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파란의 4·13> ⑩<화제의 인물> 대망론 불붙은 김부겸

야당 불모지에 깃발 “노무현이 보인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역사에 길이 남을 한판 승부였다. 예상을 뒤집고 야당이 16년 만에 의석 과반수를 차지했기 때문. 그 중심에 김부겸 당선인이 있다. 여권의 심장에 깃발을 내리 꽂았다. 내친 김에 대권주자로 치고 올라갈 기세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당선인은 지난 13일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갑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대구에서 제1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무현식 정치실험
31년 만에 TK혁명

김 당선인은 “공존과 상생의 정치를 열어가겠다”며 “여야 협력을 통해 대구를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우라는 대구시민의 명령에 순명하겠다. 저부터 손을 내밀고 자세를 낮추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이어 “지난 4년 동안 민심의 바다에서 한국 정치가 무엇을 못 보고, 무엇을 제대로 못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며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는 정치를 넘어 여야가 협력할 때는 협력하고 싸울 때라도 분명한 대안을 내놓고 싸우는 정치를 하겠다”고 덧붙였다.

보수의 심장인 대구는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이후 단 한 차례도 야권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김 당선인은 중선거구제였던 12대(1985년) 이후 대구에서 탄생한 첫 정통 야당 의원으로 헌정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세웠다. 대구에서는 14대(1992년)와 15대(1996년) 총선에서 국민당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가 당선된 적은 있지만 이들은 ‘정통 야당’은 아니었다.


김 당선인은 경기 군포에서 3선을 지낸 중진의원이었다.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뽑혀 TK 출신으로는 40년 만에 첫 선출직 야권 지도부가 됐다. 그는 지역주의 타파, 경쟁의 정치를 기치로 내세우며 19대 총선에 대구행을 선택했다.

당시 김 당선인은 “군포에서 4선을 하는 건 월급쟁이 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과제인 지역주의를 넘어서겠다”며 고향 대구로 홀연히 내려갔다. 그러나 대구 여당의 아성은 만만치 않았다. 2012년 총선에선 39.9%를 득표하며 파란을 일으켰지만, 기호 1번의 벽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지역주의 타파” 여당 텃밭 대구에 도전
2전3기 끝에 입성…야당후보 처음 당선

내친김에 2년 뒤인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에 도전해 40.3%라는 높은 득표율을 얻었디만권영진 새누리당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졌지만 이겼다”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평가가 이어졌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더 커졌다. 경기도 군포에서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한 관록의 정치인이었지만 연이은 패배는 그를 압박했다.

그러나 ‘삼 세 판’이란 말을 떠올린 그는 이내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고 20대 총선을 준비했다. 오로지 주민만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 비전을 제시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주민들은 서서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줬다.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손꼽혀 온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상대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할 만큼 어느새 탄탄한 지지층이 형성됐다.

이번 승리는 4년 간 한눈팔지 않고 공을 들인 김 당선인의 진정성이 통했기 때문이다. 김 당선자는 선거기간 내내 인적이 드문 주택가 골목이나 아파트단지 담벼락에 대고 혼자 독백하는 일명 ‘벽치기’ 유세로 '바닥민심'을 파고들었다.
 

기호 2번을 특별히 내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김부겸’이라는 인물론으로 승부하자는 전략이었다. 물론 ‘유승민 공천 파동’ 등 새누리당에 대한 대구 유권자의 반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김부겸이란 인물이 아니었다면 대구의 민심을 끌어오지 못했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결국 이번 총선에서 62.5%의 압도적인 지지로 지역주의 타파에 성공했다. '제2의 바보 노무현'이 탄생한 것이다.

부산에서 야당으로 도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의 정치적 야당성향을 일정부분 이끌어내면서, 이를 바탕으로 결국 대통령이란 정상에 올랐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 당선인은 이번 승리로 당당하게 대권후보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일찍이 김 당선인은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는 노 전 대통령에게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물려받았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지역주의 벽을 깼다는 점에서 전국 어디서도 통할 스펙을 갖게 된 것이다.

