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세계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산악인 오은선

히말라야 품은 ‘철의 여인’ 맘껏 웃을 수 없다


여성의 몸으로 험준한 히말라야 산 봉우리를 14번이나 정복한 산악인 오은선 대장의 인생스토리가 화제다. 산을 접한 후 ‘최초’라는 타이틀을 이미 여러 차례 만들어낸 그였지만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틀을 얻기 위해 달리는 동안 소중한 동료를 잃기도 하고 수많은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 등정 중 목숨을 잃을 뻔했던 순간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봉우리인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는데 성공했다. ‘철의 여인’ 오은선 대장의 지난 13년 히말라야 정복기를 살펴본다. 


걸어온 길·넘어온 산·뛰어 넘어야 할 벽 높다
기록 보유 20인 중 한국인 네 명 국가 위상 업  


여성 전문산악인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지난달 27일 오후 6시15분(한국시간)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은 해발 8091m의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 영하 30도의 기온 속에 초속 12m의 강풍과 맞서며 등반한지 13시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정상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오 대장은 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오 대장이 걸어온 길
산과 사랑에 빠진 25년

이 날 오 대장은 여성 산악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주인공이 됐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한 지 13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오 대장의 기록은 세계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빼놓더라도 충분히 거창하다. 실제 이제껏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은 전 세계 남녀를 통틀어 20명에 불과하다.

그 중 한국인은 네 명으로 앞서 2000년 7월 엄홍길 대장, 2001년 박영석, 2003년 한왕용 대장이 14좌 탈환에 성공한 바 있다. 이들 중 국내 산악인으로는 네 번째로 이름을 올린 오 대장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여성 산악인으로서 ‘최초’라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오 대장의 완등 소식을 들은 이명박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 그를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오은선 대장의 완등은 도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간 승리의 과정이었다”며 “정말 장하고 자랑스럽다”고 축하했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끈질긴 도전 정신으로 ‘인간 승리’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오은선 대장. 그가 이처럼 산에 미쳐 살게 된 것은 25년 전 부터다. 오 대장은 1985년 수원대학교 산악부 동아리에 입회하면서 처음으로 산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인수봉 정상을 밟은 오 대장은 이후 주말마다 산을 찾았다.

직장 생활 중에도 산을 즐기던 오 대장이 히말라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3년이다. 당시 대한산악연맹이 낸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 모집 공고를 본 오 대장은 근무 중이던 서울시 교육청에 사표를 내고 원정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히말라야가 처음부터 그를 반겨준 것은 아니었다. 오 대장은 당시 히말라야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8848m)의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

등반대장의 하산 명령에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것. 당시의 아쉬움과 함께 이후 고산 등반의 매력에 빠져든 오 대장은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정복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정 등반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오 대장은 스파게티 음식점을 운영하거나 컴퓨터 학원 강사, 학습지 교사 등으로 일하며 원정 비용을 마련했다.

오 대장이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였다. 1997년 7월 오 대장은 가셰르브룸Ⅱ(8035m)를 무산소로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등정자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다. 오 대장은 한 인터뷰를 통해 “그때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고산 등반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 대장이 넘어온 산
히말라야가 허락한 14좌

하지만 오 대장의 도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004년 5월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11년 전 곁을 내어주지 않았던 에베레스트가 오 대장에게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등정에 성공하는 영광을 안겨준 것이다. 하지만 손쉽게 얻은 영광은 아니었다. 산소가 떨어져 정신력으로 버티며 하산하다 캠프 텐트를 불과 10m 가량 남겨두고 쓰러졌던 것. 다행히 일본 원정대가 오 대장을 발견, 텐트로 데려가 보살펴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상황은 2006년 시샤팡마(8027m) 등정 길에도 이어졌다. 등정 당시 난데없이 굴러온 얼음 덩어리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눈사태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다. 2007년 5월 초오유(8201m) 등정에 성공한 그는 두 달 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K2(8611m)에 올랐다. 이후 자신감을 얻은 오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완등 플랜을 위해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 오 대장이 ‘철의 여인’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2008년부터는 한 해 무려 4개의 봉우리를 올랐다. 2008년 5월엔 마칼루(8463m), 로체(8516m), 7월엔 브로드피크(8047m), 10월엔 마나슬루(8163m)를 등정했다. 2009년에도 5월6일 칸첸중가(8586m), 5월21일 다울라기리Ⅰ(8167m), 7월10일 낭가파르밧(8125m), 8월3일 가셔브롬Ⅰ(8068m)를 잇따라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오 대장이 뛰어 설 벽
따가운 시선 곳곳에…

