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런 연유로 충과 효를 거론하였네.”
흥수가 의미를 헤아린다는 듯 술잔을 주시했다.
“선왕께서 교기를 포함하여 사택비 주변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취하지 말라는 유명을 주셨었다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순간 흥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특히 사택비에 대해서는 각별한 말씀을 주셨었네.”
의자왕이 흥수의 말에 개의치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자 흥수의 입에서 절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오면, 전하께서는?”
“그래서 군사에게 충과 효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물었던 게 아니겠는가. 백제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군사의 말대로 조처를 취해야 하건만 선왕에 대한 효의 문제로 접근하면…”
의자왕이 말을 하다 말고 잔을 비워내자 흥수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로고.”
“하오나, 전하.”
“말해보게.”
“전하께서는 이제는 한 아버지의 아들에 앞서 한 나라의 군주이시옵니다.”
“그 말인즉.”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로, 여하한 경우든 소신들은 전적으로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부디 선왕의 아들만이 아닌, 백제의 아버지로서 판단해 주셔야 하옵니다.”
“백제의 아버지라.”
“전하의 판단에 백제의 명운이 걸려있사옵니다. 하옵고.”
“말해 보게.”
“사택비의 경우 선왕의 후궁이었던 만큼 여하한 경우든 정실로 들일 수는 없사옵니다.”
의자왕의 표정이 알듯 모를 듯 변해갔다.
당나라 수도 장안의 국학에서 공부하던 고구려의 태자 고환권이 돌아오자 영류왕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고 측근들과 함께했다.
“태자는 국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고?”
영류왕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동생 고대양과 이리 등의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분에 넘치지 말며 항상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순간 고대양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우는 왜 그러는가?”
“그저 저들에게 고분고분 처신하라는 의미 아닌지요.”
“허허, 왜 그리 곡해하시는 게요?”
곁에 있던 이리가 혀를 차며 반응했다.
“그게 어찌 곡해란 말이오!”
“대인께서는 세상 이치를 그리도 모르십니까!”
고대양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리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 이치라니요!”
“지금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당나라의 세를 모른다 하지는 않겠지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무슨 상관이라니요. 한창 기승을 부리는 세력에는 대항하지 말라는 기본 원칙도 모르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금 세가 기울었으니 그저 저 오랑캐 놈들의 신하 노릇이나 하고 있어야 합니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신하라니요, 협력관계지요!”
“지금 되어 가는 꼴이 협력이오!”
“그만들 하시게!”
고대양이 핏대를 높이자 가만히지켜보던 영류왕이 제동 걸고 나섰다.
“그를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 없네.”
“형님, 아니 전하. 우리 고구려가 왜 이리 되었습니까. 우리에게 빌붙어 먹기 급급했던 선비족들이 세운 당나라에 왜 이리도 줏대 없이 설설 기어야 합니까?”
“그거 참, 이 좋은 날 그만 두라고 해도.”
당나라 양면정책 고수…위기감 느낀 영류왕
‘고대양’과 ‘이리’ 논쟁… 전쟁 가능할까?
영류왕이 목소리를 높이자 고대양이 헛기침하고는 슬그머니 고개 돌렸다.
“숙부, 이제 그만 진정하세요. 전술상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니꼽더라도 잠시 그들의 분위기를 맞추어주는 일이 이롭다는 생각입니다.”
나이 어린 조카의 이야기에 고대양이 헛기침했다.
“태자의 눈으로 본 저들의 세는 어떤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당나라 수도의 위용과 그들의 세 확장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는 화친을 도모하는 편이 이롭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영류왕이 그 의미를 새긴다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울러 조만간 사절을 보내리라 하였습니다.”
“사절이라니요?”고대양이 다시 나섰다.
“당나라 황제께서 소자의 방문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병부 직방낭중(職方郎中)인 진대덕을 사절로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병부 직방낭중이라 하였소?”
“그렇습니다, 숙부.”
“병부 직방낭중이라면 군사 지도 제작과 공물에 관한 일을 보는 사람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사절입니까! 이놈들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사지도를 작성하려는 의도로 입국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틈을 타고 고대양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리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십니까?”
가벼이 한숨을 내쉰 이리가 나섰다.
“뭐라! 부정적이라!”
“지금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 병부 관련사항 아닙니까. 그러니 새로이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에 정보도 나누고 물물교환을 논의하기 위해 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보시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말이 되는 소리라니요!”
“이 놈들이 양면 작전으로 접근하려는 모양인데 그를 두고 새로운 관계설정이라니. 도대체 그 말이 가당키나 하다 생각되오!”
“양면이라니요?”
흡사 영류왕의 생각을 이리가 대변하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를 칠 방도를 구하고 다른 편으로는 조공을 빌미로 경제적인 실리를 취하겠다는 뜻임을 정말 모릅니까?”
고대양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영류왕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아우.”
“말씀하시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하는가?”
“딱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고구려의 자존심을 지키고 저들의 술수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자는 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찌그러져가던 이리가 다시 나섰다.
“당장 전쟁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시에 전쟁이라도 불사할 마음의 자세를 견지하며 오랑캐를 상대하자 이 말씀입니다.”
고대양이 이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영류왕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유사시 전쟁을 한다고 치세. 그러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국력으로는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당나라에 적수가 될 수 없사옵니다.”
고대양이 자신에 앞서 이리가 답을 하고 나서자 고개를 돌려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았다.
“당신 고구려 사람 맞소!”
“그 무슨 망발입니까. 지금 어떻게 하면 고구려를 살릴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 그리 무례한 소리를 하는 게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