재야 강경파
정치 온건파

국회 재입성에 성공한 김 당선인은 ‘영남 출신 야당 대선주자’라는 프리미엄을 확보했다. 같은 영남 출신이지만 호남에서 ‘반문(반문재인) 정서’에 시달리는 문재인 전 대표와 달리 폐쇄적인 친노(친노무현) 이미지가 없다는 점도 강점이다. 투표장에선 결국 여당 후보를 찍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대구시민들이 김 당선자를 선택한 것도 그의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민주 내에서는 일찌감치 ‘김부겸 대선 등판론’이 제기됐다. 지난해 전당대회와 문 전 대표의 재신임 국면에서도 ‘김부겸 역할론’이 급부상했지만, 그는 대구 선거에 집중하겠다며 고사했다. 지난해 말 시작된 분당 국면에서도 당을 지켰던 김 당선인은 ‘대구 당선’으로 당내외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전망이다.
 

다만 김 당선인의 여당 의원 경력은 대권가도에서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00년 경기 군포에서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 때문에 김 당선인은 야당 내에서는 세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과거 노 전 대통령이 부산경남 지역과 호남의 결합을 이뤄낸 것처럼 대구경북지역과 호남의 결합을 가능하게 할 인물로 점쳐지고 있다.

김 당선인은 1956년 12월1일 출생했다. 경상북도 상주시 출신으로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며,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두 차례 실형을 살았다. 제적과 복교를 거듭하며 1987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민주통일재야운동연합(민통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 재야운동권에서 활동했다. 이 때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 발표 후 이에 반발하는 6월항쟁을 주도했다. 1991년부터는 민주당에 입당하며 직업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적진에 칼 꽂다 ‘돌풍 어디까지…’
노무현과 같은 길? 그림자 아른아른

김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변인으로 있던 시절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2년 11월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안기부가 대선을 앞두고 차례로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며, 오래전에 인지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해온 것을 선거 직전에 전격적으로 발표해 선거정국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김 당선인도 연루돼 세 번의 구속을 당했고 이듬해 2월 석방됐다.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 이후 1995년 새천년민주당과 민주당으로 분당됐다. 민주당에 남은 의원들은 민주화와 당 쇄신, 지역주의 극복, 3김 청산 등을 목표로 국민통합추진회의(이하 통추)를 결성했다.


통추에는 김원기, 제정구, 노무현, 김정길, 이철, 유인태, 원혜영 등 전·현직 의원들이 참여했다. 김 당선인도 이 중 한 명으로 막내격이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왕시·과천시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당선인은 김 전 대통령과 갈라섰다. 김 전 대통령이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와 연합하자 김 당선인은 한나라당행을 택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아버님 같은 분인데, 정치적으로는 끝까지 따를 수 없었던, 그래서 김대중 총재만 생각하면 늘 회한에 젖는다’고 썼다.

김 당선인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경기 군포 지역구의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에 첫 발을 내딛는다. 한나라당 의원이었지만, 재야 출신이다 보니 여러 현안에 대해 당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김 당선인은 한나라당 내에서 소장개혁파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대북송금특검법안에 반대하다 당내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민주당 시절의 정치적 스승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2003년 8월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 군포에서 17대, 18대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하며 3선의원이 됐다. 원내 수석부대표, 교육과학기술위원장 등을 지내며 야권 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내친김에…
대권주자로!

하지만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이력과, TK라는 이유로 당내에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김 당선인은 재야 시절 강경파로 활동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온건파로 분류된다. 백봉신사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그는 ‘정치는 통합과 상생을 목표로 해야 국민에게 도움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김부겸은?]

 

▲1958년 경북 상주 출생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간사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진보정치연합 대변인 ▲민주당 부대변인 ▲16대 국회의원 ▲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의장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18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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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