빠른 속도로 히말라야 고봉에 올라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선두주자가 됐던 오 대장은 그 해 10월 마지막 고봉인 안나푸르나(8091m)에 올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초속 40m의 강풍과 짙은 안개에 폭설까지 이어져 정상을 불과 600여m 남겨두고 돌아서야 했다. 이후 6개월간의 준비 끝에 재도전한 오 대장에게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는 드디어 정상을 허락했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도 4명의 동료를 잃는 아픔 속에서 5번의 도전 끝에 성공했던 안나푸르나를 두 번의 도전 끝에 품안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히말라야 14좌 완등 성공으로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게 된 오 대장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더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업계 일각의 논란들이 안나푸르나 등정 소식과 함께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탓이다.

오 대장은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독한 X’라는 비난에 휩싸였던 바 있다. 오 대장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중 동료 산악인 고 박무택 대장이 로프에 매달려 숨져 있는 것을 보고도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 대장보다 며칠 앞서 정상에 올랐던 박 대장은 동료들과 정상 등정 후 하산하다 해발 8700m 부근에서 설맹(雪盲)이 와 조난, 끝내 목숨을 잃었다.
 
특히 함께 목숨을 잃은 백준호ㆍ박무택ㆍ장민 등 3명의 동료는 사고 당시 서로를 구조하려다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잃게 된 사연이 전해지면서 오 대장을 향한 반감은 더욱 커졌다. 오 대장은 “당시 상황은 모두 끝났었다”며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동료애에 대한 비난은 한동안 계속됐다. 오 대장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7월 고 고미영 대장이 낭가파르밧에서 실족해 사망했을 당시에도 불거졌다.

비정한 동료애·죽음 내몬 라이벌 경쟁 ‘꼬리표’
완등 논란 히말라야 칸첸중가 재등정 의지 관심


고 대장은 오 대장의 후배이자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이에 산악계 일각에선 고 대장의 죽음이 무리한 속도 경쟁으로 화를 만든 것이라며 오 대장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국내 대표 산악인 중 한 명인 허영호씨는 한 라디오방송에서 “등반은 음미하면서 해야 하는데 이것을 스포츠처럼 경쟁적으로 하다 보면 거기에 따른 무리라는 게 있다”며 “8000m 고봉 3~4개를 1년 사이에 두고 등정하려고 하니까 이런 안타까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 고 대장은 숨질 당시 11개 봉우리에 올랐고, 오 대장은 12개 등정에 성공하며 14좌 완등을 두고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들보다 오 대장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지난해 5월 등정한 칸첸중가(8586m)의 미등정 논란이다. 지난해 말 국내 산악계에는 오 대장이 칸첸중가의 꼭대기, 즉 정상을 밟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오 대장이 칸첸중가에서 찍은 사진이 정상의 모습으로 확신하기 어렵고, 등정 시간도 짧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란은 확산됐다. 오 대장은 눈물의 기자회견까지 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의문점은 여전히 남았다. 이런 가운데 히말라야 등정 기록을 책임지고 있는 미국 산악인 엘리자베스 홀리(86)가 오 대장의 캉첸중가 등정을 ‘논란인 상태(disputed)’로 변경하면서 미등정 논란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특히 최근 오 대장의 또 다른 경쟁자인 에두르네 파사반(36·스페인)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있어 오 대장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오 대장의 입장에선 만약 캉첸중가 등정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사이 경쟁자 파사반이 마지막 14봉 등정에 성공한다면 ‘세계 최초’의 타이틀이 물 건너 갈 수도 있게 된다.

이에 산악계 일각에선 오 대장이 캉첸중가 미등정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캉첸중가를 재등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실제 과거 엄홍길 대장은 1993년 오른 시샤팡마 등정을 두고 시비에 휘말리자 2001년 재등정해 논란을 잠재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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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