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데뷔 50주년’ 조용필

반세기 감동 선사 ‘영원한 가왕’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가왕’(가요계의 제왕) 조용필이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국민들은 그와 함께 울고 웃었다. 그는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이는 곧 고스란히 국내 가요계의 역사가 됐다. 반세기 동안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그의 활동 발자취를 확인했다.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임진모 평론가)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 (이무원 평론가)

콘서트 따라
지하철 변동

조용필은 국내 가요 역사서 제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여서 가왕 조용필. 그런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서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다. 

화성서 염전업을 하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면서 화성 최고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나고 자랐다. 


별다른 금전적인 고민은 없었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잘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형을 데리고 사냥을 즐겨 나가곤 했는데 그때 어린 조용필은 하모니카를 불고 놀았다. 이런 모습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 조용필은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고교 2학년 때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는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8년부터 록그룹 애트킨즈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그의 음악인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는 기라성 같은 가수를 배출해낸 미8군의 마지막 가수로 기억됐다.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뒤 19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가왕 탄생의 서막을 연 셈. 

눈길을 끄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이 처음 부른 노래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다른 가수들이 발표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못 받다가 조용필의 목소리가 얹어지면서 국민가요가 됐다. 이후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면서 가왕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표곡으로는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단발머리’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운스’ ‘서울 서울 서울’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등으로 한 번 언급하기에도 숨이 차다. 

세종문화회관서 그의 히트곡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한 번 부르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는 일화는 팬들 사이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1968년부터 활동 미8군서 음악인생
숱한 히트곡으로 국민들 울고 웃어

조용필은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풍운아 이미지의 신해철은 조용필의 전화를 받자마자 두 손으로 전화기를 고쳐잡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가요계의 거장 이승철이나 이은미도 그 앞에서 겸손한 후배가 된다는 전언이다.

조용필은 모든 세대에서 보기드문 인기를 누렸다. 그와 비견되는 가수는 대중가요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서태지 정도지만 조용필이 더욱 폭넓고 다양한 팬층에게 사랑받았다.

조용필은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음악적 도전을 했다. 그가 시도한 장르는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등이다. 

이들 중 다수의 곡들이 히트하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가 잠실종합운동장서 콘서트를 열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어 막차시간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록만으로도 그의 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음악순위 차트 1위에 자신의 곡을 모두 올려놨다. 특히 80년대 1위를 너무 많이 해 순위 프로그램의 1곡당 1위 횟수를 제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길게 1위를 한 곡은 고추잠자리다. 

무려 24주동안 1위를 고수하면서 가왕의 면모를 과시했다.

노력형 순정파
최초 오빠부대

그는 인기순위 자신의 곡을 가장 많이 진입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TV 차트에는 4곡, 연예지에는 6곡을 순위에 올려놨다. MBC 10대가수 가요제서 가수왕을 6차례(80, 81, 83, 84, 85, 86년) 수상했다. 

KBS ‘가요대상’에선 최고인기가수상을 4차례(81, 82, 83, 85년) 수상했다. 그 외 많은 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으며, 2000년 가수 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그는 한류의 원조이기도 하다. 1985년 도쿄서 열린 제14회 도쿄세계음악제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일본 내 대표적인 공연기업 교토도쿄와 독점 계약을 맺을 만큼 이름값을 인정받았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서 인기곡이 됐다.
 

그가 일본 활동 기간동안 판매한 음반은 공식 600만장, 비공식 800만장으로 전해진다. 또 현재 일본 내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87∼90년)으로 출연했다. 그는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익숙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부대에 대한 보도를 할 정도였다.

음악인생이 마냥 달콤했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인 시련도 있었다. 2000년에는 저작곡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조용필은 자신의 곡 가운데 31곡 저작권이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용필은 1986년 지구레코드사와 계약할 당시 ‘지적재산권 일부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조용필은 방송권과 공영권을, 복제권과 배포권을 지구레코드 측이 가져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용필은 소송을 벌였지만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된 끝에 패소로 마무리됐다. 이후 조용필과 제작사는 합의점을 찾아 곡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소유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곡은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 여행을 떠나요 등이다.

조용필의 감성은 세대를 아울렀다. 지난 2013년 조용필은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헬로’를 발매했다. 타이틀곡 ‘바운스’는 그가 여전히 음악계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포효’와 같았다.

음원이 공개되자 가요계는 들썩거렸다. 예순 넘어 발매한 신곡은 전 세대를 감동시켰지만, 특히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엠넷, 네이버뮤직, 다음뮤직, 벅스 등 주요 음원사이트에서 젊은 뮤지션의 노래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바운스’는 멜론 등 다수의 음원사이트에서도 5위권 내를 유지했다. 환갑을 넘긴 가수가 아이돌과 경쟁해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유례없던 일이 일어났다.

신곡 공개 때마다 가요계 들썩
남녀노소 세대 아우르는 감성

그의 도전에 젊은 뮤지션의 존경담긴 극찬이 이어졌다. 

랩퍼 주석은 “조용필 19집 신곡 대박이네요. 이건 형용하기 힘든 여러 가지가 응축된 느낌. 곡이 소리의 질감서부터 짜임새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데다가 극도로 절제되고 정돈되면서도 화려함이 있는 목소리. 조 선생님은 월드 ‘스타’가 아닌 진정한 한국대표 월드 ‘클래스’ 뮤지션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수 태양은 “조용필 선배님, 미리듣기 음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라고 전했다. 그룹 ‘샤이니’의 종현은 “말이 필요 없지요. 들어보세요. 존경해요. 선생님”이라고 감탄했다.

