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시리즈>지방자치단체장 탐구②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자

옳은 건 끝까지 밀고나가는 나는야 ‘황소’

인천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송영길 후보가 당선됐다. 송 당선자는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52.5%를 득표하면서 44.5% 획득에 그친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를 8% 차로 따돌리고 당선을 확정지었다. 따라서 그는 향후 4년 간 인천시정을 이끌게 됐다. 송 후보의 인천시장 당선은 민주당 출신 최초의 인천시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천은 그간 서울과 경기도에 비해 보수적 성향을 띠었기에 전통적 야당세력인 민주당이 발 붙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너머 인천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송 당선자.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지 조근조근 살펴봤다.

노동운동 전개…‘내 가족’이란 생각으로 투쟁
서른 살 나이에 사법시험 도전, 2년 만에 합격


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자는 어린시절 늘 배가 고팠다. 부면장이었던 아버지였지만 6남매를 키우기에는 힘이 부쳤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은 120원짜리 메밀 자장면을 먹어보는 것이었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절약정신’을 발휘했다. 학용품값을 아껴서 자장면을 사먹기로 결심한 것. 아끼고 아낀 끝에 결국 자장면을 사먹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둘째형에게 들키면서 송 당선자는 호되게 혼이 났다.

“자장면을 먹었다”는 이유로 혼이 났던 송 당선자. 그러나 형제애는 굳건했다.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한 것도 형들이었다. 공부하는 형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

고교생 때 사회비판 시각
박석무 선생 영향 컸다

그럼에도 ‘개구쟁이’ 기질은 버릴 수가 없었다. 남몰래 영화를 보러가다 선생님에게 들켜 화장실 청소를 하기 일쑤였다.
송 당선자가 사회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박석무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4·19 학생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박 선생은 김남주 시인의 선배로 정의감이 남달랐다. 특히 ‘책벌레’였던 그의 영향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할 수 있었다. ‘자랏골의 비가’ ‘아, 청춘의 도시 광주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면 ‘버럭 송영길’이 되곤 했다. 유신 말기 교련복과 M-16 총을 들고 거리행진을 할 때였다. 박 선생은 이 같은 현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고 송 당선자 역시 동감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 때문에 그는 반발심이 발동했다. 하루는 교련시간에 차렷 자세 등을 취할 때 불량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허벅지를 걷어찼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교련선생님이 서 있었다. 그는 그길로 운동장에 M-16 총을 던져버리고 집으로 향했다.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 하에 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사귀며 사고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수도권 빈민 운동을 했던 손학규 전 대표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기독교청년회가 주 활동무대였던 그는 사랑방교회를 열어 민중 목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시절 ‘남다른 조직가’로 성장했던 그는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중 하나가 택시운전사다.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분신자살한 이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고 열성적으로 투쟁했다.
아픈 추억도 있지만 송 당선자는 택시 운전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일까. 송 당선자는 “택시를 탈 때마다 친정에 온 것 같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택시를 자주 이용한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인생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986년 전두환 암살음모 혐의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갔던 것.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그는 아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송 당선자에 따르면 아내의 미모가 너무 뛰어나 추파를 던진 이들이 많았다고.

그가 지금의 아내와 만난 것은 대학교 초년병 시절, 교회에서였다. 서로 얼굴만 익힌 정도라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까지 2년이 걸렸다. 신촌 로터리에서 가두행진을 할 당시 송 당선자가 경찰에 밀려 도로에 넘어져 있는 아내를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인천 시계공장에 다녔어요. 잔업이 끝나면 전철을 타고 구로역까지 가서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역 앞 포장마차에서 어묵 등을 먹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였죠”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포지티브로 일관해

송 당선자는 인천 대우자동차 공장 건설현장 배관용접공과 택시기사 등 현장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로서 7년을 살았다. 이후 서른 살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도전해 불과 2년 만에 합격했다. 이때부터는 노동인권변호사로 변신, 노동현장을 지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에 몸 담았다.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인천 계양·강화갑 지구당위원장으로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2000년 16대 총선에 다시 도전,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17대, 18대 총선에서도 내리 승리를 거두며 민주당의 3선 중진 의원이자 최고위원으로 우뚝 섰다.

당내에서 그는 거침없는 소신으로 유명하다. 초선이던 2001년 정풍운동을 주도했고 2003년엔 개혁세력의 일원으로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찬성과 대북송금 특검 반대 등으로 당내에서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뚝심 있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관된 포지티브 선거운동에 대한 유권자들 주목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등 공약에 탄력 받을 듯


당 안팎을 가리지 않고 화살을 겨누며 쓴소리를 하는 그에겐 “건방지다” “지나친 비판이다”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그는 “옳다고 믿는 것은 밀고 나가는 ‘황소’같은 스타일 때문”이라고 반론을 편다.

