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월드컵 신화 쓴 윤덕여 여자축구대표팀 감독

때론 아빠처럼 태극낭자 이끈 때론 오빠처럼 빛나는 리더십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윤덕여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의 과감한 결단이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일궈냈다. 지난 2012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에 감독으로 선임된 이래로 3년 만에 그가 이룬 쾌거다. 과거 대한민국 수비수로 활약했던 윤 감독. 하지만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드문 편이다. 

 
윤덕여 감독은 1961년생이다. 서울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윤 감독은 한국 축구계의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선수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들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축구를 시작하는 것과 달리 윤 감독은 중학교 3학년에야 정식으로 축구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는 악바리로 통하며 쉼 없는 노력으로 팀 훈련은 물론이고, 강도 높은 개인 훈련을 통해 기량 향상을 꾀했다. 
 
수비수로 활약
주목받지 못해
 
이런 노력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으며, 3학년까지 줄곧 주전으로 활약했다. 중3 때 축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괄목상대한 기량 향상이다. 또  경신고 시절 대회 결승전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에도 붕대를 감고 경기를 마칠 정도로 독종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외모를 보면 축구선수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실제로 경기장 밖에서 그는 예의 바르며 학자 타입의 감독이라고 분류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선수시절 경기장 안에서 누구보다 끈질기며 거칠었다. 상대 공격수를 절대 놓치지 않는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유명했다. 코풀소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과감함 태클과 밀착수비를 자랑하는 스토퍼와 수비형 링커로 이름을 날렸다. 스토퍼는 상대의 공격을 개인 방어로 막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다니며 방해하는 역할이다. 링커는 상대방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공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
 

윤 감독은 25년 전인 1989년 5월 한일 정기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1991년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까지 2년간의 짧은 대표생활을 했다. 그동안 윤 감독은 A매치 31경기에 출전하며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빈번히 월드컵에서 고배를 마시며 흑역사를 보내기도 했다. 
 
윤 감독이 현역 선수로 월드컵 무대에 처음 나선 것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예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윤 감독은 벨기에와 1차전에 벤치를 지켰다. 하지만 스페인과 2차전에 당시 대표팀 수비의 핵이었던 정용환 선수 대신 투입돼 스페인의 공격을 이끌던 훌리오 살리나스, 미첼을 전담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결과는 1-3완패. 스페인은 미첼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황보관의 중거리슛으로 1골을 만회한 한국을 무너뜨렸다.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은 윤 감독은 풀타임으로 활약했지만 스페인의 3골을 막지 못했다. 후반 7분에는 경고까지 받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윤 감독은 실낱같은 16강의 희망을 안고 경기한 우루과이 조별 예선 3차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후반에 퇴장까지 당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출천지 흑역사로 남았다.
 
여자축구 사상 첫 월드컵 조별리그 통과
남자축구 48년 걸렸는데 12년 만에 쾌거
 
당시 윤 감독은 우루과이의 골잡이였던 프란세스 콜리를 찰거머리처럼 수비했다. 공격을 차단했던 윤 감독은 전반에 경고 1장을 받았다. 후반전 콜리는 윤 감독의 집중 마크에 신경질이 나 심판이 보지 않는 사이 공이 아닌 윤 감독의 얼굴에 헤딩을 날렸다. 이에 윤 감독은 복수를 시도하는 등 거친 경기를 했다. 후반 25분에 그는 '시간지연 행위'라는 이유로 또다시 경고를 받아 퇴장당한다. 윤 감독의 퇴장으로 10명이 싸운 한국은 후반 종료 직전 폰세카에게 공을 허용해 우루과이에 16강 티켓을 헌납했다. 
 

윤 감독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최인영 골키퍼와 공을 주고 받는 과정을 시간 지연 행위라며 경고를준 심판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라며 “팀의 일원으로 퇴장을 당하지 않았으면 우루과이에 지지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1년가량 대표팀 생활을 했던 윤 감독은 A매치 31경기 출전 기록을 남기고 더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악바리 키운다
강도높은 훈련
 
윤 감독은 한일은행 축구단과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에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프로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는 프로 선수 시절 울산 현대에서 86년 컵대회 1번 우승, 88년과 91년 리그 준우승을 경험했다. 포항스틸러스에서 92년에는 리그 우승을 했다. 특이하게 그는 프로 선수 경력 동안 단 한 번도 퇴장을 당한 기록이 없다. 
 
윤 감독은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선수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윤 감독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온라인 축구 게임 피파온라인에 전설적인 캐릭터로 선정됐다. 그가 현역 시절 어떤 선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2년 윤 감독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다.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포항제철중학교의 축구 감독으로 선임되며 지도자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포항스틸러스의 수석코치를 맡았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일했다. 동시에 아브라함 브람 감독에 뒤를 이어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아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아갔다.
 
 
윤 감독은 2002년 AFC U-16 챔피언십을 비롯해 3개 대회 연속 석권, 22경기 무패행진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청소년대표팀은 축구 기자들 사이에서도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윤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이 해외에서 벌어진 3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며 연속 무패 기록도 세웠다. 이 기록은 지난 2003년 6월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부산국제청소년대회 풀리그에서 아르헨티나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후반전 연속골을 허용하며 0-2로 패해 끝이 났다.
 
