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럼 내가 보위를 이어받으면 만에 하나 자신을 해칠까봐, 그것이 걱정되어 저런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그리고 그 요부 기질 말입니다.”
“요부 기질이, 왜요?”
“사택비가 말은 못하지만 상당히 애가 탈 듯합니다. 저런 류의 여인은 다른 건 몰라도 남자 없이는 살 수 없지요. 현 왕께는 아무래도 무리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계모를?”
“권력의 문제입니다. 일단 권력부터 승계하신 후에 뒷일을 생각하시지요.”
“하기야, 형제간에도 비일비재하거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인인데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그리고 여차하면.”
“여차하면이라니요?”
“어차피 내 경우 부인이 죽고 없지 않소.”
“하오면?”
“아니오,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급하게 말을 마친 효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형님, 안에 계십니까?”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부여성(중국 길림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연태조가 축성 과정 중에 지병으로 사망하자 관례에 따라 큰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업을 지속하던 터였다.
수하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려놓고 잠시 짬을 내어 요동성 집무실에서 두 명의 여인들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며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한창 술기운이 고조될 즈음 동생 연정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정토냐?”
평양성에 머물러 있을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올라갔다.
“그렇습니다, 형님.”
“예까지 무슨 일이냐?”
“일은 무슨 일입니까, 형님 일 때문이지요.”
“내 일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뭐 하러 이 먼 곳까지 와서 형님 휴식 시간을 빼앗겠소!”
연개소문이 소리를 높이자 연정토 역시 마땅치 않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연개소문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연정토가 급히 들어섰다.
“너도 술 마시다 온 거냐?”
“술은 무슨 술입니까. 놈들의 소행이 하도 괘씸해서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열 받아 그렇지요.”
“무슨 일인데 그리 달았는가. 일단 자리 잡고 이야기나 들어보자.”
연개소문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손짓하자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이동했다.
연정토가 자리를 비워주는 여인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연개소문이 연정토에게 빈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대답 대신 한 번에 잔을 비워낸 연정토가 탁 소리 나도록 잔을 내려놓고 잠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쥐새끼들이 형님에게 직위를 주지 못하겠답니다.”
“뭐, 뭐라고!”
연개소문이 마신 술 탓인지 연정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그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 놈들이 형님에게 대대로의 직책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연정토가 안주도 먹지 않고 빈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자 여인이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런 찢어죽일 놈들이 있나!”
순간 분개한 연개소문이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들고 있던 잔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자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뿐만 아니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를 빌미로 장성 축조 작업을 멈추겠답니다.”
“뭐, 뭐라!”
연개소문이 기가 찬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연정토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천리장성 축조 척척…돌연 연정토 방문
대대로 직책 좌절 위기 처한 연개소문
연개소문의 얼굴에 잠시 허탈감이 비치더니 급격하게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찌하다니. 모조리 찢어 죽여야지!”
“그 다음은요?”
너무 흥분하다보니 몸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연개소문의 외침에 군사 한명이 급히 들어왔다.
“지금 당장 가서 선도해 책사를 오시라 해라!”
“선 책사를요!”
“그 사람에게 자문을 얻어야겠다.”
“잠깐만 기다려라!”
명을 받은 군사가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연정토가 소리침과 동시에 강렬한 눈길로 연개소문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왜 그러느냐?”
“잠시 생각해보고 움직이지요. 어차피 서두른다고 당장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동생의 말이 일리 있다는 듯 연개소문이 그저 거의 빈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급격하게 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던 여인이 몸을 떨면서 연개소문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잔이 채워지자 연개소문이 연정토를 바라보며 일단 마시자는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이 흥분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듯 차분하게 잔을 비우고 한숨인지 의도적인지 길게 여운을 남겼다.
“어떤 놈들이 그런다고 하드냐?”
“어느 놈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입장이라 합니다.”
“모두가! 무엇 때문에, 어째서.”
“뭐긴 뭡니까, 형님 성정 때문이지요.”
“내 성정 때문이라.”
연개소문이 여인들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여하튼 귀족 놈들 모두 한통속이란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영류왕은 어떤가?”
“당연히 같은 입장이지요. 그리고 그놈이 묵인하니, 아니 그놈이 은근히 선동하니 귀족 놈들이 저리 설쳐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찢어죽일 놈. 내 저를 위해 이 고생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연개소문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놈은 그렇다 치고 귀족들 중에서는 어느 놈이 가장 나선다고 하더냐?”
“이리가 주동하고 있다 합니다.”
“이리, 그 이리 같은 놈이!”
금방이라도 무언가 칠 기세로 불끈 쥔 연개소문의 주먹이 심하게 떨렸다.
“형님, 이제 그만 흥분 가라앉히시고 어찌할지 차근히 생각 좀 해보세요.”
“여하튼 선 책사를 먼저 만나본 연후에 어떻게 할지 정하도록 하자.”
말을 마친 연개소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연정토가 급히 뒤를 따랐다.
집무실을 벗어나자 이제나저제나 연개소문의 행차만 기다리던 고장은이 급히 말 가까이로 다가와 무릎 꿇고 엎드렸다.
연개소문이 그의 등에 발을 올려놓았다가는 이내 내려놓았다.
“이런 꼴이 보기 싫다, 이거지.”
“그렇지요. 귀족 출신들의 등을 밟고 말을 타는 형님이 보기 싫다는 거지요.”
“이제부터는 그리하지 말까?”
“당분간만이라도.”
“그러지 뭐.”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어 연개소문을 바라보던 고장은이 둘의 대화를 듣고는 엉거주춤 일어서려 했다.
“이놈아, 누가 일어나라 했느냐. 이번까지는 해야겠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