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새해캠페인> 斷② 재계 5대 악습 되풀이 실태

로열패밀리 제버릇 ‘황제에서 황태자로…’

재벌그룹 도덕적 해이 등 고질병 매년 반복
기업 병폐 나라경제 직결 “털 건 털고 가자”

비자금 조성·정관계 로비, 주가 조작, 경영권·재산 다툼, 하청업체 죽이기, 이물질 파동…. 해마다 되풀이되는 재계의 뿌리 깊은 고질병이다. 지난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시대의 악습은 약속이나 한 듯 어김없이 되살아났다. 문제는 이런 병폐가 나라 경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불황의 벽 앞에서 극심한 불안과 절망으로 벌벌 떨고 있는 정부와 국민으로선 마땅히 질타하고 감시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새해를 맞아 <일요시사> 뉴 캠페인 ‘끊자 끊자’를 통해 ‘털건 털고 가자’는 의미에서 지난해 재계에서 사라지지 않은 고질병들을 되짚어 봤다.

재벌 집단은 지난 1990년대 말 대한민국 경제를 초토화시킨 IMF 외환위기 사태의 가장 큰 주범으로 꼽힌다. 정부의 뒷짐으로 가능했던 온갖 불법과 편법, 부실경영, 도덕적 해이 등이 환란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재계의 고질병이 기업은 물론 나라 전체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재벌 비판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각 그룹은 2000년대 들어 앞 다퉈 지배체제 전환을 서두르는 등 재정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나라 경제는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결국 IMF가 재벌그룹의 투명경영을 공고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재계의 악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IMF에 못지않은 경제 한파가 또 다른 양상으로 들이닥친 지난해 충격적 추문은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으름장도 소용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전후 “경제계의 몇 가지 고질병을 고친다면 7% 성장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재임 1년이 지난 결과 두 전제 모두 공염불에 그쳤다.


 
<1>기업 털면 정치인 나온다
비자금·로비의혹 줄이어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는 재계에서 끊이지 않는 추문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경영 1세대부터 줄곧 그랬다.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부인하지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대기업 비리 의혹에 날 선 칼날을 들이댔다. 기업의 고질적인 병폐인 ‘검은 돈’을 집중적으로 털어냈다. 검찰은 부인하지만 특정인을 솎아내는 데 비자금만 한 통로가 없다. 비자금이 곧 정·관계 로비로 연결되는 탓이다.

검찰이 전 정권 인사들을 표적삼아 우선 기업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여기서 나온다. 검찰이 기업 비자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장 먼저, 가장 이슈화된 비자금 사건은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촉발된 삼성그룹 비자금 및 정·관계 로비 의혹이다.

이 일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해 4월 대국민 사과와 함께 42년 만에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룹 수뇌부인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 역시 퇴진했다. 과거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전략기획실도 해체됐다.

삼성 특검에서 밝혀진 이 전 회장의 차명재산 규모는 약 4조5000억원에 달한다. 임직원 명의의 1천200여 개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된 이 돈의 출처와 용처를 놓고 세간의 추측이 무성하다.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100여일간 계속된 ‘삼성 수사’는 올해 초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내려질 전망이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10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받았다.

백종헌 프라임그룹 회장도 비자금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수천억원의 회사 자금을 횡령하거나 배임한 혐의 등으로 백 회장을 구속했다. 프라임그룹 비자금 의혹으로 시작된 검찰 수사는 이주성 전 국세청장 구속 등 본격적인 정·관계 로비 수사로 접어들었다.


이외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남중수 전 KT 사장과 조영주 전 KTF 사장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포스코 ▲유한양행 등도 비자금 또는 로비 혐의로 검찰에 이미 구속되거나 같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따라서 재계의 비자금·로비 후폭풍이 올해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재벌가 자제 ‘주식 장난’
꼬리에 꼬리 문 주가 조작

재벌 일가의 주가조작 사건도 도마에 올랐다. 특히 재벌가 2∼4세들의 ‘주식 장난’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난해 재계를 뜨겁게 달궜다.

지난해 초부터 재벌가 자제들의 주가조작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의 첫 타깃은 코스닥 시장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 LG가 방계 3세 구본호(사진)씨였다.

