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푸틴의 종전 카드, 트럼프 평화안과 재편되는 유럽 질서

우크라이나 전쟁 3년 차, 상황이 다시 급격히 출렁이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군이 철수하면 즉시 전투를 멈출 것”이라는 조건부 종전 의사를 밝히면서 전쟁의 향방은 돌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평화안을 “향후 협정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고 평가하며 협상 모드로 선회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유화 제스처’ 속에 감춰진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우크라이나군 철수 요구, 젤렌스키 대통령 배제, 점령지 인정, 전략적 안정과 핵실험 카드까지, 푸틴은 외교·군사·국내정치·정보전이 결합된 복합 전략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다.

문제는 푸틴의 전략이 유럽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미국 내 트럼프식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기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우크라이나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지인과 대화하면서 푸틴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푸틴의 조건부 휴전 전략

푸틴의 발언은 단순한 조건부 휴전을 넘어 전장의 힘을 외교 테이블로 끌어오는 전형적 전쟁과 외교 병행 전략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CSTO 정상회의 직후 우크라이나군이 현재 위치에서 철수하면 전투를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반대로 철수하지 않으면 군사적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경고했다.


휴전 제안과 군사 압박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다.

이 발언은 휴전의 진정성이 아니라 먼저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한 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적 의도로 보인다. 그는 전황 보고에서도 포크로우스크·미르노흐라드·볼찬스크 등 주요 격전지에서 포위가 완성됐다고 강조하며 러시아군의 군사적 우세를 과시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과 탈영 증가를 부각한 것도 정보전에 가깝다. 이는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를 흔들고, 미국과 유럽 내부의 전쟁 피로감을 자극해 정치적 압박을 키우려는 계산이며, 결국 ‘조건부 종전 선언’은 휴전 제스처라기보다 향후 군사 공세의 명분을 쌓는 데 더 방점을 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평화안의 진짜 핵심

푸틴은 트럼프 평화안이 향후 종전 협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강조한 핵심은 평화안 자체가 아니라, 영토 문제의 처리 방식이었다. 그는 미국 문서를 정식 합의안이 아닌 ‘쟁점 목록’으로 규정하면서도 논의할 가치는 인정했다. 그러나 협상의 중심은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데 있다고 못 박았다.

푸틴에게 이 두 지역은 이미 헌법에 편입된 ‘국가 영토’이며, 그는 트럼프 평화안을 이용해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절차로 연결하려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고 러시아가 설정한 전선을 국제 기준으로 굳히기 위한 설계다. 푸틴에게 실질적 목표는 영토 확정에 있다.

결국 트럼프 평화안은 중립적 해법이 아니라, 러시아가 만든 영토 현실을 제도화하는 도구에 가깝다. 푸틴의 진짜 목표는 크림반도·돈바스의 공식 승인과 우크라이나군 철수를 통한 전선 고정이며, 그는 전투 중단을 조건으로 내세운 완충지대 구상을 활용해 전쟁에서 얻은 이익을 장기적으로 봉인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필자도 이 지점에서 트럼프 평화안이 ‘중립적 제안’이 아니라, 러시아가 형성한 전선을 제도화하려는 장치라고 본다.

젤렌스키 배제 의도 노출

푸틴이 이번에 반복한 핵심 메시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협상 상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젤렌스키의 임기 만료와 계엄령 하의 선거 미실시를 근거로 현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법적 정당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이들과의 종전 협정은 국제적 승인도 어렵다고 강조한다.

이 발언은 단순한 공세가 아니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 재편을 요구하는 압박이다. 푸틴은 협정 체결 의지를 언급하면서도 현 지도부와는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으며, 사실상 “협상 가능한 새로운 파트너를 세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평화안의 ‘협정 후 100일 내 선거’ 조항이 겹치며, 푸틴의 정당성 부정 논리와 트럼프식 조기 선거 요구는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정치체제의 재구성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푸틴은 이 조항을 이용해 자신이 원했던 협상 파트너 교체 요구를 국제 협상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위트코프 논란과 유럽 반발