이후 16년 만에 2003년 핀란드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3전 1승 2패(한국 1-6 미국, 한국 2-3 스페인, 한국 3-2 시에라리온)를 기록하며 성적 부진으로 사퇴했다. 비록 전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대표팀의 잠재력과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줘 윤 감독은 전도유망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됐다. 사퇴 이후 한달만에 그는 U-18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이후 경남FC, 대전 시티즌의 수석 코치를 맡으며 선수 육성에 힘쓴다. 2007년 윤 감독이 경남 FC 코치로 있을 당시 14개 K리그 감독은 시즌 동안 감독을 잘 보좌한 최고의 코치로 그를 뽑기도 했다. 그는 14명의 감독들로부터 1순위부터 3순위까지 3명씩 코치를 추천을 받은 결과 5명의 감독으로부터 1위로 꼽혔다.  
 
2011년 전남 드레곤즈는 리그 우승을 위해 윤 감독을 기술분석관으로 영입했다. 2012년 8월 정해성 전남 드레곤즈 감독이 감독직에서 사임 후 한시적으로 감독대행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후 하석주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주고 윤 감독은 전남 드레곤즈 수석코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2년 12월 윤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지난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2015년 국제축구연맹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E조 3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면서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2003년 미국 대회에서 처음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태극낭자들은 12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승점4)를 기록하며 조 2위로 사상 처음 16강 진출의 쾌거를 일궈냈다. 
 
“여자 잘 알아”
고독한 승부사
 
이번 성과는 그동안 윤 감독이 쌓아온 성과가 빛을 보는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여자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윤 감독은, 이전까지 남자 선수들만 가르쳤던 지도자다. 때문에 의구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과연 여자들을 잘 이끌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비단 결과 때문만이 아니다. 윤 감독의 지도를 받는 선수들은 절대적으로 윤 감독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 감독은 ‘아빠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술 담배도 가까이하지 않고, 조용한 성품에 말투도 부드럽다. 선수들이 실수하면 윽박지르기보다 안으로 품는 스타일이다. 혹독한 생존 경쟁 속에 축구를 해 온 선수들은 윤 감독의 배려와 믿음에 반했다. 선수들은 윤 감독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관심 속에 도전한 월드컵이지만 하나로 똘똘 뭉쳐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동메달의 주역인 전가을은 “솔직히, 감독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걱정이 있었다. 여자를 가르쳐본 이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지내다 보니 마치 오래도록 여자들만 가르쳐 오신 분 같았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진심이다. 아부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다. 다른 모든 선수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엄청난 신뢰를 보였다.
 

전 선수는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겨주시는 모습에 감동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감독님과 함께라면 정말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리더에 대한 확신을 전했다. 한국 여자축구가 자랑하는 지소연 역시 비슷한 견해를 전했다.
 
지 선수는 윤 감독을 향해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그런데 가끔은 어머니 같은 느낌도 받는다. 말로 표현하기 복잡하다”는 말로 특별한 감정을 표했다. 이어 “이제는 감독님도 여자축구에 대한 적응이 완벽하게 끝나신 것 같다. 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계신다. 무서울 때는 정말 무섭지만, 자상할 때는 한없이 자상하시다”고 말했다..
 
‘히딩크 못지 않다’
선수생활 늦게 시작
3년전 감독으로 선임
 
윤 감독은 이번 경기에서 후반 김수연을 교체 투입을 하며 과감한 승부사의 면모도 보였다.결과는 ‘신의 한수’였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이날 4-2-3-1 포메이션을 가동했다. 원톱은 ‘비장의 카드’ 박은선(로시얀카) 선수였다.
 
하지만 스페인은 경기 초반부터 좌우 측면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은 미드필더 싸움에서 완패하며 전반 30분까지 제대로 된 슈팅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스페인은 한국의 측면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며 최전방 공격수를 향해 절묘한 크로스를 올리기 일쑤였다.
 
이에 따라 야심차게 선보인 박은선 카드도 힘을 쓰지 못했다. 이 틈을 타 공격의 강도를 높인 스페인은 전반 29분 마르타 코레데라의 왼발 크로스를 베로니카 보케테가 득점으로 연결하며 1-0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슈팅(2-8)과 유효슈팅(0-2) 수에서 모두 스페인에 밀리며 전반을 마쳤다.
 
윤 감독은 후반에 승부수를 던지며 맞불작전을 펼쳤다. 전반전 패인을 역이용해 상대를 공략하려 했다. 강유미와 지소연이 좌우 측면 공략에 집중하도록 주문했다. 결국 작전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었다. 스페인 측면 수비를 허물자 한국의 공격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후반 8분 주장 조소현은 측면 강유미의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했다. 1-1 동점이 된 후 윤 감독은 지친 박은선과 강유미 대신 유영아와 박희영을 각각 내보내며 공격의 고삐를 당겼다.
 
선수들 절대 신뢰
배려·믿음에 반해
 
한국은 후반 33분 김수연이 이른바 ‘슈터링(슛+센터링) 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김수연은 박스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시도했지만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골망 구석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측면 공격 강화를 위해 후반 시작과 함께 김수연을 교체 투입한 윤 감독의 선택이 제대로 빛을 발한 셈이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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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