구씨는 2006년 9∼10월 미디어솔루션(현 레드캡투어)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대우그룹 구명 로비에 연루된 조풍언 씨의 자금을 이용해 차입금을 자기자금으로 속이고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을 끌어들여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것처럼 허위 공시해 주가를 상승시킨 후 수백억원 상당의 부당이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후 재벌가 2∼4세 주가조작 수사에 탄력이 붙었다. 검찰은 상당수 재벌가 자제들이 연루된 정황을 포착, 수사를 확대해 지난해 8월 두산가 4세 박중원 씨를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차남인 박씨는 마치 자신의 돈으로 뉴월코프의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처럼 거짓 공시를 해서 일반 투자자들을 속인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또 지난해 말 한국도자기 창업주 손자인 김영집 씨를 특경가법상 배임 및 횡령,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김씨는 코스닥 상장사인 엔디코프와 코디너스(당시 엠비즈네트웍스)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수백억원 규모로 재산상 피해를 끼치거나 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대가 3세 정일선 씨 등 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아들 3형제도 같은달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정상적으로 돈을 투자한 것으로 밝혀져 무혐의로 풀려났다.

뿐만 아니다. 기형적인 투자로 주식 대박을 터뜨렸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재벌가 로열패밀리는 수두룩하다. 현재 A그룹 창업주 손자 N씨, K그룹 회장 아들 J씨, L그룹 3세 S씨 등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역시 투자한 회사의 시세차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여기저기서 첩보를 수집한 검찰은 내사를 거쳐 표적에 바짝 다가선 형국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셋째 사위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의 사법 처리 여부가 관심사다. 조 부사장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가 조작 의혹을 캐고 있는 검찰은 조만간 조 부사장을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

재벌그룹 총수의 주가조작 의혹도 불거졌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유티씨인베스트먼트가 허위공시를 통해 수백억원의 시세 차익을 남긴 정황을 포착했다. 이 회사는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창업투자회사다. 검찰은 임 회장이 주가조작에 개입했는지 집중 조사하고 있다.

<3>가족간 피 튀는 재산다툼
끊이지 않는 ‘골육상쟁’

재벌그룹 일가의 재산 다툼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경우도 빈번했다. 법정 공방은 기본. 피붙이의 치부를 낱낱이 파헤치며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도 불사했다. 가히 혈투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겉으론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뻔하다. 십중팔구 목적은 ‘돈’이기 마련이다. ‘돈이 피보다 진하다’란 말이 실감되는 대목이다.

종근당 일가가 딱 그렇다. 이들은 15년 전 별세한 고 이종근 회장의 차명주식을 놓고 분쟁에 휘말렸다.

이 회장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난해 12월 “이 회장 사망 후 장남인 이장한 회장이 가족을 완전히 배제하고 종근당 등 관련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해 단독으로 경영권을 장악했다”며 종근당산업주식회사 등을 상대로 주주지위 확인 등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종근당 일가는 이 전 회장이 1993년 사망한 이후 줄곧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맛살 명가’오양수산 일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의 골육상쟁은 고 김성수 오양수산 회장이 지난해 6월 타계한 뒤 상속지분 처분을 놓고 불거졌다. 2000년 11월 김 회장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1000억원대의 재산을 놓고 갈등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해를 넘겨 지난해까지 계속됐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김 회장 소유 오양수산 지분(35.2%)을 경쟁사인 사조산업에 넘겼지만 장남인 김명환 전 오양수산 부회장이 반발하면서 다툼이 벌어졌다.

이 비극은 저 세상으로 떠난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도 연출될 정도로 파국으로 치달았고 급기야 법정공방으로 비화됐다. 결국 법원이 지난해 7월 1심에서 어머니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됐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대성그룹 일가인 고 김수근 창업주의 장남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과 차남 김영민 서울도시가스 회장, 3남 김영훈 대구도시가스 회장 등도 김 창업주가 작고한 2001년 지분 다툼 이후 등을 돌려 아직까지 발길을 끊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지난해 유난히 가족 간 분쟁이 마무리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외 딸들이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등 창업주 가족을 상대로 낸 100억원대의 상속재산 청구소송은 지난해 2월 혼외 딸들에게 40억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조용히 종지부를 찍었다.

2004년부터 5년간 이어지며 ‘진흙탕 싸움의 진수’를 보여준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강문석 전 이사의 부자간 경영권 분쟁도 강 전 이사가 지난해 말 동아제약 지분(2만500주)을 모두 매각하는 것으로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됐다.


<4>‘먹는 음식에 장난을…’
식품업계 이물질 파동 반복

지난해 ‘먹거리 쇼크’도 되풀이됐다. 먹는 음식에 장난을 치는 기업의 두둑한 ‘배짱’이 또다시 도마에 오른 것. 먹거리에 비상등을 켠 사건은 ‘생쥐깡’과 ‘칼날 참치’ 파문이다.

지난해 3월 농심은 1971년 첫 선을 보인 이후 ‘국민 간식’으로까지 불리며 오랫동안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새우깡에서 생쥐머정되는 이물질이 검출돼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문제는 사건을 ‘쉬쉬’한 농심의 태도다.

