권 거머쥐어

대학을 졸업한 손 대표는 저임금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구로공단에서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던 손 대표는 박형규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 빈민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그리고 1979년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기독교 사회 운동에 몸을 담았다. 이 때문에 공안 당국에 수배되어 2년 여의 수배자 생활을 해야 했다. 1년간은 감방에 갇히기도 했다.

이후 손 대표는 1980년 불현듯 외국 유학을 결심했다. 주변의 운동권 인사들은 그의 결심을 의아하게만 생각했다. “이제 우리가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왔는데 어디를 나가려는 거냐”는 것이었다. 손 대표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70년대 내내 투쟁으로만 살아온 그였다.
때문에 이제는 머리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솟았다. 그리고 세계를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영국의 ‘크리스천 에이드’라는 교회단체의 도움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게 됐다. 이곳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은 손 대표를 많이 따랐다. 유학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손 대표가 후배들을 무척 아꼈기 때문이다.

후배 유학생들은 손학규 뿐 아니라 손 대표의 부인 이윤영씨 역시 좋아했다. 윤영씨는 늘 조용하고 웃는 얼굴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넘쳤다. 손 대표가 윤영씨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로 7년간의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
권유로 정계 입문

손 대표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영국 유학생이라면 쉽게 마음먹을 수 있었던 유럽 관광조차 한 번 나서지 못한 채 공부에만 열중했다.
198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손 대표는 귀국 후 인하대, 서강대에서 정치학 교수가 됐다. 손 대표는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제자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즐겼고 아무리 시시한 의견도 끝까지 귀담아 들었다.
이 때문에 손 대표는 사랑받는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던 손 대표였기에 망설임이 없을 수 없었다.

손 대표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정치에 입문할 것을 결정했다. 국민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정치 개혁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 손학규는 제자들에게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 날의 박수소리는 손 대표의 가슴 깊이 각인됐다. 정계에 몸을 담고 살아오면서 힘겨운 일을 맞을 때마다 이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고 한다.
손 대표는 1993년 재·보선에서 민자당 후보로 경기 광명을에서 당선되면서 14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어 15~16대 총선에서 신한국당·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됐다.

이후 민자당·신한국당 대변인, 신한국당 정책조정위원장·총재 정무특보,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 외에도 김영삼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 시절 손 대표는 국가적 중요 현안이었던 ‘한약 분쟁’을 무난하게 매듭지어 한의사, 약사 두 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또한 장애인, 노인, 여성, 서민의 복지 확충을 위한 제도정비에 힘썼다. 4대 보험의 기초가 닦인 것도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은 가장 같이 일하고 싶은 장관으로 ‘손학규’를 뽑았다. 재임 기간 중 보여주었던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었다.
또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기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재임기간 동안 손 대표는 114개의 외국 첨단 기업, 141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고 8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를 위해 손 대표는 경기도 공무원들과 함께 지구를 10바퀴나 돌며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2006년 6월 경기도지사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100여일간 전국을 돌며 ‘민심대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말뿐인 정치가 아니라,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직접 국민들과 부딪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로부터 100일 후 민심대장정에서 돌아온 뒤 손 대표는 곧바로 ‘비전투어’에 나섰다. ‘비전투어’란 버스를 토론하기 좋은 구조로 개조, 전국을 누비며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각종 현안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을 향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비전투어’의 의제는 ‘4+2’였다. 일자리, 노후, 교육, 주거의 네 가지 민생 분야에 정치 개혁과 안보, 두 분야를 추가한 것이다. 손 대표는 총 17차례에 걸쳐 전국 각지를 돌며 각 의제에 대하여 국민들과 토론을 벌였다.
이후 대선을 앞둔 2007년 3월, “새로운 길을 열겠다”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 대표는 그해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정동영 후보에 밀리면서 고배를 마셨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을 거쳐 통합민주당을 이끌었으나 2008년 18대 총선 패배 이후 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강원도 춘천의 산골 농가로 들어간 손 대표는 닭을 키우고 등산을 하는 등 소일하며 2년여 동안 와신상담 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차례 정계 복귀 기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손 대표는 “아직 반성이 끝나지 않았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배추밭 방문 등
민심 챙기기 나서

올해 8월 마침내 정계 복귀를 선언하면서 칩거를 마친 그는 곧바로 당권 도전에 나섰고, 불과 2개월 만에 당권을 거머쥐게 됐다. 취임 직후 손 대표는 채소값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랭지 배추밭을 방문하는 등 ‘민심챙기기’에 적극 나섰다.
손학규호의 닻은 올랐다. 문제는 앞으로다. 내부적으로 다양한 계파를 단합시키는 한편, 민주당을 국민의 정당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손 대표가 어떤 리더십을 보여 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손학교 민주당 대표 프로필

■학력
·1953 시흥초등학교 4년
·1959.3 매동초등학교 졸업
·1959.4~1962.2 경기중학교
·1962~1965 경기 고등학교
·1965~1973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1981~1988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정치학 박사


■경력
·1973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 빈민선교 간사
·1977~197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관석 목사) 인권운동 간사
·1986~1987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1988~1990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1993 서강대학교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3 제 14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1996 제 15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1996.11~1997.8 제 33대 보건복지부 장관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00 제 16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2002.7~2006.6 민선 3기 경기도 지사
·2006.6~2006.10 100일 민심대장정
·2008.1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2008.2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수상경력
·2000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제 2회 백봉신사상
·2001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제 3회 백봉신사상
·2001 평등부부상
·2005 한국을 빛낸 CEO-글로벌 경영 부분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