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옥(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이 털어놓은 정치비화

“DJP연합, DJ보다 내가 먼저 사인했다”

바쁘게 지나온 질곡의 정치사를 뒤로하고 새롭게 정치권으로 돌아온 이가 있다. 한광옥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다. 한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가능케 한 이른바 ‘DJP연합’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며, 초대 노사정위원장으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청와대 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지내며 두 번의 정권 창출 역사의 중간에 서 있었다. 6년간의 정치적 변혁기 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지난 1월 친정인 민주당에 복당한 한 전 대표. 입 무겁기로 유명한 그를 만나 그간 말하지 못했던 정치비화를 들어봤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산  1년10개월 “뒤에 선 조정자 역할”
‘노무현 대통령’ 만든 국민경선제, 밝히지 못하는 속내


1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태풍의 눈’ 안에서 우리 정치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함께한 한광옥 전 대표가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8월 특별복권을 계기로 정치적 자유를 얻어 민주당에 복당한 것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 4월 재보선에서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 여의도로 돌아왔다고 끊어졌던 정치생명이 이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선으로의 복귀를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경선에서 졌다. 잡음이 많았던 경선이었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나서면 승리가 확정적이라는 분석이 있었기에 그의 향후 행보를 앞서 짐작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그는 깨끗이 승복했다. 게다가 국회의원 재선거 지원유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정치적 고향 찾은 한광옥
‘민주대연합’서 DJP를 추억하다

한 전 대표는 최근 당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정동영 전 장관의 복당에 대해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는 말로 복당에 찬성표를 던졌다. 민심은 정 전 장관에게 공천을 주라고 했는데 이를 무시한 당 공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탈당을 한 게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 큰틀에서 생각했어야 했다”면서 “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당 정책을 대통령을 만들거나 집권당이 돼서 실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인은 당의 결정에 승복했음에도 당의 공천 배제 결정에 뛰쳐나가 무소속연대까지 꾸린 정 전 장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한 전 대표의 주장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건 그가 지나온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한 전 대표는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연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는 “과거 DJP연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국민의 정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DJP연합이 이룬 성과가 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DJP 연합은 정권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경험 삼아 비춰보면 정권은 쉽게 창출되지 않는다. 조직·홍보·정책 등 야당이 집권당의 1.5배의 힘을 더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이 모여야 한다. 민주대연합은 집권을 위해 필요하다. 집권을 위해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이념과 정체성 등에 동조하고 동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여야 한다. 사사로운 욕심이 앞서면 안 된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사람 전체를 모아야 한다.”
한 전 대표는 그간 말하지 않았던 ‘DJP’연합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DJP연합이 이뤄진 건 1997년 11월3일이었다. 1996년 5월4일 DJ와 JP의 국회 회동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뒤 1년여가 넘어서야 간신히 성과를 이룬 것이다. 12월18일 치러질 선거를 50여 일 앞둔 아슬아슬한 타협이었다.

한 전 대표는 이 DJP연합을 통해 헌정사 최초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부총재였던 한 전 대표와 김용환 전 자민련 부총재간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10월20일까지도 줄다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선거는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 김용환씨에게 ‘선거 끝나면 합의할 거냐’고 말했다. 우리끼리 먼저 합의를 하고 DJ와 JP에게 합의문을 들이밀자고 했다.”
결국 모 호텔에서 만난 한 전 대표와 김 전 부총재는 10월25일 만들어진 합의문 초안을 마지막으로 검토한 후 사인했다. 이후 총재들에게 사후결재를 받았다.

팽팽한 줄다리기 끝 합의
타협 뒤 숨은 이야기

한 전 의원이 사무총장 시절 시작해 부총재가 됐을 때 마무리 지은 값진 성과였지만 발표는 미뤄졌다. 10월30일 MBC 후보연설에서 JP가 DJ를 밀겠다고 하고 발표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던 것. 그 외엔 비공개를 하자고 철썩같이 약속했다. 한 전 대표는 당시 ‘자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밤 9시 반이나 10시쯤 나와 김용환씨, DJ와 JP 4명이 만나 차를 한잔 마셨다. 내가 김용환씨와 먼저 나오고 DJ와 JP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탑 기사로 ‘DJP연합’이 보도된 것.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제외한 다른 언론사 출입기자들이 다 바뀌는 소동이 일어났다. 뿔난 언론에 의해 DJP연합은 형편없는 것처럼 비하됐고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한 전 대표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그러나 결국 DJ는 당선됐고 그간의 노력은 빛을 봤다.    
“합의문을 만들 때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합의문이 자민련의 내각제를 수용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리 힘들었어도 내각제 시도는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약속이니까. 그 점이 아쉽다.”


