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불황 속설 오해와 진실

여기저기 불길한 징조 ‘불안하네∼’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수치로 드러나는 지표는 ‘호황’과 ‘불황’의 반복을 예측하는 가장 신뢰할 만한 경제학적 접근법이다. 허나 멀게만 느껴지는 지표보다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이른바 ‘속설 경제학’에 사람들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히 통용되는 ‘불황징크스’는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질수록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진다. 지갑이 얇아진 만큼 섣부른 소비는 금물이다. 정신적 충족과 위안을 얻기 위한 소비, 즉 큰돈이 들 법한 선택은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상품이 안 팔리는 건 아니다. 불경기를 틈탄 ‘불황징크스’는 서민들의 변화된 소비 패턴을 암시한다.

[불황의 척도]
미니스커트 효과

“불황에는 역시 미니스커트”라는 속설은 가장 친숙한 불경기 징크스다. 가라앉은 기분을 띄우거나 무거운 사회적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미니스커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밑단이 퍼진 형태의 A라인 스커트와 타이트한 형식의 H라인 미니스커트 모두 불티나게 팔린다. 모직소재의 미니스커트와 발색이 오래 지속되는 틴트 제품이 인기상품에 올랐다.

물론 ‘불황=미니스커트’ 공식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 1970년대 미국 경제학자 마브리의 ‘치마 길이 이론(Skirt-Length Theory)’에 따르면 여성의 치마 길이는 오히려 호황일수록 짧아진다. 지금도 미국 증권투자가들에게는 ‘롱 스커트=약세장’, ‘미니스커트=강세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가장 큰 불황의 시기였던 1929년 미국 대공황 때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발등을 덮을 만큼 길었던 것도 미니스커트 속설을 의심케 한다. 국내에서도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에 치마가 길어긴 전례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기와 상관없이 미니스커트는 꾸준히 인기몰이 중이다.

[작은 사치]
진해지는 립스틱

불황일수록 립스틱이 잘 팔린다는 ‘립스틱 효과’는 1930년 미국의 대공황 시기에 생겨난 용어다. 심각한 불황속에서 소비자들의 소비 심리가 움츠러들지만 립스틱 만큼은 매출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품위를 유지하려는 태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으로 인해 화장품을 사지 못하고 립스틱만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슬픔, 우울함을 극복하는 작은 사치로서 립스틱만큼 만족감을 높이는 게 없다는 뜻이다. 특히 빨간색 립스틱은 얼굴을 화사하게 보이도록 해 인기가 높다. 일부에서는 빨간 립스틱 구매가 늘면 결국 경제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한 글로벌 화장품 회사는 이와 관련해 립스틱 판매량과 경기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립스틱 지수를 만들기도 했다. 9·11테러 당시 불황기를 맞은 미국에서는 립스틱 지수가 크게 상승했는데 자연색 계통보다 화사하면서도 강렬한 와인색 립스틱이 인기였다고 한다.

[성욕도 연관]
콘돔 판매는?

불황형 상품으로 인식되던 콘돔시장은 최근 3년 사이에 급성장했다. 2011년 40억원대이던 콘돔 시장 소매 유통분야 판매액은 어느새 1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콘돔이 잘 팔리는 것은 건강한 성생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측면과 함께 불황의 영향이 가세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용 침체 및 퇴직자 증가, 소득 정체·감소에 따른 미래의 불안감으로 부부들이 출산 계획을 늦추는 데다, 가계경기 위축에 따른 외식 자제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콘돔업체들의 매출액 증가는 경기 불황 때문이 아니라 콘돔의 해외 수출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콘돔 시장은 공공 시장과 상용 시장으로 구분되는데, 공공 시장의 규모는 약 20억개로 한국 기업들이 30퍼센트 이상을 공급함으로써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다.

업계에서는 불황일수록 콘돔이 많이 팔린다는 속설에 신빙성이 없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콘돔을 두고 불황의 골이 깊을수록 호황을 누리는 ‘열등재’ 상품으로 분류하는 건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말했다.

[불황의 표본]
정장 매출은?

흔히 정장 매출 감소는 불황의 영향으로 받아들여진다. 가정에서 의류비 지출을 줄일 때 여성복→아동복→남성복 순서로 이어지는데 남성복을 대표하는 정장의 수요 감소는 가장 뒤늦게 이뤄진다.

실제로 남성 패션시장에서 캐주얼 의류 매출비중은 정장 매출을 거의 따라잡았다. 캐주얼 매출 증가율은 줄곧 정장 매출 증가율을 앞서 왔다. 2004년 정장 매출이 남성 패션시장 전체에서 차지한 비중은 49.8%로 거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비중은 매년 조금씩 떨어져 지난해에는 34%로 감소했다.

널리 알려진 미니스커트·립스틱 주목
점집, 복권, 도박…불안한 현재 자화상

정장의 위축은 경기 불황 탓이 크다. 계절별로 최소 1벌 이상의 정장을 입는 것이 추세였지만 성인 남성들이 얇아진 지갑 탓에 정장 구매를 크게 줄였다. 패션업계도 2009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가두점 확장과 신규 진출을 최소화하고 있다.

