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 47인’ 생존게임 막전막후

만만한 지역구 침부터 바른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9%, 19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이 20대 지역구 재선에 성공한 확률이다. 비례대표제가 시행된 17대 국회부터 비례대표 의원이 다시 비례대표로 재선한 경우는 164석 중 3석, 1.8%에 불과했다. 재선을 위해선 비례대표 의원들이 깃발 꽂을 지역구를 찾아 바닥 민심을 공략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기가 1년 남짓한 상황서 현 비례대표 의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요시사>가 그들의 내년 총선 거취를 분석해봤다.
 

20대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3명,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17명,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13명, 정의당 4명으로, 47명의 비례대표가 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전문 분야서 능력을 인정받아 국회에 입성한 케이스가 대다수다. 당선 안정권에 드는 비례대표 순번을 받게 된다면 소선거구제서 뽑히기 어려운 정치 신인도 선거 없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세대교체론
‘깃발’ 뺏기

국회의원은 각종 의정활동 지원비를 제외하고도 국민 1인당 평균소득의 5배인 1억5000여만원의 세비가 지급된다. 면책특권·불체포특권·보좌진 임면권 등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각종 대우와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이상돈 바미당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마약도 이런 마약이 없다. 한 번만 국회의원을 하고 본업으로 돌아간다던 사람들이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더라”고 말한 바 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재선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비례대표 의원의 재선 확률은 매우 낮다. 17대 국회의 비례대표 56명 중 5명, 18대 국회의 54명 비례대표 중 8명, 19대 국회의 비례대표 54명 중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5명으로 총 164명 중 18명만이 살아남았다.


비례대표가 ‘초선의 무덤’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처럼 비례대표만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예외도 있지만, 연속으로 비례대표 공천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번 특혜를 받았기에 두 번은 어렵다는 게 여의도 불문율이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보통 1년 임기가 남은 시점부터 재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를 찾는다. 보통 직장, 출신 학교 등 연고가 있는 지역에 출사표를 낸다. 지역 주민들과 접점을 찾아야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

탄탄한 지지를 받는 경쟁 당의 중진 의원이 지키고 있는 곳은 초선 비례대표가 도전하기 부담되는 이른바 ‘험지’다. 당의 강세 지역은 기존 의원들이 버티고 있어 당내 경선부터 뚫기가 어렵고 총선을 앞두고 ‘집안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계산이 필요하기에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를 정할 때 치열한 눈치 싸움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늘의 별따기’ 재선에 올인
지난 20대 선거 땐 9%만 귀환

비례대표 47인 중 21대 총선서 출마할 지역구를 확정한 의원은 총 24명이다. 총선 출마 의지가 있지만 지역구를 아직 정하지 못한 의원은 한국당 여성 비례대표인 김현아·송희경·신보라 의원과 바미당 채이배·최도자 의원 등이 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비례대표 공천으로 이미 당의 특혜를 한번 받았다는 인식이 있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당의 결정을 기다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접점이 되는 연고가 없더라도 특정 지역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력이 있다면 다크호스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당내 경쟁력 있는 비례대표의 공천은 당의 입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당 김현아 의원이다. 3기 신도시 문제로 지역 민심과 멀어진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의 지역구인 고양시 을에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한국당 의원으로 맞불을 놔야 한다는 의견들이 당내서 나오고 있다.

김현아 의원실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강남에 출마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강남을 당협위원장에 지원해 의원님이 탈락했다. 고양도 얘기가 나오고, 여러 지역구 이야기가 나오지만 아직 정하진 못했다”고 말했다. 현재 고양시엔 민주당 소속인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 진보 정당 여성 의원들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한국당이 주도권을 얻기 위해 벼르고 있는 지역이다.

한국당 관계자는 “경쟁력 있는 비례대표 의원들이 수도권서 여당 실세들과 맞붙게 되면 국민적 관심이 고조될 것”이라며 “비례대표 의원이기 이전에 정책 전문가 이미지가 부각될 수 있다면 다선 피로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역구를 밝힌 24명 의원 중 15명의 여·야 의원들이 3선 이상인 중진 의원들의 지역구에 출사표를 냈다. 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세대교체론’으로 정치 신인인 비례대표가 지역구 정치에 변화를 불어넣고자 함이다.

매력적인 험지
정치적 위상↑

대표적인 예로 바미당 김수민 의원의 충북 청주청원 도전이다. 김 의원은 20대 국회 최연소 여성 의원으로 민주당 변재일 의원(4선)의 지역구자 본인의 고향인 충북 청주청원에 정면 승부를 예고했다. 청년 정치인이 결핍된 국회서 상징성을 지닌 김 의원이 지역구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경기 안양동안을은 현재 한국당 심재철 의원(5선)이 터줏대감으로 있는 지역으로, 민주당 이재정 의원, 바미당 임재훈 의원,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만약 이들 의원이 각 당 공천 경쟁서 승리한다면 내년 4월 안양 동안을에서는 4명의 현역 의원이 각축전을 벌이는 격전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민주당 송옥주 의원은 현역 최다선인 서청원 무소속 의원(8선)의 경기 화성갑을, 바미당 김중로 의원은 민주당 이해찬 대표(7선)의 지역구인 세종에 출사표를 냈다.