해외서도 주목했다. ‘강남스타일’로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월드스타 싸이의 ‘젠틀맨’ 누르고 음악차트 1위에 오르면서 해외서도 그를 주목했다. 빌보드는 당시 ‘조용필이 싸이를 K팝 핫 100차트 1위에서 끌어내렸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활약을 조명했다.

빌보드닷컴은 “조용필은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며 “1980년대부터 여러 장의 LP를 발표해 각종 시상식을 휩쓰는 등 패권을 지켰다”고 보도했다.

이어 “조용필은 팝이나 록 장르부터 한국 전통 음악, 트로트까지 폭넓은 음악적 시도를 했다”고 덧붙였다. 조용필의 ‘바운스’는 빌보드 K팝 차트 1위로 뛰어오르며 싸이의 ‘젠틀맨’을 밀어내며 가왕의 면모를 드러냈다.

음악 창작자로서 조용필도 훌륭했다. 조용필이 작사하거나 작곡한 히트곡은 50곡에 달한다. ‘단발머리’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등은 지금도 후배 가수들을 통해 수없이 리메이크 되며 사랑받고 있다.
 

이는 편견없는 그의 음악 열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소에도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그가 소장하는 음반은, 비틀즈나 마빈 게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핑크 플로이드, AC/DC, 폴리스, 스팅, 퀸 나아가 메탈리카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한다. 

가왕 조용필이 아닌 인간 조용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동안 조용필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전남 소록도서 2년 연속으로 공연했다. 조용필은 첫 공연 당시 내년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이다. 재방문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가수는  그가 유일했다. 자신의 콘서트 수익금 전액을 소아암 환자 500명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인기 순위에 
가장 많은 곡

조용필은 두 번의 결혼을 했다.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씨의 딸 박지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기간을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4년 만에 합의 이혼을 했다. 조용필은 이혼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대부분의 재산을 위자료로 주고 원만하게 이혼했다. 

이후 1994년 미국 사업가 출신 안진현과 재혼하며 화제를 낳았다. 1993년 미국 공연 당시 친누나의 소개로 안진현씨와 사랑에 빠졌다. 안진현은 그의 음악 세계를 존중했다. 조용필 역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러나 결혼 5년 만에 안진현은 심장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2003년 사망하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안씨의 유해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안장됐다. 

조용필의 아내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망 이후 받은 상속액은 전액 심장병을 앓는 환자를 위해 기부했다. 2003년 18집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진’이라는 노래를 수록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틈틈이 먼저 떠난 아내 산소를 찾곤 한다.

조용필은 2016년 아내의 생일을 맞아 묘소를 찾은 사실이 처제인 제니퍼 안씨의 남편 SNS를 통해 알려졌다. 제니퍼 안씨는 남편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부는 지금도 틈틈이 언니 산소를 찾는 순정파”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기수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겪은 희노애락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조용필은 가수로서 50년간 활동을 팬들과 함께 기념하려 한다. 오는 5월 열리는 그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그의 절친이자 대배우 안성기가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안성기는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가 진행하는 50인 축하 영상 ‘50&50인’을 통해 ‘땡큐 조용필’이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응원했다. 두 사람은 서울 경동중학교 동창으로 무려 54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지난 13일 조용필 공식 채널을 통해 공개된 ‘50&50인’ 영상에서 안성기는 “집에 놀러다니고 했던 아주 친한 친구였다. 예전에 사진을 보면 모범생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키가 지금 키와 같다. 작은 거인이 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키는 더 이상 커지질 않았다”고 웃었다.

또 “신만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누구도 그런 기미를 채지 못했고 자기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지금의 가왕 조용필을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친구 조용필은 자연인 그대로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수 조용필은 어마어마하다. 진짜 거인”이라며 “가창력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창작의지, 이런 것들은 정말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안성기는 조용필의 많은 곡을 즐겨부른다면서 애창곡 중 하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한 소절을 직접 불러주기도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몸과 마음이 푸근하게 젖어든다고 그럴까? 너무 많이 알려졌지만 너무 좋아하는 노래”라고 꼽았다. 

또 조용필의 음악이 50년간 사랑받은 비결로는 “노래를 들었을 때 동화가 되고 공감이 되고 아직까지도 어떤 음악을 내놓을지 모른다는 어떤 기대감이 있는 가수이기도 하고. 그런 모든 여러 가지 요소가 조용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5월12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5월1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 6월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등지서 50주년 기념 투어 ‘Thanks to you’를 개최하며, 서울공연 티켓은 20일부터 인터파크를 통해 오픈될 예정이다. 

반세기 넘어 전세대가 주목하는 가수는 매우 드물다. 조용필은 예전에도 가왕이었고 지금도 가왕이다. 다가올 콘서트서 앞으로도 변치 않을 가왕으로서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 조용필은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방송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지를 소비시대로 변모하고 있는 음악계에 오르지 음악으로만 평가받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 이정표

한동윤 음악평론가는 “과거 명성만 갖고 안주해 온 가수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라고 그를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 또 다시 그의 목소리에 온 국민이 빠져들 것으로 예상된다. 조용필의 데뷔 50주년은 대한민국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의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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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