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상징’ 한기총 몰락기

기독교 앞세워 정치욕 채우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한때 보수 교계의 상징이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역사상 최악의 해체 위기에 놓였다. 출범 이후로 논란이 끊이질 않았던 덕에 교계와 정계서도 한기총에 대해 선을 긋는 모양새다. <일요시사>는 한기총의 기나긴 몰락기를 조명했다.
 

▲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문병희 기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전광훈 목사가 지난달 이례적으로 법원으로부터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 정지 판정을 받았다. 앞서 한기총 비상대책위원회는 전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선출한 지난 1월 총회에 대해 “절차적·실체적 하자가 있다”며 서울중앙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전 목사가 일부 대의원들에게 총회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의원들의 의결권과 선거권을 침해당했다고 명시했다.

흥망성쇠
어쩌다…

정관에 따라 법원이 직무대행을 선임할 때까지 한기총의 최고 연장자인 김창수 목사가 직무대행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김 목사 역시 “이번 계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분골쇄신해 한기총이 명실공히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으로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발돋움을 하겠다”며 한기총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현재 한기총은 전 목사를 끌어내린 비대위와 전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김 목사 세력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있다. 한동안 한기총의 내홍은 더 극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기총은 장기간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사무실 반환 소송마저 진행 중이다. 한기총의 재정난은 지난해 10월부터 불거졌다. 당시 한기총은 임대료 7000여만원과 직원 임금체불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 전 목사가 대표회장이 된 뒤 회원 교단들이 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상태다.


한기총은 왜 이렇게까지 몰락했을까. 우선 한기총의 태생적 한계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한기총은 1989년 평화통일을 강조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을 견제할 목적으로 출범했다. 한기총은 출범 당시 정권과 결이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로 우뚝 성장하게 된다.

일각에선 한기총의 설립 당시 배후에 독재정권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1980년 8월 한기총 설립에 크게 기여했던 보수 개신교 지도그룹이 전두환 당시 국보위장을 불러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이런 의혹을 뒷받침한다.

보수 교계 몸통…독재정권 등에 업고 출범
2011년 금권선거 파문·잇단 대형교단 탈퇴

2005년 4월에는 당시 국정원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오충일 목사가 국정원 전신인 안기부 종교담당 요원이 한기총 창립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기총은 출범 이후 꾸준히 보수정권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1992년 대선에는 개신교 장로 출신인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우회적으로 지지했고, 2003년 참여정부 시절에는 주한미군 철수 반대,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며 수구 성향을 고수했다. 또 2007년엔 17대 대선을 앞두고 전 목사가 교인들에게 “무조건 이명박을 찍어. 만약(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서 지워버릴 거야”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끊이지 않는 비위 및 막말 논란 역시 한기총이 교계서 외면 받는 이유로 볼 수 있다.

지난 2011년에는 한기총 대표회장의 금권선거 의혹이 크게 불거졌다.
 

▲ 문재인 하야 범투본서 발언하는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당시 이광선 목사는 2010년 대표회장으로 당선된 길자연 목사의 부정선거로 갈등을 빚어오다 결국 ‘돈 선거’를 폭로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단 목회자들이 길 목사로부터 1인당 100만원씩 4000만원대의 금품을 수수한 내용이 드러났다.

이어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 투표장서 길 목사 쪽 선거운동본부장으로부터 돈봉투를 받았다는 폭로까지 터지면서 파장은 일파만파 커졌다. 이후 한기총에 속했던 대형 교단들이 행정보류를 결정하거나 탈퇴를 선언하면서 한기총은 고립의 길을 걷게 됐다.

구멍난 재정
리더십 공백

주요 교단이 이단·사이비로 규정한 단체들을 한기총이 받아준 점도 한기총이 내홍을 겪는 데 큰 화근이 됐다. 현재 한기총에는 55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군소 교단이 대부분이다. 2010년까지 한국개신교계를 대표했지만, 현재로서는 사실상 보수 개신교를 대표하는 곳으로 볼 수 없게 된 셈이다.

게다가 한기총은 목사들의 비상식적인 막말로 인해 여론의 몰매를 맞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지난 2014년, 당시 한기총 부회장이었던 조광작 목사는 긴급 임원회의서 “가난한 집 아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갔으면 될 것을 왜 제주도로 배 타고 가다가 이런 일이 사고가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으로 국군 장병이 숨졌을 때는 온 국민이 경건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애도하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너무 소란스럽게 진행되고 있어 이해 못 하겠다” 등의 막말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조 목사는 부회장직서 사퇴했지만, 이는 한기총의 수준을 드러내는 유명한 일화가 됐다.

