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물 만난 유승민 새누리당 새 원내대표

‘할 말 하는’ 화통한 대구 사나이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짤박’(짤린 친박) 유승민(57·대구 동을) 의원이 새누리당의 새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유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4선인 이주영 의원과 원내대표 자리를 놓고 경선을 펼친 결과, 투표 참여의원 149명 중 84표를 얻어 새 원내대표로 확정됐다. 

 
유 원내대표에게는 수많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첫 번째는 ‘원박(원조박근혜)’이고, 두 번째는 ‘탈박(탈박근혜)’, 세 번째는 ‘경제정책통’이다. 거침없는 화법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언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지난 2일 집권여당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15년간 수많은 정치적 부침을 겪다가 이룬 쾌거란 평가다.  유 원내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앞으로 고쳐나갈 것이 많을 것”이라며 “변화와 혁신을 얘기했는데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와 긴밀하게 진정한 소통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하자마자…
미스터 쓴소리
 
이어 “민심이 무엇인지, 무엇이 더 나은 대안인지 같이 고민하는 찹쌀떡 같은 공조를 이루겠다”며 “대신 대통령과 청와대 식구들, 장관들도 더 민심에 귀 기울여주고 당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함께 총선 승리를 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유 원내대표는 굴곡진 정치 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여당 인사다. 정치 무대 한가운데서 화려하게 활동을 하다가도 한순간 무대에서 사라져 버릴 정도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는 1958년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등을 졸업하며,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만기 제대를 했다. 이후 1987년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까지. 전형적인 ‘TK(대구경북)’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특히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위스콘신대학교는 현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안종범 경제수석이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1983년부터 4년간 위스콘신대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는 신고전학파 학풍과 달리 정부 개입의 필요성 등 소신을 피력하고는 했다는 후문이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위스콘신대에서 유학(박사과정)한 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 경제수석과는 상반된 경제철학을 가진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당·정·청의 경제정책 수뇌부가 위스콘신 출신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부동산 부양 등 거시정책을 과감하게 확장 운영해야 한다는 최 경제부총리, 안 경제수석과 달리 유 원내대표는 “국가와 시장만으로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며 소규모 공동체 중심의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적 경제론’을 펴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19대 국회로 3선 반열에는 올랐지만, 그의 정치 경륜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유 원내대표는 박사학위 취득 이후 1987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그의 젊음을 바쳤다. 이 당시 그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해소 연구에 주력했으며, 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 연구에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중장기적 ‘중부담 중복지’ 원칙을 제시하고 스스로 “외교·안보는 보수지만 복지·고용·노동 분야는 리버럴(진보)”이라고 밝힌 그의 철학이 이때 형성된 것이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 TK 출신 

거침없는 화법으로 직언 날려 
 
그는 지난 2000년 초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1982년 초부터 KDI에서 15년여를 근무(미국 위스콘신대 박사와 UC샌디에이고 대학원 초빙교수 기간 제외)했다. 그는 IMF 구제금융 사태인 1997년 말 전에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연구를 내놓았다. 당시 그의 연구주제를 보면 대기업의 성장과 생산성, 민영화 정책, 무역과 산업 정책, 규제개선, 제조업의 기술적 효율성 등 다양하다. 
 
KDI에서 같이 근무했던 관계자는 “유 원내대표는 재벌이나 경제력 집중 연구도 많이 했으며 인간성이 따뜻하고 박사 중심 엘리트주의인 KDI에서 석사 연구원을 배려하는 등 젊은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술회했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장경제와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 등 공동체적 가치에 충실했던 학자”라며 “논리정연하고 글발 좋은 스타 박사였고 동료들과 후배들과 잘 어울렸다”고 기억했다. 다른 KDI 출신 관계자는 명문가(부친이 대구에서 13대(민정당), 14대(민자당) 의원을 역임한 유수호 전 의원) 출신이지만 잘난 척하지 않고 강남좌파 느낌이 좀 났다”고 전했다.
 