그는 최근 ‘신(新)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공개적으로 대권의 꿈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로 서울시장 출마를 계획했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인물난을 겪자 당 최고위원으로서 ‘희생’을 각오하고 인천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바꿨듯 인천을 바꿔 한국의 심장으로 만들겠다”던 그는 결국 인천시장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민주당 출신 최초의 인천시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천은 그간 서울과 경기도에 비해 보수적 성향을 띠었기에 전통적 야당세력인 민주당이 발 붙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이 천안함 사건을 선거에서 ‘북풍’으로 이용하면서,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전반적으로 약세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앞바다를 지역구로 갖고 있는 지리적 요건으로 북풍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천에서 송 당선자가 이길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당 보다는 송 당선자 개인의 경쟁력을 꼽을 수 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천의 민주당 지지도는 22.2%인데 비해 송 당선자에 대한 적극 투표층의 지지도는 46.8%로 나타났다. 그의 개인 지지도가 당 지지도보다 무려 24.6%포인트나 높았던 것이다. 

또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포지티브 선거운동으로 일관한 것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대 후보는 선거 내내 정책과 공약의 대결이 아닌 송 당선자에 대한 인신비방과 흑색선전으로 일관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의존했다. 하지만 그는 일체 대응을 삼간 채 정책과 비전을 내세운 포지티브 선거운동으로 일관함으로써 ‘당당한 정치인’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얻으며 인천시민들의 선택을 받게 됐다.

앞으로 4년 간 인천시 살림을 꾸려갈 송 당선자의 공약은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도시 균형발전, 교육지원예산 확충 등 시정 전 분야에 걸쳐 있다. 당초 교육 복지 환경 분야 공약이 주를 이뤘으나, 공약을 다듬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장 및 개발 부분이 대폭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

송 당선자가 각별히 공을 들인 공약은 교육지원예산 1조원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천 내 10대 명문고를 선정해 2014년까지 이들 학교에 5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초·중학교 무상급식 실시와 인천장학기금을 매년 500억원씩 증액해 2000억원으로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송 당선자는 또 복지 공약으로 노인 일자리 3만 개 창출과 실버아카데미 개설 등을 제시했다. 노인 틀니 비용의 70%를 지원하고 홀몸노인에게 매주 2회 문안 전화를 드린다는 공약도 눈에 띈다.

교육지원 예산 1조
초중교 무상급식 확대

인천지역 8개 도시재생사업지구 중 상당수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해 송 당선자는 3조원의 도시재창조기금을 조성하여 현재 추진 중인 재개발 및 도시정비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송 당선자는 인천 경제자유구역(FEZ)을 세계 3대 FEZ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국내 첨단기업에도 외국인 투자에 준한 세제혜택을 주고, FEZ에 부품소재 항공정비 바이오 등 고부가가치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매니페스토연구회 간사인 이현출 국회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장(정치학 박사)은 “성장과 분배를 잘 조화시켰고, 앞으로 20∼30년 뒤 인천의 성장모델을 만들려고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하지만 인천의 전체 예산이 7조원인데 경상비를 빼고 나면 사업비는 극히 제한적이다”라며 “도시재생에 3조원, 교육지원에 1조원 등 공약 관련 예산이 수십 조원에 달해 보다 구체적인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영길 인천시장 프로필

학력
1981년 2월  광주 대동고 졸업
1988년 3월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졸업(81학번)
2005년 3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경력
1984년 연세대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 
1985년 인천 대우자동차 르망공장 배관용접공으로 노동자생활 시작
1991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초대 사무국장 
1994년 제36회 사법시험 합격
2000년 - 제16대 국회의원
2002 ~ 2008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2004~ 2008년 제17대 국회의원(재선) 
2004 ~2006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간사
2005 ~ 2007년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2006 ~ 2007년 열린우리당 한미FTA특별위원회 위원장
2007년 - 국회의원연구모임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 공동대표(現)
2008년 - 제18대 국회의원(3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동문회 윤리위원장(現)
통합민주당 인천광역시당 위원장(現)
통합민주당 장외투쟁대책본부장(現)  
 
수상경력
2000년, 2002년, 2006년  국정감사 우수 국회의원 선정  
2003 ~ 2004년  최우수 국회의원 연구단체
2001 ~ 2004년  우수 국회의원 연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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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