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단일화’ 야권 최악의 시나리오

죽 쒀서 개 줄라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경선판을 두고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묘한 기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야권 내에서는 서로를 향한 ‘난타전’이 계속될수록 여권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고성준 기자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에 대한 국민의힘의 반응이 싸늘하다. 안 대표가 국민의힘 입당을 거절하자 ‘무시 모드’로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제1야당을 중심으로 단일화를 이뤄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식이다. 반면 안 대표는 입당 불가 입장을 고수하며, 야권 밖 단일화 경선을 제안했다. 그는 “만약 제가 탈당하고 입당한다면 기존에 국민의당을 지지하던 분들이 야권 단일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며 입당에 선을 명확히 그은 바 있다.

주도권 싸움
무시 모드로

국민의힘은 안 대표와의 줄다리기가 진전을 보이지 않자, 그를 ‘패싱’한 채 자체적인 경선 작업에 나섰다. 당은 지난 22일부터 공천 서류 심사에 착수한 상태다. 당내 예비 후보만이 심사 대상으로 오는 26일까지 예비 경선 절차를 그대로 진행해 본 경선에 올라갈 4명의 후보를 뽑는다.

당외 인사는 예비 경선과 본경선 모두 참여가 불가하다. 자체 타임라인대로 경선 시스템을 가동할 테니 참여를 원하는 외부 주자들은 알아서 입당하라는 것이다.

국민의힘의 태도에 안 대표는 내심 조급해 보인다. 안 대표는 본인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 단일화에 실패할 경우 정치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대권을 포기하고 체급을 낮춰 참여한 서울시장 선거마저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국민의힘 밖에서 판을 키워 야권 후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경선’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안 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당에 국한되지 않고 여권을 이길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국민의힘 경선 플랫폼을 야권 전체에 개방해 달라. 제1야당이 주도권을 갖고 야권 승리를 위한 게임메이커가 되어주면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제안했다. 제1야당이 야권 인사들을 포함한 경선을 짜면 따르겠다는 것이다.

안 대표의 제안은, 국민의힘 후보 ‘빅2(나경원·오세훈)’ 중심으로 판이 돌아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속내로도 볼 수 있다. 국민의힘 경선이 본격화되면 여론에 밀려 이후 단일화를 하더라도 안 대표에게 불리할 수 있다.

개방형 경선 제안했지만…딱 자른 김
닫힌 국힘 경선 열차…안은 결국 패싱

하지만 국민의힘은 안 대표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안 대표) 본인도 공당의 대표인데, 지금 다른 당에서 실시하는 경선 과정에서 무소속 이름을 걸고 같이 (경선을) 하겠다는 게 정치 상식에 맞는 얘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이 내년 대선까지 준비해야 하는 정당이라는 것을 인식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덧붙였다.

정진석 공천관리위원장 역시 “안 대표의 제안은 안 대표가 지금까지 선호해온 원샷 경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거절의 뜻을 표했다. 이에 안 대표는 “중요한 건 저를 이기는 게 아니지 않나. 저는 문재인정부와 싸우는데 제1야당은 안철수와 싸우는 것 같다”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당 후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분위기다. 안 대표의 개방형 통합 경선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일부 의원들조차 돌아섰고, 서울시장 유력 후보들 역시 미지근한 입장이다.
 

▲ ‘박원순 시장 잃어버린 10년, 재도약을 위한 약속’ 행사 갖는 국민의힘 ⓒ박성원 기자

나경원 전 의원은 “당이 현명하게 결정하는 게 맞다. 어떠한 경선 룰도 좋고, 그걸 안 대표가 정해도 좋다는 게 제 입장”이라고 밝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공관위가 안 대표 등 당밖 인사가 참여할 경우를 대비해 100% 여론조사로 결정했는데 그 이상의 개방형 경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국민의힘 예비후보로 그 절차에 맞춰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입장을 내놨다.

