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어깨 무거운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원내대표

문재인과 궁합은…찰떡? 물과 기름?

[일요시사 취재 1팀] 박창민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의 신임 원내대표로 이종걸(경기 안양 만안) 의원이 선출됐다. 이 원내대표는 당내에서 비주류·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4선 의원이다. 지난해 두 차례 원내대표 선거 탈락의 아픔을 딛고 삼수 끝에 제1야당의 원내 사령탑에 올랐다.
           
 
 
1957년 5월22일 이종걸 원내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선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 원내대표는 서울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 안양으로 이사했다. 안양시 만안에 있는 만안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970년 이 원내대표는 만안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민변 변호사 활동
99년 정치 입문
 
이 원내대표는 경기중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중학교 입시가 무시험 전형으로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는 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서울의 예술전문학교인 예원학교 피아노과에 지원 입학시켰다. 중학생 시절 그는 안양에서 서울까지 완행열차 정기권으로 통학했다.  
 
이 원내대표는 예원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예원학교 3학년 무렵부터 예술 전공이 자신의 가야 할 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의 핏속에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원내대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신 독재에 반대하며 친구들과 ‘귀 있는 자 들어라’라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학교 교내 전관에 뿌리는 일에 가담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알았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한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원내대표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싶어 이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수학적 재능이 없음을 느끼고 문과로 전과한다. 1976년 2월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77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성균관대 진학 이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종로 경찰서의 학생담당 정보과 형사의 주요 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독립운동 자금을 부치기 위해 마련한 하숙집에 할아버지의 동지가 찾아왔다가 가면 여지없이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가 와서 괴롭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라며 이 원내대표가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 것에 대해 슬퍼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는 이 원내대표의 행동이 경솔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면서도 그의 학생운동에 대해 ‘그만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이 원내대표는 대학교에 다니며 아카데미 운동을 했다. 서울 마포지역의 노동자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야학 은강학교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학변자(운동학생들이 시위하다 잡히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는 것)로 군에 징집되어 입대했다. 
 
삼수 끝에 당선 1야당 사령탑 접수
당내 비주류·중도 성향…4선 의원
 
이 원내대표는 양평에서 3년 남짓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그는 복학 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중퇴했다. 이후 1983년 서울대학교 인문 2계열에 다시 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후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학사편입한다. 서울대학교 공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범 시험을 2년간 준비한 끝에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9년 졸업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이 원내대표는 사법연수원 2년 차 때부터 변호사 운동을 준비했다. 그 무렵 당시 시민운동가였던 박원순 변호사를 만난다. 그는 잠시 박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참여연대’ 설립 기초를 마련했다. 이 원내대표는 참여연대 기초 사항을 작성했다. 
 
1991년 그는 사법연수원을 마치자마자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에서 인권 변호사로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민변의 간사 변호사로 활동하며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인권 관련 사건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김영삼 정부 당시 노동악법 및 개악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시도할 때 안양에서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모인 시민운동가들로 창립된 안양의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인 ‘안양지역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서울대 민족활동가 사건, 천주교 기독교 애청사건, 시노맹사건 등 많은 시국 사건을 도맡아 승소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동티모르 인권침해반대투쟁, 간첩조작사건의 재심사건, 양심수석방을 위한 위원회 활동 등 인권운동도 전개했다. 
 
무계파로 분류
투사 이미지도 
 
노동분야의 활동에서도 노동조합의 법률자문을 역임하며 사업자와 임금협상 등 단체교섭 시에 발생하는 노동법률문제를 자문했다. 수많은 해고 무효확인 소송, 임금 소송 등 노동관계 소송을 맡았다. 
 
이 원내대표는 한국 사회 여성의 권리 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의 초안을 마련해 입법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을 담당하여 승소했다. 그 공로로 1998년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그는 법제정 분야에서도 성폭력특별법 제정 및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에서 여성인권운동의 일환으로 초안도 작성했다. 이 때문에 1999년 <여성신문사>가 선정한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에 선정됐다. 
 
 
1999년 11월 새천년민주당은 이 원내대표를 변호사 20인 중 한 명으로 영입한다. 이듬해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했다. 
 