미국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와 러시아 우샤코프 보좌관의 통화 녹취 유출은 이번 국면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녹취에는 위트코프가 러시아 요구에 공감하거나 조언하는 듯한 장면이 담겼다는 보도가 나오며, 우크라이나 정치권은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우크라이나 의원들은 위트코프를 중립적 중재자가 아니라, 사실상 러시아의 파트너에 가깝다고 비판했고, 일부는 이번 사건이 미·러 간 공모처럼 보인다고까지 지적했다.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로서는 미국 특사의 기울어진 태도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의회는 트럼프 평화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키며 러시아에 유리한 합의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협상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불신과 유럽의 반발이라는 ‘정치적 마찰’을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으며, 미·러 협상이 속도를 내더라도 동맹 조율에서 쉽게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대표단 방러의 의미

푸틴이 미국 대표단의 방러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 국면을 미·러 직접 협상 구도로 전환하려는 의지 표명이다. 그는 대표단 구성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이라고 강조하며 미국 내 트럼프의 위상을 부각시켰고, 위트코프 편향 논란에도 미국이 여전히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푸틴에게 미국 대표단 방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제무대에서 트럼프의 대러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며,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미·러 양자 협상으로 끌어내 유럽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전략적 효과가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큰 틀의 방향을 정하면 유럽은 뒤에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또 그는 전략적 안정성과 핵군축 문제를 함께 묶어 논의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협상 범위를 확대했다.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 만료, 핵실험 가능성, 유럽 안보 보장 등을 패키지로 제시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핵·미사일 통제 및 유럽 안보 재편과 연결하려는 계산이며, 유럽 공격 의사가 없다는 발언 역시 실질적 평화 약속이 아니라,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카드에 가깝다.

푸틴의 전장·외교 병행술

푸틴의 발언을 관통하는 핵심은 전장·외교·내부 정치를 동시에 활용하는 ‘3중 레이어 전략’이다. 그는 전장에서 포위·진격·우크라이나군 손실을 과시하며 전쟁 우위를 강조하고, 이를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

병력 손실과 탈영 사례를 반복해 서방 여론에도 ‘러시아 우세’ 이미지를 심어 협상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외교적으로는 트럼프 평화안 논의를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전략적 안정성·핵군축·유럽 안보 보장 같은 대형 의제를 패키지로 묶어 미국을 중심 무대로 끌어오고, 유럽에겐 공격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를 활용해 내부 분열을 자극한다.


푸틴은 유럽을 하나의 단일 파트너가 아닌 이해관계가 다른 주체들의 집합으로 만들며, 러시아와의 타협 가능성을 열어두는 세력에게 명분을 주려 한다.

또 그는 젤렌스키 정당성을 부정하며 협상을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 재편과 연결시키고 있다. 전쟁 이후 조기 선거를 포함한 트럼프식 해법을 활용해 우크라이나 정치체제 자체를 흔들고,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 파트너가 등장할 때까지 전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러시아가 완충지대를 만들고 점령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면서 NATO 동진을 역으로 차단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유럽이 미·러 협상의 주변부로 밀릴 수 있다는 점까지 계산에 넣고 있다.

평화 아닌 승리 고착 전략

필자는 푸틴의 조건부 종전 선언이 ‘평화를 향한 문’이 아니라, ‘전쟁 결과를 영구화하려는 문턱’에 가깝다고 본다.

푸틴의 ‘조건부 종전 선언’은 표면상으로는 협상의 문을 연 것처럼 보인다. 우크라이나군 철수, 전투 중단, 미국 평화안 논의, 유럽 공격 포기, 전략적 안정 논의 준비 등 그의 발언은 하나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타협과 평화의 언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언어들을 모두 모아 보면, 그 방향은 전쟁 종식 자체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얻은 성과를 제도적으로 고착화하려는 전략으로 수렴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이제 동부 전선에서의 군사력 대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식 외교의 성격, 유럽 내부의 정치적 균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의 정치체제 문제, 그리고 핵군축과 유럽 안보 조약 개편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구조 속에서 재단되고 있다.

푸틴은 바로 그 구조의 중심에 서서 전쟁의 종식을 말하면서도, 전쟁의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착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전의 문은 열린 듯 보이지만, 그 문이 향하는 방향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다. 그 문 너머에는 유럽 안보 체제의 새로운 시작점, 그리고 러시아가 설계한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지인은 필자와 헤어지면서 “푸틴은 언제나 ‘종전’이 아니라 ‘전선 고착’을 주장했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고착점이 마련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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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