농심은 이물질이 나온 사실을 알고도 한 달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말 충북의 한 소비자가 슈퍼마켓에서 산 새우깡에서 1.6㎝ 크기의 털이 난 이물질을 발견하고 회사 측에 통보했지만 농심은 식약청이 이 문제를 발표한 뒤에야 내부조사 사실을 털어놨다. 어이없는 사고를 터뜨리고도 이를 은폐하려다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칼날 참치’ 생산업체인 동원 F&B도 2006년 11월 참치캔에서 커터 칼날이 나왔다는 소비자 불만신고를 받았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사건을 덮으려 했다.

동원 F&B는 이를 신고한 소비자에게 참치 선물세트를 주며 사태 무마를 시도했다. 제품 수거조치도 없었다. 동원 F&B는 지난해 3월 참치에서 또다시 칼날이 나왔으며 이후에도 여러 제품에서 잇달아 이물질이 발견돼 진땀을 흘렸다.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구두충 꽁치, 다이옥신 삼겹살, 바퀴벌레 라면, 생쥐 냉동야채, 볼트 컵라면, 동전 시리얼 등 이물질 파문은 계속됐다. 해당 식품업체들은 즉각 수습에 나서지 않고 뭉그적대다 달랑 사과문만 발표하는 데 그쳤다.

이물질 충격이 채 가시기 전 지난해 9월 ‘멜라민 공포’가 엄습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멜라민 파동은 전 세계를 강타했고 분유를 비롯해 유제품, 사료, 가공식품 등으로 확대됐다. 국내 식품에서도 멜라민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잇달아 밝혀지면서 엄청난 파문과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멜라민 파동’에 휩싸인 식품업체들의 대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나몰라라’하는 업체들의 수수방관에 소비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멜라민 검출 제품이 늘어나면서 전국이 들썩거리고 있는데 반해 업체들의 느슨한 위기관리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해태제과 등 업체들은 멜라민 파문 초기 “자사 제품은 문제가 없다”고 하나같이 발뺌했다. 그러다 국내 식품에서도 멜라민이 검출되자 돌연 입장을 바꿨다.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전량 회수에 나선 것. 롯데제과도 당초 “중국산 제품은 1개뿐”이라며 멜라민 식품 유통 사실을 숨기다 식약청의 판매금지 품목에 일부 제품이 포함되자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5>말뿐인 대·중소 상생관계
‘하청업계 죽이기’ 여전

지난해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협력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쓰러져가는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은 1998년 6.01%에서 계속 하락세를 보이다 2007년 4.43%까지 추락했다.

이에 정부는 틈만 나면 긴급 간담회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대기업에 전했고 대기업들은 모두 협력을 다짐했다. 이 대통령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자가 돼야 한다”며 대-중소기업간 상생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상생경영 투자액은 지난 2005년 1조401억원에서 지난해 2조3484억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상생협력 전담 조직을 갖춘 기업도 2005년 5개에서 지난해 19개로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소업체들의 자금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 원자재가 상승, 매출감소 등으로 인해 자금수요는 늘어난 반면 현금결제 비중 감소 등에 따른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되는 추세다.

특히 하청업체들은 “대기업의 횡포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실제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의 ‘대기업 불공정거래 사례 발굴 조사’결과 대기업들의 횡포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례별로 보면 ▲하도급대금 지연지급 ▲대기업 통신사의 부당한 거래관행 ▲PVC레진 가격의 비합리적 산정 ▲대기업의 비밀유지각서 강제 ▲대형 홈쇼핑사의 일방적 반품 및 비용상계 처리 ▲대기업의 일방적 납품단가 산정 ▲대기업의 서면교부의무 위반?일률적 납품단가 인하 등 ▲대형 SI업체의 일방적 거래거절 등이었다.

그럼에도 중소기업의 절반 이상이 대기업 보복이 두려워 참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난해 말 국내 건설 대기업들이 주로 중소기업들로 구성된 하도급 업체에 선급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사실을 적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대기업은 하도급 업체를 위협해 선급금 포기각서를 받았다.

