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큰 등불’고 김수환 추기경

부디 하늘에서도 ‘큰 사랑’ 펼치소서


일제하 유년시절 ‘난 황국신민이 아님’ 쓰기도
군홧발엔 서릿발로…소외된 이들의 영원한 ‘벗’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향년 87세로 선종(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 했다. 선종 전까지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 격동기를 거쳐 오면서 때론 용기 있는 발언으로, 때론 중용의 침묵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워왔다.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데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이기에 종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그동안 과분하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십시오.”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으로 선종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뒤 7개월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김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사람들에게 “고맙다”라며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연소 추기경 임명

이날 임종을 지켜본 정진석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화와 화해였다”며 “평소에 김 추기경이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기도해 달라”고 전했다.

고인이 된 김 추기경은 민주와 정의의 기치를 지켜온 수호자로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 편에 섰다. 또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970~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해 군홧발에 맞서 서릿발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가톨릭계는 물론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김영석(요셉)씨와 어머니 서중하(마르티나)씨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 추기경은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당시 그의 꿈은 장사꾼이었다고 한다. 8살에 부친을 여윈 소년 김수환은 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사제의 길을 권유받았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성종합학교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병도 부려보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제가 신학교 들어올 때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오지 않았고 신부되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없었다. ‘나가야겠다’ 그러니까 그 신부님이 저보고 ‘신부라는 것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되기 싫다고 되지 않는 게 아니야. 나가’ 그래서 내가 ‘어디로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내방에서 나가’라고 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한 김 추기경은 졸업반 수신 과목 시험 때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라는 문제가 나오자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고 한다.

일제치하로 조국이 암울하던 1941년에는 일본 동경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학교를 다니던 학생 김수환은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서야 조국 해방을 맞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곧바로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했다. 그로부터 5년 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던 1951년 대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9살에 사제품을 받은 김 추기경은 안동 목성동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다.

김 추기경은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나누어 줄 정도로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며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후 대구 대목구장 비서신부와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시절 그는 뮌스터대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에게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마침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던 독일에서는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다. 이어 1966년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이와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2년 뒤엔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항상 약자 편에서
민주·정의 가치 지킨 수호자

서울대교구장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은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며 교회쇄신과 현실 참여 의지를 나타냈다.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도 잠시, 독재와 억압으로 점철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미사 때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며 3선 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강력히 비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내가 보기에도 자꾸만 독재 쪽으로 기울어진단 말이야. 그게 정말 안타까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말을 비출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사는 전국에 생중계됐으나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됐다.

1972년 8월9일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7·4남북공동성명발표와 8·3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 혼란 중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체제를 비판하는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성모병원이 세무사찰을 받는 등 정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메시지 발표와 관련해 김 추기경은 “내가 강조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결코 유일사상이라든지 독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고 밝혔다.

유신 이후에도 불법단체로 지목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로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별세)가 구속되는 등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됐다.

정부의 교회 탄압이 자행되자 김 추기경은 각종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럴수록 김 추기경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도청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김 추기경은 “거기에 드나드는 경찰간부도 있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자주 주교관에 드나들고 어떨 때는 죽치고 앉아있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의 사회 참여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한 것으로 시작됐다.

김 추기경은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며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고 밝혔다.

이후 1997년 김영삼 정부 들어 5·18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 큰 어른으로서
희망메시지 전달 잊지 않아

1987년 1월14일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당시 경찰은 심문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떼고 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강변했다.

이를 계기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학생·시민들의 분노가 정점에 이르러 6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김 추기경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진입하자 이들을 강제연행하려는 정부에 단호히 맞서 시위대의 안전을 지켰다. 또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김 추기경은 “여기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내 뒤에 신부들이 있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을 만난다”며 시위대를 뒤로 물렸다.

1990년대 들어 그는 외국인 노동자와 철거민, 조선족 사기 피해자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의 곁에 항상 함께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을 착취한다든지 비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며칠 전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는데 인도주의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IMF 경제 위기와 북한 식량난 등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시대의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김 추기경은 “교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손길을 펴야 된다. 그렇게 볼 때 북한동포가 제외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동포이기 때문에 그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뭔가를 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1998년 그는 76세의 나이로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표한 지 6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김 추기경은 교구장 은퇴 후에도 낙태와 자살 등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를 개탄하며 그야말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형제도 폐지와 낙태 반대 등 생명 운동에 적극 헌신했다.

또한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사회 곳곳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기증 서약을 한 데 이어 2006년 7월에는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장기기증 서약서를 제출하면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망 시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지난 16일 선종 당시 각막은 적출돼 기증됐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힘은 우리 자신, 아니 나부터 먼저 생각과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서 나온다”고 강조했던 김 추기경. 한국 사회에 던지고 있는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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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