지역색이 강하고, 지연·학연·혈연이 복잡하게 얽힌 지방의 표심을 파고들기는 어렵다는 평가에도 호기롭게 출사표를 낸 의원들이 있다.
 

▲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

한국당 여상규 법사위원장(3선)의 지역구인 경남사천남해하동엔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민주당 제윤경 의원이, 정치 9단이라 불리는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4선)의 지역구인 전남 목포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최근 지난 대선 후보였던 바미당 유승민 의원(4선)의 대구 동구을에 한국당 김규환 의원이 출마를 희망했다.

최근 불법 천막 설치로 서울시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우리공화당의 조원진 대표(3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서병엔 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당협위원장을 맡아 일찌감치 지역구를 선점했다. 건강상 이유로 한국당 사무총장직서 물러난 한선교 의원(4선)의 지역구인 경기 용인병도 내년 총선에 기대되는 지역 중 하나다.


한 의원은 당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무총장을 맡는 등 전국적 지명도가 높은 편이지만 막말 정치로 실망한 민심이 작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경기 용인병 출마를 위해 현재 수지구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활발하게 소통하며 구민들과의 스킨쉽 반경을 넓히고 있다.

명분 싸움에
‘환멸’ 느껴

당 지지도가 높은 지역구를 지키고 있는 같은 당 소속 현역 의원에 도전장을 내민 비례대표도 있다.

한국당 임이자 의원은 한국당 김재원 의원(3선)의 지역구인 경북 상주군위의성총송에 출마할 예정이다. 경북 상주는 임 의원의 고향이자 TK 지역으로 공천을 받으면 지역구 의원이 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는 곳이다. 민주당 권미혁 의원은 같은 당인 이석현 의원(6선)의 지역구인 경기 안양동안갑에 도전한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같은 당 소속인 현역 의원이 지키고 있는 지역구에 선뜻 도전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 ‘집안싸움’을 피하고자 함은 아니다. 같은 당 소속 의원의 지역구 도전이 험지 출마보다 높은 당선 가능성을 보장하지도 않고, 험지 개척은 성공한다면 당내 정치적 위상이 달라질 수 있어 승부사인 정치인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수도권 출마를 고려 중인 한국당 비례대표 의원은 “다른 당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구를 가져올 수 있다면 ‘플러스 2’의 효과가 발생한다”며 “이른바 험지서 불리는 곳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정치적 몸집도 이전보다 훨씬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민주당 김현권 의원은 한국당 장석춘 의원(초선)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을에 출마를 준비 중이다.
 

경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란 상징성을 가지는 ‘보수의 성지’임에도 지난해 지방선거서 장세용 구미시장이 최초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당선되는 이변이 나오기도 했다. 구미 공단의 배후 신도시와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 직장인들인 유권자들이 주를 이뤄 대구·경북(TK) 지역 가운데 민주당이 공략하기 적절한 지역구라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 박경미 의원은 한국당 박성중(초선) 의원의 지역구인 서초을에 대항마로 나섰다. 서초구는 선거구가 신설된 1988년 이후 민주당 계열 국회의원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험지로 꼽히는 곳이다. 지난 해 지방 선거서 서울 25개 기초단체장 중 유일하게 한국당 소속 구청장이 살아남았다.

전문성과 신선함 어필
중진 골라 험지 개척

박 의원은 교수 출신 이력을 살려 교육열이 높은 지역구민들의 바닥 민심을 다지고 있다.

20대 총선서 전현희 민주당 의원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강남을 지역구서 승리하며 최대 이변을 보여준 데 이어 박 의원이 ‘강남 3구’서 다시 한 번 ‘민주당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한편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비례의원들은 지역구로 갈 경우 정치신인에 준하는 프리미엄을 줘야 한다”며 “말이 현역 의원이지, 지역구에서는 몇 년 동안 닦아온 다른 의원들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당 유민봉·조훈현 의원과 바미당 이상돈 의원 3명은 내년 총선 불출마 의지를 밝혔다.

유 의원은 지난해 6·13지방선거서 한국당의 참패 책임을 지고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지난 해 지방 선거 이후 “한국당 의원으로서 국민과 지지자 여러분께 부끄럽다”며 “박근혜정부서 2년간 청와대 수석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의원실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작년 입장 그대로”라며 불출마의 뜻을 거듭 밝혔다.

바둑기사 출신으로 20대 총선 이전에 입당 제의를 받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조 의원도 불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조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여야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 때문에 정치 발전은 어려울 것이라 꼬집은 바 있다.

정치 싫어서
국회 떠난다

그는 “바둑에선 상대가 좋은 수를 두면 그걸 받아들인다. 그런데 국회는 상대가 한 것은 무조건 반대하거나 바꾸려고만 하니 제대로 된 승부가 안 되고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며 여의도 정치에 회의감을 표했다. 중앙대 법대 명예교수인 이 의원도 내년 국회를 떠날 예정이다. 그는 공천을 위해 지도부와 당론에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정치가 쉽게 개선되기 어려운 이유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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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