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나리, 그런데 제 입장과 다름없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요.”
“물론 태생에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그대나 나나 똑같다 이 말이오.”
“나으리, 궁금하옵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 않았소. 그러니 우리 차근차근 풀어나갑시다.”
“그러시면 그 이후의 일을…….”
“그럽시다.”
그 이후의 일
잠시 말을 멈춘 허균이 매창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까지 낳은 어머니께서 지체 없이 한양으로 거처를 옮기셨다오.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전 부인의 소생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오.”
“전 부인의 소생들이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내가 한양으로 왔을 때는 모두 출가한 상태여서 그저 우리 형제들뿐이었다오.”
“하기야, 그 나이 차이라면.”
“균아, 어디 가려고.”
막 대문을 나서려던 순간 뒤에서 누나가 미소를 머금은 해맑은 얼굴로 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무료해서 바깥세상 구경하려는데 누나도 같이 갈래.”
“같이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머니께서 지금 찾으셔.”
“어머니가 왜 나를 찾으신다는 말이야.”
“아버지께서 너를 찾으시니까 어머니께서 너를 불러오라고 하셨지.”
아버지라는 말에 균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버지께서 오셨다는 말이야!”
초희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버지가 이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오실 수 있나.”
긴장했던 균의 어깨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를 감지했는지 초희가 한걸음 더 치고 나갔다.
“아버지가 그렇게 한가한 분이시더냐.”
“그러면 그렇지. 근데 왜 어머니가 나를 찾으셔.”
“어머니께서 이를 말씀이 있으신 모양이지.”
“일 없어. 나는 가서 멱이나 감으련다.”
“멱 감는다고.”
“그래, 그러니 누나도 가려면 같이 나서고.”
초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리 쬐는 한낮의 태양빛에 더욱 붉게 보였다.
“싫으면 그만 두고. 나는 가련다. 그러니 어머니께 그리 말씀드려.”
누나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대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봉아, 어디 있냐.”
“균아!”
팔봉을 부르던 허균의 귀에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우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
“우리 막내는 아버지가 일찍 집에 돌아와 싫은 모양이지.”
미소 지으며 그리 말하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 역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허균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균이는…….”
막상 말을 꺼냈지만 잇지 못했다. 차마 멱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균이는 이 아버지를 모른 체하고 멱 감으러 간다는 말이지. 그러면 할 수 없지. 우리끼리 참외 먹는 수밖에.”
“참외요!”
지체 없이 한양으로…행복했던 어린 시절
누나가 쓴 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허균
균이 참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균인 어서 가서 멱 감고 놀도록 해라. 우리는 참외 먹을 터이니 말이다.”
말을 마친 아버지, 허엽이 고개를 돌렸다. 초희가 급히 아버지 곁에 나란히 했다.
“도련님, 찾으셨어요.”
그제야 나타난 팔봉이 엉기적거리며 다가섰다. 균의 눈에 팔봉이 들어올 리 없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팔봉을 응시하기를 잠시 천천히 아버지 뒤를 따랐다.
순간 아버지의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균이 맨땅에 엎드렸다.
“소자 균이 아버지께 문안인사 올립니다.”
너 댓 살 정도 아이가 흡사 성숙한 어른처럼 예를 갖추자 아버지 허엽이 못이기는 척 헛기침을 내뱉고는 균에게 다가섰다.
“아버지가 균이 때문에 참외를 사가지고 왔는데.”
어정쩡하게 맨 땅에 엎드려 있는 균을 아버지가 번쩍 들어 안았다.
“내가 참외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 말하는 균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초희가 두 사람 가까이 다가섰다.
“아버지, 균은 그냥 멱 감으러 가게 놓아두셔요.”
딸의 얼굴을 바라본 허엽이 균을 땅에 내려놓았다.
“왜, 우리 초희는 동생이 싫으냐.”
“싫은 것이 아니고…….”
초희가 말을 맺지 못했다.
균의 시선이 정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향하고 있던 터였다.
“자, 이제 그만하고 모두 함께 가도록 하자꾸나.”
“아버지, 그래요.”
허균의 시선을 외면하며 초희가 급히 앞으로 나아가 제 어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래지 않아 대청마루에 모두 모여 앉자 어머니께서 손수 참외를 가지고 오셨다.
허균이 노란 빛을 띠고 있는 참외를 바라보자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흰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허균의 의도가 무엇인지 환히 알고 있다는 듯이 초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급히 균에게 다가서서는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균의 동작이 더욱 빨랐고, 아버지에게 급히 내밀었다.
“아버지, 이거 누나가 뭐라고 쓴 건데 아버지께서 한번 봐주세요.”
“뭐라고, 초희가 쓴 것이라고.”
균이 건넨 종이를 받아 든 허엽이 백지 위에 쓰인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던 허엽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정녕 우리 초희가 썼단 말이냐?”
“아버지, 그렇다니까요.”
초희가 쓴 글
허엽이 잠시 허균을 주시하다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우리 초희가 진정으로 이 글을 썼다는 말이지.”
“예, 아버지.”
초희가 기어들어가는 듯이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허엽이 다시 시선을 종이로 주었다. 그리고는 가늘게 되뇌어 보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