무소속으로?
외로운 안

국민의힘은 당을 중심으로 선거를 끌어가는 게 옳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102석을 가진 공당이 단일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당과 후보들의 입지 역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국민의힘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인물이 10명에 가깝다. 당적이 다른 외부인사를 아무 조건 없이 올릴 시 후보자들의 반발은 물론, 당원, 지지자들의 이탈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만약 안 대표를 중심으로 판이 돌아가면 당의 위세가 대선 정국에서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안 대표로 단일화가 이뤄지면, 오는 재보궐선거는 그의 ‘1인 플레이’가 된다. 안 대표가 선거에서 이기게 되더라도 ‘대선’에서 국민의힘의 존재감이 한풀 꺾이게 되는 셈이다.

김 위원장이 국민의힘 후보 배출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경선 과정에서 국민의힘 후보들에 대한 여론 주목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경쟁력을 키운 다음, 3월 국민의힘 최종 후보를 안 대표 등과의 단일화 경쟁에 내보내 승리하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

국민의힘의 흥행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연일 잔칫집 분위기다.

야권 분열
국민 피로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렸던 ‘박원순 시장 잃어버린 10년, 재도약을 위한 약속’ 행사에서는 대권 잠룡군까지 등장하면서, 당내 인사들이 큰 조명을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안 대표는 예상대로 일언반구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지난 연말 행사를 처음 기획했을 당시 안 대표에게 먼저 참석을 요청하고, 이를 홍보에 적극 활용했던 국민의힘의 행보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국민의힘의 흥행에 안 대표는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단일화 촉구로 국민의힘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안 대표는 국민의당 당적을 유지한 채 국민의힘 경선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의원들과 물밑 소통으로 단일화에 대한 공감대를 만든 뒤 당 지도부의 입장 변화를 끌어낼  수도 있다.


만약 야권의 ‘각자도생’이 계속된다면 여권에는 유리한 판이 깔릴 것으로 보인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박성원 기자

야권 내 분열로 3자 구도 선거를 치른다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최종적으로 야권 단일화가 성사되더라도 야권의 ‘진흙탕’ 싸움이 계속된다면 민주당에겐 유리한 판이 열린다. 야권이 이대로 간다면 국민적 피로를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가 돼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민주당이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안 대표와의 1대 1 대결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 대표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우상호 의원 등과의 일대 일 대결에서 앞선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는 ‘안철수 단일화’를 염두에 두고 재보궐선거 전략을 구상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야 각자도생에 웃는 여
따놓은 당상? 필패론도

이 같은 전략에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국민의힘 후보를 찍지는 않을 것이라는 여권 내 확신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안 대표에게 이전 보수 정권의 유산에 대한 부채는 없는 상태다. 문재인정부에 실망한 중도층이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이라는 평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야권 내에서는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서로를 향한 ‘난타전’을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서울시장 선거의 분위기가 여권에 유리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금태섭 전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제1야당의 틀 안에서 (경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새 판을 깔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서로 비방을 일삼다가 여권에 자리를 내줬던 선례가 있다. 당시 박원순 전 시장이 52.79%를 득표해 김문수(23.34%) 후보, 안 대표(19.55%)를 가볍게 이기고 당선됐다. 야권 내 김 후보와 안 대표의 단일화 논의가 있었으나 대치 끝에 무산됐던 까닭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3월 다 와서 네거티브 난타전만 벌이다 단일화는 무산되고 야권 표 분열로 남 좋은 일만 하는 건 아닌지”라며 “서울시장직이 무슨 따놓은 당상인가. 대승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권 내에는 본선을 앞두고 단일화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이번 재보궐선거는 ‘미니 대선’으로 불리는 규모로, 야권 단일화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 이후 야권의 지형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자 구도
야권 필패

김 위원장은 오는 3월 초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문을 닫고 있는 게 아니다. 단일화해야겠다는 데 이의가 없다”며 “나머지 방법은 우리 후보가 확정된 후 3월 초에 가서 누가 적합한지 국민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야권 후보 단일화가 되면 3자 구도를 할 필요가 없다. (3자 구도는)단일화에 불복해 출마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것으로 생각한다”며 3자 구도 시나리오에 대해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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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