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광복 첫해인 1945년. 그해가 끝나기 전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의안이 나오면서 대한민국은 극한 대립의 진통을 겪었다. 신탁·반탁으로 나뉘어 대한민국은 ‘혼돈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2017년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한민국은 또다시 국론분열의 기로에 섰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하 박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헌법재판관 8명이 이날 만장일치 의견으로 탄핵안을 인용한 것이다. 인용 직후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지위를 잃게 됐다.
만장일치 의견
모든 지위 잃어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대립 양상이 국론분열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면서 대한민국은 또 한 번 기로에 서게 된 셈이다.
지난 10일 아침 탄핵선고가 있었던 헌법재판소 앞도 이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헌재 주변은 경찰버스로도 부족해 일반 버스까지 동원되는 모습이었다. 이날 120개 중대와 360대의 버스, 경찰 9600여명이 동원됐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선고까지 대한민국은 전 국민적 갈등을 경험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토요일마다 열렸으며 탄핵 기각을 요구하는 탄핵 반대 집회도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고조되는 양상이었다.
국론분열에 대한 우려감도 고조되는 모습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탄핵 찬성 여론이 80%를 웃돌았지만 탄핵 선고 막판 실시된 조사에서 70% 선으로 무너지는 등 반대 여론이 오르는 모양새였다.
그러면서 탄핵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10% 국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일보>와 오피니언라이브가 실시한 탄핵 인용에 대한 승복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민 10명 가운데 1명은 승복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진보-보수 뒤엉켜 ‘혼돈의 장’
여야 한 목소리 국론분열 우려
정치권에선 탄핵 충격 이후 국론분열을 막자는 분위기가 여야를 막론하고 형성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정치인들은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며 향후 국론분열을 막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
안희정 충남지사도 “헌법절차에 따른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역시 “헌법적 절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며 “그것이 민주국가고 준법정신 아닌가”라고 말했다. 범여권 인사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은 “결론이 어떻게 나더라도 모두 승복하고 더 이상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헌법적 질서를 따르는 것은 모든 정치인과 국민의 자세라고 생각한다”며 승복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헌재서 결정하면 전부 승복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김문수 비대위원과 같은 당 원유철·안상수 의원도 “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헌재 결정 승복
혼란수습에 역량
특히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서도 탄핵 이후에 대한 국론분열을 걱정하는 상황이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혼란의 시작이 아닌 끝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 시장은 헌재 탄핵심판 결정 이후 적정한 시간에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상처받은 시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실제 이들은 국민대통합 행보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 전 대표는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공식일정을 잡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서 탄핵 선고를 확인한 뒤 오후에 여의도 캠프 사무실서 향후 국민들의 통합을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
안 지사 역시 탄핵 결과가 나오는 10일부터 주말인 12일까지 선거를 위한 행보를 중단하고 국민 대통합에 힘을 실었다.
안 지사 측 캠프 관계자는 “헌재 결정이 나오는 순간부터 강하게 대치한 갈등이나 긴장을 완화할 필요가 있고, 특정 후보가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유한국당 대선주자인 홍 지사도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면담 외에는 뚜렷한 공식 일정을 잡지 않는 등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탄핵 선고 전날인 9일, 여야 중진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탄핵 결과에 승복하고 이후 혼란을 수습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 의장은 “모두가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고 또 통합된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데 합의했다”며 “헌재 선고가 되고 나면 혹시 있을 수 있는 이런저런 집회에 대해서는 정치인이 참여를 자제하는 등 노력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시위보다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치권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탄핵 기각을 주장하던 단체에선 여전히 반발이 심해지면서 향후 정국에 불안요인으로 부각되는 모습이다. 탄핵 인용 전 이 같은 징후는 곳곳서 발견됐다. 지난달 23일 인터넷에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살해하겠다는 글을 올렸던 남성이 경찰에 자수하기도 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날 ‘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온라인 카페에 이 재판관에 대한 살해 예고 글을 올린 혐의로 최모(25)씨를 입건해 조사하기도 했다.
박사모는 앞으로?
테러 위험도 감지
최씨는 이날 오전 2시께 경찰에 자수해 “수사가 개시됐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두려움 등 심적 부담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최씨는 ‘구국의 결단22’ ID를 이용해 “이정미만 사라지면 탄핵 기각 아니냐”는 제목의 게시글에서 “이정미가 판결 전에 사라져야 한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글을 올려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 서울서 열린 박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문 전 대표에 대한 테러 첩보가 입수돼 경찰이 신변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부인은 자택 앞에서 벌어진 보수단체의 시위로 충격을 받아 혼절하기도 했다. 특검팀 관계자는 지난 8일 “최근 박 전 특검의 부인이 집 앞에서 열린 과격시위로 충격을 받고 혼절해 응급치료를 받았다”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외국으로 나가는 방법도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사건 당시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던 일부 단체 회원들이 박 전 특검의 자택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찾아가 “이제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며 험한 분위기를 조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특검은 이들을 상대로 집회 및 시위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이제정 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박 전 특검의 아파트 단지 경계 100m 이내서 ‘박영수 죽여라’ ‘모가지를 따 버려라’ ‘때려잡자 박영수’ 등의 구호를 외치거나 게시물을 이용한 집회·시위를 금지했다. ‘몽둥이맛을 봐야 한다’ ‘총살시켜라’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등의 과격한 표현도 금지 대상에 포함됐다.
정치권 당분간 대통합에 방점
어렵던 IMF처럼…한마음 기대
경찰은 이들 사건에 대해 협박·개인정보보호법위반 등 혐의로 내사에 착수했다.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서 “(범죄의) 실현가능성과 구체성을 검토해서 내사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다”며 “(이정미 헌법재판관 권한대행의) 주소를 공개하고 자주 가는 단골업체를 공개했는데 이런 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김 청장은 “내사를 거쳐 입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탄핵 기각을 요구하는 단체서의 반발이 거센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불안한 정국 수습까지 갈길이 녹록치 않다. 특히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일부 보수단체는 탄핵이 인용되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어 긴장감은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쏠린다. 박 전 대통령이 헌재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경우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을 결집 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탄핵 인용시
엄청난 사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탄핵 심판 전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이 나와도 승복해야 한다”며 “(승복 결정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통합을 위한 마지막 역할”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