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큰 등불’고 김수환 추기경

부디 하늘에서도 ‘큰 사랑’ 펼치소서


일제하 유년시절 ‘난 황국신민이 아님’ 쓰기도
군홧발엔 서릿발로…소외된 이들의 영원한 ‘벗’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향년 87세로 선종(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 했다. 선종 전까지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 격동기를 거쳐 오면서 때론 용기 있는 발언으로, 때론 중용의 침묵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워왔다.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데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이기에 종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그동안 과분하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십시오.”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으로 선종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뒤 7개월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김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사람들에게 “고맙다”라며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연소 추기경 임명

이날 임종을 지켜본 정진석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화와 화해였다”며 “평소에 김 추기경이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기도해 달라”고 전했다.

고인이 된 김 추기경은 민주와 정의의 기치를 지켜온 수호자로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 편에 섰다. 또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970~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해 군홧발에 맞서 서릿발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가톨릭계는 물론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김영석(요셉)씨와 어머니 서중하(마르티나)씨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 추기경은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당시 그의 꿈은 장사꾼이었다고 한다. 8살에 부친을 여윈 소년 김수환은 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사제의 길을 권유받았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성종합학교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병도 부려보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제가 신학교 들어올 때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오지 않았고 신부되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없었다. ‘나가야겠다’ 그러니까 그 신부님이 저보고 ‘신부라는 것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되기 싫다고 되지 않는 게 아니야. 나가’ 그래서 내가 ‘어디로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내방에서 나가’라고 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한 김 추기경은 졸업반 수신 과목 시험 때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라는 문제가 나오자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고 한다.

일제치하로 조국이 암울하던 1941년에는 일본 동경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학교를 다니던 학생 김수환은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서야 조국 해방을 맞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곧바로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했다. 그로부터 5년 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던 1951년 대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9살에 사제품을 받은 김 추기경은 안동 목성동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다.

김 추기경은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나누어 줄 정도로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며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후 대구 대목구장 비서신부와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시절 그는 뮌스터대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에게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마침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던 독일에서는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다. 이어 1966년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이와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2년 뒤엔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항상 약자 편에서
민주·정의 가치 지킨 수호자

서울대교구장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은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며 교회쇄신과 현실 참여 의지를 나타냈다.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도 잠시, 독재와 억압으로 점철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미사 때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며 3선 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강력히 비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내가 보기에도 자꾸만 독재 쪽으로 기울어진단 말이야. 그게 정말 안타까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말을 비출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사는 전국에 생중계됐으나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됐다.

1972년 8월9일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7·4남북공동성명발표와 8·3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 혼란 중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체제를 비판하는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성모병원이 세무사찰을 받는 등 정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메시지 발표와 관련해 김 추기경은 “내가 강조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결코 유일사상이라든지 독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고 밝혔다.

유신 이후에도 불법단체로 지목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로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별세)가 구속되는 등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됐다.

정부의 교회 탄압이 자행되자 김 추기경은 각종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럴수록 김 추기경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도청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김 추기경은 “거기에 드나드는 경찰간부도 있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자주 주교관에 드나들고 어떨 때는 죽치고 앉아있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의 사회 참여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한 것으로 시작됐다.

김 추기경은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며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고 밝혔다.

이후 1997년 김영삼 정부 들어 5·18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 큰 어른으로서
희망메시지 전달 잊지 않아

1987년 1월14일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당시 경찰은 심문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떼고 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강변했다.

이를 계기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학생·시민들의 분노가 정점에 이르러 6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김 추기경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진입하자 이들을 강제연행하려는 정부에 단호히 맞서 시위대의 안전을 지켰다. 또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김 추기경은 “여기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내 뒤에 신부들이 있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을 만난다”며 시위대를 뒤로 물렸다.

1990년대 들어 그는 외국인 노동자와 철거민, 조선족 사기 피해자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의 곁에 항상 함께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을 착취한다든지 비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며칠 전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는데 인도주의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IMF 경제 위기와 북한 식량난 등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시대의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김 추기경은 “교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손길을 펴야 된다. 그렇게 볼 때 북한동포가 제외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동포이기 때문에 그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뭔가를 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1998년 그는 76세의 나이로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표한 지 6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김 추기경은 교구장 은퇴 후에도 낙태와 자살 등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를 개탄하며 그야말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형제도 폐지와 낙태 반대 등 생명 운동에 적극 헌신했다.

또한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사회 곳곳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기증 서약을 한 데 이어 2006년 7월에는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장기기증 서약서를 제출하면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망 시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지난 16일 선종 당시 각막은 적출돼 기증됐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힘은 우리 자신, 아니 나부터 먼저 생각과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서 나온다”고 강조했던 김 추기경. 한국 사회에 던지고 있는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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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