휴가 가려다 잡힌 발목
초대 노사정위원장의 탄생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한 전 대표의 짐은 덜어지지 않았다. DJ가 당선인 신분이 되고 대선을 거치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지방으로 가려던 그에게 만나자는 DJ의 전화가 왔다.
삼청동 인수위원회로 간 한 전 대표는 “위기다”라는 말로 시작된 DJ의 부탁에 다시 짐을 떠안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 외화잔고가 턱없이 모자랐다. DJ는 “IMF에 돈을 빌려오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노사문제가 안정돼야 한다”고 했다. 비상경제대책위(김용환 위원장)는 꾸려졌지만 노사정위원회의 일이 우선이었다. 그에게 노사정위원회를 꾸려 노사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노사정위원회를 꾸리기 위해 경제기획원장관과 노동부장관, 전경련, 경총, 한국노총, 민주노총, 각 당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차관급 실무위원들을 배치하고 실무위원들을 보좌할 전문위원을 구성, 3층집을 지었다.
노사정위원회의 조항을 하나 만드는 것도 힘들었다. 양 노총을 설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큰일을 하고 있었지만 환경은 열악했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노동위원회에서 방을 빌려 일을 해야 했다.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사무실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회의를 가졌다. 한 달여 간 소주 한 박스를 마셔가며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까지도 타협이 안 됐다. 당시 합의가 될 때까지 거의 현장중계로 방송을 탔다. 7시 반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는데 8시 반이 돼서야 합의했다. 문제조항이 있었는데 합의를 해주는 사람의 ‘목’이 달아날 판이어서 쉽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가 부도나면 기업체도 부도가 나고 그럼 노동현장도 없어진다’고 직설화법으로 설득했다.”
정공법은 그만큼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감정적 동질감이 없으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 도움이 됐고 결국 양측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 전 대표는 사측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한다. 상생한다고 생각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지금도 노사문제가 많이 일어나는데 대화가 부족하고 그로 인해 인식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사업자는 솔직해야 한다. 재무재표를 보여주고라도 노동자를 납득시켜야 한다. 불신이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노동관이 많이 달라져서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동자 입장을 알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고용주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노동운동도 성숙해지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노사정위원장으로 대타협을 이뤄낸 데 대해 한 전 대표는 “국가에 대해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대 노사정위원장으로서의 자부심도 적지 않다.
“사회협약기구 아니냐. 풀어나가면 안 될 것 없다.”
2000년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관료도 아니고 정치인이다 보니 당정간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잘 했다고 자부한다. 1년 10개월여 동안 큰 트러블 없이 정치적 안정이 이뤄지지 않았나.”

한 전 대표는 청와대에서 지낸 기간 동안 휴가 한 번을 못 갔다. 수석들은 보냈지만 그는 가지 못했다. “당신 없으면 나라 운영이 안 되는 듯 행동한다”는 집사람의 책망도 들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매사를 섭렵해야 했다. 부처 막후에서 갈등을 조절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전 노사관계도 막후에서 조절해서 풀어냈다. 사장과 노사위원장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2001년 9월 당정개편으로 한 전 대표는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됐다. 대표시절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단연 ‘국민경선제’를 만든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후보가 나왔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중산층 이하까지 포함시켜 힘을 모아야 했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했다. 노무현을 띄우고 정권을 재창출해야 했다.”
그가 국민경선제를 만든 배경이다. 추진과정에 진통도 많았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진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뭣 하러 하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집권을 목표로 했을 때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한 전 대표는 국민경선제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국민경선제의 진통을 겪은 이들이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자크’가 닫힌 것.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노 대통령’ 만든 국민경선제

그는 마지막으로 후배 정치인들에게 ‘온고지신’을 새기라고 강조했다. “과거 정치엔 질서가 있었다. 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선과 능력있는 이들, 당직이 존경받고 존경하려고 하는 풍토였다. 불만이 있어도 스스로 이해하고 질서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질서가 많이 약해졌다. 노장청의 조화를 이루고 균형감각을 가지라고 하고 싶다. 우리만 당 위하고, 우리만 능력이 있고, 우리만 개혁자라고 하면 다른 이들은 비개혁주의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한 전 대표는 “정치도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서 “도덕과 윤리 같은 것도 강조하고 싶다.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진실해야 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성을 주지 못하면 허구가 판치게 되고 이는 언젠간 노출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도를 걸으라고도 하고 싶다. 무소속 출마로 실리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30년 정치인생이 정도를 걸으라고 하더라. 정도를 걸음으로써 손해를 보는 선비정신도 보여주고 싶었다. 정치의 정도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다시 깨달았다”고 말했다.
외롭고 힘들어도 뚜벅뚜벅 걸어 후배의 귀감이 되겠다는 한 전 대표. 그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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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