다만 정장 판매 감소를 무조건 불황과 연결 짓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차라리 실용성을 강조하는 소비성향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직장 내에서 캐주얼 착장이 트렌드로 굳어지면서 격식보다 실용성에 방점을 둔 소비 성향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뜨는 불황 효자]
고공행진 초콜릿

지출이 줄어들면 작은 투자로 높은 만족을 주는 상품이 뜬다. 초콜릿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초콜릿의 단맛은 불황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FTA 확대와 브랜드간 경쟁 등의 영향으로 예년 대비 가격부담이 많이 줄어들면서 초콜릿 판매가 증가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 프리미엄 초콜릿의 인기는 그야말로 뜨겁다. 홈플러스가 최근 4년간 1월21일∼2월9일 자사 초콜릿 매출을 분석한 결과, 고급 상품군으로 분류되는 수입산 비중이 2013년 58.3%에서 올해 70.2%로 높아졌다.
 


2012년 10월 국내에 상륙한 벨기에 프리미엄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는 론칭 3년여 만에 매장 수를 24개까지 늘렸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국내 제과업체들도 고급 초콜릿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74년 전통의 벨기에 초콜릿 명가 ‘구드런’과 손잡고 프리미엄 초콜릿 ‘Mr.B’를 출시한 오리온은 제품 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말 젊은 여성층을 겨냥한 프리미엄 초콜릿 브랜드 ‘샤롯데’를 선보이고 ‘샤롯데 헤이즐넛 클래식’ 등 6종의 제품을 출시한 바 있다.

[위로 받으려…]
문전성시 점집

점집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과 선거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등 젊은 세대까지 문을 두드리면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상황에 미래를 불안해하는 시민들의 발길까지 더해져 점집과 철학관, 역술원·사주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사주카페 역시 사주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5000원의 타로점에서부터 1만5000원부터 시작하는 사주 등 끼니 값을 훌쩍 뛰어넘는 복비에도 선뜻 지갑을 연다. 장기불황과 극심한 취업난 등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상황이 나아지질 않다보니 무속과 역술 등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높아지는 까닭이다.

[불황형 상품]
복권은 얼마나?


경기가 어려울 때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불황형 상품’ 가운데 복권은 첫손에 꼽힌다.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3조5551억원으로 1년 전보다 2724억원 증가했다. 2003년 4조2342억원을 기록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셈이다.

GDP 대비 복권판매액 비율은 2011년 이후 0.23%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OECD 평균은 0.45% 미국은 0.38%이다. 로또(온라인복권) 판매액은 3조2571억원, 2004년 이후 가장 많았고 올해 판매량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합리적 소비 트렌드 변화상
징크스 맹신할 필요는 없어

복권위원회는 복권판매점 432개를 신규개설한 데다 복권에 대한 긍정적 인식 제고,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 기저효과 등에 힘입어 판매량이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술·담배와 함께 대표적인 불황 상품인 복권의 판매량이 증가한 것은 현 경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합리적 소비]
[렌탈이 대세]

불황은 렌탈 시장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있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돈은 지불하되 소유하진 않는 렌탈이 보편적인 소비 방식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하고 있어서다. 이미 구매력이 약화된 소비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더구나 한 번에 목돈을 들이지 않아도 고가의 다양한 상품을 사용할 수 있고, 주기적인 관리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렌탈 시장 규모는 연평균 12%대의 성장률을 보이며 지난 2011년 10조6000억원에서 2015년 16조9000원으로 60%가량 커졌다.

신규 진출 업체가 늘면서 시장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업계 및 증권사 등에 따르면 현재 국내 렌탈 업체수는 무려 2만3000여개에 달한다. 명품, 유류, 잡화, 악기, 유아용 장난감 등으로 지속적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다만 과거 정수기, 비데 등 생활 가전분야에서 렌탈이 보편화 된 상태였고 이전부터 렌탈시장의 급성장은 충분히 예견된 바 있어 굳이 불경기에 국한지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실속형 신풍속]
[벌크상품 불티]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대용량 제품을 구입하는 ‘벌크(Bulk)형 소비’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 경기 침체로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음식을 통해 정신적 충족감과 위안을 얻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벌크형 소비는 전형적인 불황형 소비 트렌드로 꼽힌다. 대용량 식음료를 사서 집에 쟁여두면 알뜰한 소비를 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혹시 닥칠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든다. 이런 소비자 마음을 간파한 대용량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홍대 앞 커피전문점 ‘핵커피’는 1ℓ 대용량 커피를 4000원에 판매해 대박을 쳤다. 다른 커피전문점 아메리카노(용량 335㎖)가 4000원대에 팔리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6㎏짜리 ‘금풍제과 포대건빵’(1만3300원) 역시 화제다. 큰 포대에 들어 있어 ‘인간 사료’로 불리는 히트 상품이다. 이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SNS에 글을 올리면서 대박아이템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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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