경제연구에 몰두
최경환과 각세워
 
이처럼 그는 주로 학계에 몸담고 있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지난 2000년이다. 그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영민함과 정책 능력을 주류 정치권이 인정한 것이다. 이 전 총재의 경제 과외교사 역할을 하며, 2002년 대선에서 최측근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2002년 대선에서 패하면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년여 공백기를 거쳐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사퇴 후 대구 동을에 출마해 지역구에 당선됐다.  
 
지금은 다소 소원해진 관계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역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이 어렵다. 무엇보다 초선 시절이던 2005년 흔들리던 한나라당에 박 대통령이 대표가 돼 원군을 자청했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이 당을 맡아 재건에 나설 당시 비서실장으로 2005년 1월부터 약 10개월간을 보필한 사람이다. 그해 유 원내대표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선 정책메시지 단장을 맡아 박 대통령 캠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원조 친박’으로 분류됐다. 이 인연이 이어져 그는 2007년 이명박 당시 후보 측과 벌인 전대미문의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 책사(정책메시지총괄단장)를 맡는 등 정치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대선 후보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BBK 주가조작 사건’과 재산 은닉 의혹 등 이명박 당시 경선후보와 관련된 온갖 의혹들을 파헤치는 ‘이명박 저격수’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이 내세운 대운하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국민이 가진 식수원 오염 가능성이나 환경파괴 우려에 대한 답이 안 됐다” 대운하를 비판했다. 이어 MB가 골재로 8조원을 충당하겠다는 것도 물량이 동시에 시장에 나오면 가격 폭락이 벌어지는 등 현실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굴곡진 정치 인생사…여권의 숨은 잠룡

청와대 공개 비판 “당청관계 변화 예고” 
 
사실상 ‘유승민’이라는 이름 석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다. 이때 유 원내대표는 활동 범위를 넓혀 이 후보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를 전면에서 방어하는 등 비로소 '정치인 유승민'으로 재탄생했다. 정가에서 그의 계파 성향을 원조 친박으로 분류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1차 칩거'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사안별로만 자기 목소리를 냈다. 특히 4대강 사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친박계의 수장이었던 박 대통령이 침묵으로 4대강 사업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유 원내대표만 비판적 목소리를 계속 냈다.
 
2010년 8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남한강 이포보에서 고공농성 당시 시민단체는 야당과 함께 한나라당도 참여하는 국회 차원의 4대강 검증을 요구했다. 이때 한나라당에서는 유일하게 유승민 원내대표만이 찬성 입장을 보내왔다. 이런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한나라당 내에서는 드물게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러던 중 2011년 개최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용감한 개혁’을 슬로건으로 친박계 주자로 나서 홍준표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전면에 복귀, 화려하게 지도부에 입성했다.
 
이후 ‘유승민표’ 정책을 차근차근 내놨고, 이듬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그의 복지·분배 정책을 차용했다. 그러나 유 원내대표는 만족하지 않았다. 2012년 총선 직전 박 대통령이 주도한 당명 개정에 가장 강력히 반대했고, ‘충성심과 약속’으로만 똘똘 뭉친 친박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았다. 
 

한때 친박계 선봉
지금은 짤박 신세
 
그는 비록 원조 친박이지만 소신이 뚜렷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스타일로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복지와 분재 강화라는 여권 내에서는 파격적인 개혁 정책들을 피력하면서 점차 친박 주류와 거리가 멀어졌다. 
 
