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두산가 장손 박정원 신임 두산그룹 회장

샴페인은 나중에…밀린 숙제 많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서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를 이어 박정원 ㈜두산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으로 등극한다. 박정원 신임 회장은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박두병 초대 회장의 장손이다. 오너 4세 경영이 시작됐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2일 열린 두산 이사회에서 “그룹 회장직을 승계할 때가 됐다”며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박정원 ㈜두산 회장을 천거했다. 그동안 지주사인 두산의 이사회 의장이 그룹 회장직을 수행해 왔다. 이에 따라 박정원 회장은 오는 25일 ㈜두산 정기주총에 이은 이사회에서 의장 선임절차를 거친 뒤 그룹 회장에 정식 취임할 예정이다.

박용곤 장남
아름다운 승계

박용만 회장은 이날 이사회에서 “오래전부터 그룹회장직 승계를 생각해 왔는데 이사 임기가 끝나는 올해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며 “이런 생각으로 지난 몇 년간 업무를 차근차근 이양해 왔다”고 밝혔다. 박용만 회장은 최근 들어 본인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박정원 회장이 승계하는 문제에 대해 지인들에게 자주 언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 이사회 의장은 등기이사 중 선임하기 때문에 경영권 승계 전 등기이사 등재가 필수조건이다. 박정원 회장은 지난해 3월 주총에서 ㈜두산 등기이사로 재추대된 바 있다. 현재 7인의 이사회 구성원 중 박용만 회장을 제외하면 박정원 회장이 유일한 오너가 등기이사로 남아있다. 박정원 회장은 이미 오너가 중 ㈜두산 최대주주다. 박정원 회장은 지난해 9월30일 기준 보통주 133만7013주(6.29%), 우선주 1만5881주(0.29%)를 보유 중이다.

두산그룹은 박용만 회장에 이르기까지 형제가 번갈아 가면서 ‘회장직’을 맡는 독특한 구조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고 박두병 초대 회장이 현재 그룹의 모태를 일군 이후 3세대부터 이례적인 형제경영을 시작했다. 박두병 초대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1981년부터 1996년까지 그룹 총수를 역임한 이후 차남인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박용오 회장은 동생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그룹 총수로 추대되자 이에 반발해 검찰에 비자금을 횡령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며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박용만 회장은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의 뒤를 이어 2012년 4월부터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박용만 회장의 동생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두산그룹과 별도로 사업을 이끌고 있어 두산그룹 경영권 승계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박용만 회장은 특히 “지난해까지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서도 턴어라운드 할 준비를 마쳤고 대부분 업무도 위임하는 등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용만 회장은 앞으로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서 두산인프라코어 턴어라운드에 힘을 보태는 한편 두산 인재양성 강화 등을 위해 설립된 DLI㈜(Doosan Leadership Institute) 회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데도 주력할 것이라고 두산 측은 전했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가 4세들 중 가장 맏형으로 일찌감치 두산그룹 4세 경영의 1순위로 꼽혀왔다. 1962년생인 박정원 회장은 대일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두산산업(현 두산 글로넷BU) 뉴욕지사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6개월 뒤 도쿄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남의 밥을 먹어봐야 한다'라는 두산 고유의 경영철학에 따라 1992년 일본 기린맥주에 들어갔다. 2년 뒤 OB맥주 이사대우로 두산에 재입사했다. 1998년 두산관리본부 상무에서 2001년 두산상사BG 사장이 됐다. 2005년 두산건설 부회장을 맡았고, 2007년에는 지주회사 두산의 부회장을 겸하게 됐다. 2009년 두산가 4세 가운데 처음 회장으로 승진했으며, 3년 뒤인 2012년 지주회사 ㈜두산 회장에 올랐다.

사원 입사 31년 만에 총수로 등극
박용만 회장 큰조카에 경영권 넘겨

박 용만 회장은 특히 “지난해까지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서도 턴어라운드 할 준비를 마쳤고 대부분 업무도 위임하는 등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용만 회장은 앞으로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서 두산인프라코어 턴어라운드에 힘을 보태는 한편 두산 인재양성 강화 등을 위해 설립된 DLI㈜(Doosan Leadership Institute) 회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데도 주력할 것이라고 두산 측은 전했다.

박정원 회장은 30여년 동안 두산그룹의 변화와 성장에 기여하면서 그룹을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로 꼽혀왔다. 2007년 ㈜두산 부회장, 2012년 ㈜두산 지주부문 회장을 맡으면서 두산그룹의 주요 인수합병(M&A)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등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 ‘승부사 기질’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례로 1999년 부사장으로 상사BG를 맡은 뒤에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 사업 위주로 과감히 정리해 이듬해인 2000년 매출액 30% 이상 끌어올렸다. 수익 사업과 취약한 재무구조 상태였던 두산상사BG 정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두산 경영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상사BG가 경영상을 받기는 1987년 이후 18년 만이다.
 

두산그룹의 인재육성과 신성장동력 발굴에 큰 기여를 해왔다는 게 내부 평가다. 박정원 회장은 2014년 연료전지 사업, 2015년 면세점사업 진출 등 그룹의 주요 결정 및 사업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료전지사업은 2년 만에 수주 5870억원을 올리는 등 두산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부상했다.

두산그룹에 따르면 박 회장의 인재철학은 현재 구단주를 맡고 있는 두산베어스의 선수육성 시스템에서 잘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역량 있는 무명선수를 발굴해 육성시키는 ‘화수분 야구’로 유명한 두산베어스의 전통에는 인재발굴과 육성을 중요시하는 박정원 회장의 경영철학이 반영됐다.