대형 백화점·마트가 우월적 지위 남용해 입점업체들을 압박한 사례도 허다했다. 또 대기업의 ‘납품가 후려치기’란 고전적 수법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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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특정 당의 당원 명부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당 관계자의 업무용 노트북에 담겨있던 정보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를 생각해 보자. 8개 레인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선다. 이 선수들은 국내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예선을 치르고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툰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달라지는 경기에서 승자는 늘 단 1명뿐이다. 치열한 공천 경쟁 선거는 올림픽보다도 더 확고한 ‘승자 독식’ 구조다. 올림픽에선 2등에게 은메달, 3등에게 동메달이라도 주지만 선거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 당선자는 후보자에서 국회의원, 시·군·구의원, 구청장·군수, 시·도지사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다.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올라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자리로 몰린다. 어떤 경기든 일단 출발선에 서야 경쟁을 할 수 있듯, 선거에서 공천은 본선으로 가기 위한 1차 관문이 된다. 자리는 하나, 후보는 여럿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불거진 공천 헌금 의혹은 자리를 돈으로 사려 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는 구속됐다. 최근 서울 구로구에서 일어난 당원 명부 유출 의혹도 공천 경쟁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수십개의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그중 일부가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였고 이름, 연락처, 거주지 등이 포함된 이 파일이 상대 당의 후보 경선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거물급 인사가 후보로 맞붙었다. 구로을 지역은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 17대(2004년)부터 지난 22대(2024년) 총선까지 20여년간 민주당이 이겼다.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18대 총선에서도 구로을 지역은 넉넉하게 수성한 바 있다. 업무용 노트북에서 발견 이름·연락처·거주지 담겨 구로에서만 평생 살았다는 한 시민은 “선거 때마다 텃밭, 험지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구로는 국민의힘 입장에서 ‘사지’다. 민주당이 아주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총선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몇몇 인사들은 바닥부터 훑어가며 선거를 준비한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때 구로을 지역 후보로 윤건영 의원을 전략공천 형태로 낙점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불린다. 국민의힘은 서울 양천을 지역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용태 전 의원을 ‘자객’ 공천했다. 민주당의 독식으로 관심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로을이 순식간에 ‘격전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구로을 지역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조규영 전 서울시의원의 반발이 거셌다. 조 전 시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입성, 이후 구로2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재선했다. 조 전 시의원은 최소한 경선은 치를 수 있게 해달라며 민주당의 전략 공천을 비판했다. 당시 조 전 시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지역 당원 수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았다. 열심히 뛰었다. 누구와 경쟁하든 경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는 낙하산 공천이었다. 저는 특혜나 찬스를 원하지 않았다. 공정한 경선만을 바랐다. 낙하산 공천은 공정하지도 않고 본선 경쟁력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디에 사용했나 조 전 시의원은 노숙 단식까지 해가며 경선을 촉구했지만 결국 낙천했다. 이후 다른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잊히는 듯했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업무용 노트북에서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표기된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이름과 연락처, 행정동 등이 기재된 엑셀 파일은 ‘(보안철저)저쪽디비’ 폴더에 담겨있었다. 해당 파일의 ‘구분’ 부분에 ‘조규영 일반 당원’이라고 표기돼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맞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에 민주당 구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였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기재돼있다는 점에서 의심이 촉발됐다. 동시에 누가 노트북에 해당 파일을 옮겼는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서가 발견된 노트북은 2020년 총선 과정에서 당원협의회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구로구의회에 입성한 A 구의원이 해당 노트북을 사용했다. A 구의원은 2022년 국민의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이력도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문제의 노트북은 A 구의원이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무렵 사용했다가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는 “이후 여성부장이 바뀔 때까지 쭉 A 구의원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쉬쉬하다 이제서야 눈여겨볼 대목은 A 구의원의 이력이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당선됐지만, 2020년 총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조 전 시의원을 보좌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실제 조 전 시의원이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곳곳에서 A 구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A 구의원은 조 전 시의원 낙천 이후 김용태 전 의원 배우자의 수행비서로 발탁됐다. 김 전 의원의 측근이 A 구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안다”며 “2020년 총선에서 김 전 의원이 낙선하고 당협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A 구의원이 비례대표로 공천받았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정치인을 수행했던 인사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그가 직접 사용한 노트북에서 자신이 보좌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파일명이 기재된 국민의힘 당원 명부가 발견된 셈이다. A 구의원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를 민주당 측에 유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대목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A 구의원이 조 전 시의원을 수행할 당시 지역구 경선을 대비해 당원 명부를 입수한 게 아닌가 싶다”며 “당시 경선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당원 명부가 실제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아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이 문제는 올해 1월경에 처음 드러났다. A 구의원이 당원협의회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폴더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쉬’하다가 최근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당협 회의에서 논의 A 구의원 “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A 구의원의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지난 1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에서 논의됐다. 해당 의혹이 구로 지역에서 확산하자 A 구의원이 먼저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대부분 위원은 ‘덮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지면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관계자가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해당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조사를 요청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관철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원 명단이 일부 흘러 다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명부가 통째로 유출되는 건 심각한 일”이라며 “명백한 해당 행위다. 자체 조사를 통해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규정 제20조(징계사유)에 따르면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현행 법령 및 당헌·당규·윤리 규칙을 위반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했을 때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해당 관계자는 A 구의원의 행위가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해당 행위? 징계 가능성? A 구의원은 해당 의혹은 전부 해명됐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당협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문제없다고 결론 났다.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일고의 논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의혹을 언급한 제보자에게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