박 대통령도 최근에는 그를 중용하지 않는다. 이후 비판적인 발언이 주목을 받으면서 현재 ‘탈박’으로 분류될 정도로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평가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박 대통령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박 전 위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도울 기회는 없을 것”이라는 등의 비판적 목소리를 낸 것도 비슷한 시기다. 또한 그는 사석에서 가끔 이때를 회상하며 “최측근이었지만, 직언을 마다치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도 잠시, 2012년 최구식 의원 측 비서가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해 디도스 공격을 벌였던 것이 알려졌고, 급기야 5개월 만에 지도부 책임론에 밀려 총사퇴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더욱, 그는 ‘원조 친박’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이어 들어선 박 대통령의 비대위 체제에서 배제되면서 결국 세력권과 멀어졌다. 
 
 
이후 '2차 칩거'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였다. 그는 독특한 색깔의 ‘탈박’이고자 했다. 비박(비박근혜) 성향이 강한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지지그룹을 형성했다는 말도 나왔다. 지난해 7월 전대에선 김무성 대표가 아닌 친박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을 지원하는 파격도 선보였다. 
 
유 원내대표는 이제 새로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누군가의 참모’ 이미지를 벗고 ‘자기 정치’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벌써부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당·청 관계는 물론 여당 전반의 폭넓은 개혁을 선도할 것이란 기대다. 
 
지난해 10월에는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얼라들’이라며 청와대 비서실 인사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뒤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으로 ‘문고리 3인방’, ‘십상시’등이 회자되면서 그날의 발언이 다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른바 ‘K·Y설’로 정윤회씨 문건 유출 배후로 김무성 대표와 함께 거론돼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해 9월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최준영 작가가 여·야 대권주자에 대해 짧은 평이 회자가 됐다. 그는 유 원내대표를 “아직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여권의 히든카드”라고 평가했다. 유 원내대표에 대한 이런 우호적인 평가는 입때껏 그가 보여준 상식에 맞는 행보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이후 원내대표로서 어떤 행보를 할지,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한편 유 원내대표의 등장은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여전히 전략 등의 부재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야당의 심각한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정기국회 때까지 ‘증세’냐 ‘복지 축소’냐의 결론을 내겠다는 유 원내대표는 그동안 부동산 부양 등 ‘초이노믹스’에 대해 “돈만 날릴 뿐”이라고 비판했다. 김세연·이종훈·민현주 의원 등 당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 회원들이 이번에 그를 집중 지원한 것도 그의 이 같은 철학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유 원내대표가 국책 싱크탱크에서 정책제언을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야당에서도 서민 이슈를 선점당할까 봐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19대 총선 때 KDI 연구원 시절 작성한 논문의 중복게재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 후보의 과도한 흠집내기란 평가가 우세했다. 
 
유 원내대표는 17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총 26건의 법안 발의를 했다. 경제정책통 정치인에겐 다소 적은 개수다. 전문분야인 경제와 동떨어진 국방위원회에서 간사와 위원장을 역임했다. 최근 인권교육지원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부수단체의 반발에 못 이겨 철회해 아쉬움을 남겼다. 
 
새누리당 텃밭 대구에 지역구를 두고있을 뿐 아니라 대구 지역을 넘어 TK 맹주로 떠올랐다. 이 지역 의원들의 공천과 당선에 영향력을 미칠 전망이다. 친이, 친박 이후 뚜렷한 계파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이른바 ‘유승민계’를 형성해 독자 세력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와대의 관계에 의문부호가 따라붙은 후 김무성 당 대표와 갈등 관계를 해소해 당내 기반을 강화했다.  향후 김 대표와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지 관건이다.
 
파격적인 정책들
독자세력 가능성
 
화통한 대구 사나임은 틀림없다. 이번 원내대표 선거에서 가장 약점으로 지적된 것이 동료 의원들과 친화력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또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감 요소가 부족하다는 평가다.
 
재산규모는 2013년 말 기준으로 30억6400만원, 지역구인 대구뿐 아니라 서울 강남과 경기도 분당 일대에 약 14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유승민은?]
 
▲1958년 대구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 ▲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장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 ▲한나라당 박근혜 선거대책위 정책메시지 총괄단장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 2012년 국회 국방위원장 ▲17·18·1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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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