밑바닥부터…
준비된 경영인

특히 결정적인 순간 ‘승부사 기질’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례로 1999년 부사장으로 상사BG를 맡은 뒤에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 사업 위주로 과감히 정리해 이듬해인 2000년 매출액 30% 이상 끌어올렸다. 수익 사업과 취약한 재무구조 상태였던 두산상사BG 정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두산 경영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상사BG가 경영상을 받기는 1987년 이후 18년 만이다.

박정원 회장이 승계 이후 풀어야 할 현안도 산적하다. 올해로 예정된 두산인프라코어의 소형건설장비 자회사인 두산밥캣의 국내 증시 상장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지가 과제다. 두산밥캣은 올해 상장 목표로 상장예비심사를 신청할 예정이다. 두산인프라코어 재무구조 악화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2007년 인수한 밥캣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공작기계상업부 매각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박정원 회장은 야심차게 진출한 면세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아울러 사업 포트폴리오 재조정도 마무리해야 한다. 지난해 3차례 희망퇴직을 진행하면서 불거졌던 ‘28세 신입사원 명예퇴직’ 등으로 받았던 따가운 시선도 회복해야 한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 일가 4세 가운데 가장 빠른 승진을 해왔다. 이것이 장남에 대한 배려는 아니다. 두산그룹 오너 일가에 있어서 장남은 가장 큰 희생과 책임을 떠안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밥캣 상장·면세점 안착 등 현안 산적
새 회장님 능력은? 돌파 카드에 주목

두산 일가는 자식들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매헌 박승직 창업주는 “재산은 못 물려줄 지언정 교육만은 시키겠다”며 6형제에게 종아리 매질도 망설이지 않았다. 종아리 매질을 가장 오랫동안 맞은 이가 박정원 회장의 아버지인 박용곤 명예회장이었다. 자신의 잘못은 물론 동생들의 잘못도 모두 장남의 책임으로 돌렸다.

박정원 회장도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원 회장은 재벌가 자제답지 않게 겸손하고, 매사 행동거지를 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그가 언론에 조명받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 과묵하고 소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타워 주변 식당가에서 식사를 하거나, 두산베어스가 경기를 하는 잠실야구경기장에서 의외로 쉽게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박정원 회장은 자타 공인 야구광으로도 유명하다. 부인 김소영씨는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인기 제13대 국회의원의 딸이다. 슬하에 딸 상민씨와 아들 상수씨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승부사 기질
소탈한 성격

두산그룹은 이번에 평화적인 회장직 승계를 통해 4세 경영에 진입함으로써 형제경영의 모범적 사례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 다만 일각에선 “고 박용오 전 회장의 ‘왕자의 난’이 갑자기 터져나온 것처럼 이번 회장직 승계를 놓고도 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갈등이 있었을 수 있다”며 “박정원 그룹 회장 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 잘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재계 ‘4세 시대’ 주역들 창업주 아들의 아들의 아들 등장

두산그룹이 재계에서 처음으로 4세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재계 4세 경영인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산그룹 다음으로 4세 경영 체제에 가장 가까워진 그룹은 GS그룹이다. 지난해 연말 GS그룹은 연말인사를 통해 4세들을 경영 전면에 포진시켰다.


허만정 창업주의 증손자이자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장남인 허준홍 GS칼텍스 법인사업부문장이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허준홍 GS칼텍스 전무는 허만정-허정구-허남각으로 이어지는 GS그룹의 직계 장손이다. 1975년 생으로 허 전무는 2005년 GS칼텍스에 입사했다.

허창수 GS 회장의 외아들인 허윤홍 GS건설 사업지원실장도 상무에서 전무로 올라갔다. 허윤홍 전무는 1979년생으로 2002년 GS칼텍스로 입사했다. 허윤홍 전무는 GS그룹의 기틀을 마련한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장손으로 정통성 측면에서는 허준홍 전무에 밀리지 않는다.

허광수 삼양인터내셜 회장의 장남인 허서홍 부장 역시 연말 인사에서 GS에너지 전력·집단에너지 사업부문장을 맡아 상무가 됐다.

30∼40대 젊은 후손들 활약
밑바닥부터 시작한 경영수업

코오롱그룹 또한 본격적으로 오너 4세들이 임원 반열에 올랐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규호 상무보가 임원 대열에 합류했다. 이규호 상무보는 1984년 생으로 지난 2012년 코오롱인더스트리에 입사한 직후 구미 공장에서 현장 근무를 했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영진단실 부장에서 상무보로 승진했다. 이규호 상무보는 고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의 증손자이자 지난해 별세한 이동찬 명예회장의 손자다.

두산그룹도 4세에게 중책을 맡겼다. 두산그룹 박두병 초대 회장의 손자이자 박용만 현 회장의 장남인 박서원 오리콤 크리에이티브총괄 부사장(CCO)을 올해 사업권을 따낸 면세점 유통사업부문의 전략담당 전무로 올랐다. 두산은 동대문 두타에 면세점을 만들어 내년 중 영업에 들어갈 예정인데, 새로 진출한 면세점 사업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박서원 전무는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 재학 중이던 2006년 빅앤트 디자인그룹을 설립했다. 빅앤트는 지난해 두산그룹 계열사로 편입됐고, 박서원 전무는 두산그룹 광고계열사 오리콤의 CCO를 맡았다. 그는 지난 7월 한화그룹 광고계열사인 한컴을 인수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면세점 사업은 그룹 오너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박 부사장의 경영능력을 평가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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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