전 목사의 막말도 유명하다. 그는 2005년 “이 성도가 내 성도가 됐는지 알아보려면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 내려라, 한 번 자고 싶다’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라고 발언해 ‘빤스목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 전 목사는 지난해에 “대통령이 간첩” “문재인은 벌써 하나님이 폐기처분” 등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막말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한기총의 법인 해산과 대표회장 전 목사의 구속을 촉구하는 내용이 올라왔고, 그에 대한 동의가 20만명을 넘기도 했다.

우클릭
돈 선거

당시 청원인은 ‘대표회장 전 목사를 중심으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헌법 제20조 제2항을 위반하고 있지만, 관계 당국은 종교단체라는 이유만으로 설립목적과 위반된 사항들을 간과하고 있다. 이는 허가 단체의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이뿐 아니다. 전 목사는 “나는 하나님 보좌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와 같은 막말로 개신교 측의 거센 반발을 샀다.


전 목사는 21대 총선까지 네 차례나 기독교 정당을 설립해 총선을 통한 원내 진출을 시도했다. 지난 2008년 18대 총선서 기독사랑실천당의 공동대표로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다. 기독사랑실천당은 비례대표 의석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 3%에 약간 미달해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이후로도 정계 진출을 위한 전 목사의 행보는 계속됐다. 2012년 기독자유민주당 당고문, 2016년 기독자유당 후원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권 주변을 배회했다. 지난 1월에는 21대 총선에 대비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기독자유통일당을 창당했으나 이번 역시 원내 진입에는 실패했다.

전 목사는 지난해부터 21대 총선을 위한 세력 결집을 해왔다. 지난해 6월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문재인정권으로 인해 종북화, 공산화돼 지구촌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이했다”며 “문재인 대통령 하야와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를 위해 한기총이 지향하는 국민운동에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9월에는 전 목사가 문 대통령의 하야를 목표로 하는 시위 조직인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이하 범투본)를 결성해, 광화문 일대서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같은 극우단체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전 목사의 막말 논란, 불법 모금 혐의 등 논란이 끊이질 않으면서 한기총은 국민적인 비호감을 얻게 됐다.

전광훈 목사 사심으로 운영?
정계 선 긋고, 교계 “사라져야”

교계서도 전 목사와 한기총의 이 같은 극우 정치 행보를 두고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전 목사의 시국선언 이후에는 개신교 원로들이 나서 “세속적 욕망으로 정치에 나서려 한다면, 교회나 교회 기구를 끌어들이지 말고 목사라고 내세우지 말고 한 개인으로 나서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욕망과 신념을 위해 교회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현재 전 목사는 지난해 10월 광화문광장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서 관계기관 등록 없이 불법 모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 목사는 21대 총선을 앞두고 광화문광장서 “자유한국당을 지지해달라” “대통령은 간첩” 등의 연설로 인해 공직선거법 위반 및 명예훼손으로 지난 2월 구속 기소됐다가 집회 금지와 보증금 5000만원 등을 조건으로 56일 만에 보석 석방됐다.
 

▲ 악수 나누는 전광훈 한기총 대표회장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전 목사는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 정지 판정에도 불구하고, 지난 1일 <국민일보> 광고에 스스로를 ‘한기총 대표회장’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전 목사는 광고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도 주사파 선동과 문재인의 거짓 역사 왜곡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관을 재정립하고 시대적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라며 신학 특강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가 속한 한기총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배수진을 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기총의 몰락을 막기는 여러 모로 어려운 모양새다. 교계와 정계 모두 이들의 극우적인 정치논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21대 총선서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은 한기총 세력들과 장외투쟁을 함께하는 등 지나친 ‘우클릭’으로 인해 총선에서 패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극우정치적 편향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이어가며 이들과는 선을 긋고 있다.

불법 모금
막말 논란

개신교 관련 시민단체인 교회개혁실천연대(이하 개혁연대)는 한기총에 대한 유감을 표현했다. 지난해 개혁연대는 “한기총은 과거 금권선거와 부정부패, 사회기득권층과 유착으로 교회와 사회로부터 신임을 잃은 지 오래됐다”며 “한기총은 한국교회와 역사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한기총은 한국 교회 내에서 정치적으로 치우친 소수 집단에 불과하다”며 “한기총에는 일부 군소 교단과 단체들만 남아있는 상태로, 한국 교회 연합 조직의 대표성을 잃은 지 오래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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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