2000년 4월 이 원내대표는 제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다. 이때 그는 노무현 후보 비서실 차장이 됐다. 선거 직전인 12월에는 수행실장 역까지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해 재선의원이 됐다. 그는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에 성공한다. 당선 후 열린우리당 원내 수석부대표로 선출됐다. 이 원내대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중에게 인지도를 늘렸다.
 

이 원내 대표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국회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위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을 맞으며 종횡무진 했다. 그해 12월 민주당 내 소장파 모임인 민주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4월 이 원내대표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포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신문사 이름과 최고경영자 실명을 거론해 소송에 휩싸이기도 했다. 당시 이 원내대표는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XX일보 X사장을 모셨고, 그 후로 스포츠XX X 사장을 모셨다고 했다. 보고받았나”라고 질문했다. 이 때문에 해당 신문사는 이 원내대표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결국 철회하면서 사실상 이 원내대표의 승리로 끝났다. 
 
2010년 경기도지사에 예비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당내 여론에 따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양보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 체제가 들어선 6.9전당대회에서 5등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하지만 대선 한달 앞둔 그해 11월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인적 쇄신 취지로 이해찬 대표 등과 함께 지도부에서 사퇴했다. 
 
이후 김한길 대표 체제에서는 당 정치혁신실행위원장을 맡아 국회의원 지위 남용 금지를 골자로 한 정치혁신의 로드맵을 그렸다. 최근에는 ‘클린 종걸’을 자처하며 야당 의원들에 대한 사정기관 수사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야당탄압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5월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장, 올해 2월 박상옥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장을 잇따라 맡았다.
 
지난 7일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원내대표가 당선됐다. 그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 경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127표 가운데 66표를 얻었다. 61표를 얻은 최재성 의원을 8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앞서 1차 투표(128표 참석)에서 이 원내대표 28표, 최 의원은 33표를 각각 얻었다. 하지만 재적 과반(66명) 득표자가 없어 두 사람을 상대로 경선투표가 실시됐다. 역전은 없었다.
 
정치혁신 로드맵
‘클린종걸’ 자처
 
4·29 재보선에서의 참패와 그로 인한 계파 갈등의 위기를 극복하고 1년도 채 남지 않은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가져올 적임자로 당심은 이 원내대표를 택한 것이다. 그는 당선 소감에서 “원내대표 3수 끝에 영광을 주셔서 그 힘으로 해나가겠다”며 “새정치민주연합의 어렵고 참담한 상황을 여유 있게 힘 있게 풀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선거에 패배하고 무시당하고 소수당의 참담한 심정을 더 신중하게 풀어나가겠다”며 “서로 나누고 소통해서 어려운 난국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원내대표 당선으로 대여 관계가 심각한 대척 구도로 기울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현안에 따라 강경 성향이 도드라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원내대표는 선수가 늘어가면서 의회주의자 면모 역시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다. 이날 당선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 원내대표는 "공적연금의 강화를 먼저 처리하겠다"면서도 "국민의 불편이 없도록 지난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했던 민생 입법들을 이달 중에 처리하도록 합의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이 원내대표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청문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독립운동 할아버지 영향
독재정권 학생운동 주도
 
이 원내대표는 정계 입문 초기에는 당시 다수파였던 DY(정동영)계로 분류됐다. 하지만 18대 국회 이후로는 사실상 계파가 없는 ‘중도파’로 분류된다. 그는 19대 국회에 들어서는 김한길계로 분류되고 있다. 중도 온건 성향 의원 모임은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 소속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 원내대표에게는 투사의 이미지가 서려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적인 행보로 이 원내대표를 강경 이미지로 기억하는 여당 의원들이 적지 않다. 
 
실제 5명의 원내대표 후보 중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가장 괴롭힌 의원 중 한사람이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이 원내대표가 되레 까다로운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당내에서 이 원내대표가 ‘럭비공 리더십’ ‘비노 강경파’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제16대 총선 때 출마해 여의도에 입성한 이 원내대표는 당시 당내 ‘대여 공격수’로 이름을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비판하던 과정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졸개’로 비하했다가 논란을 일으켰다. 또 2012년 때는 트위터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그년’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내대표 경선 투표를 앞둔 정견발표에서 "투쟁과 화합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대여 투쟁의 선봉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여야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당선 뒤에도 향후 공무원연금개혁 법안 무산에 대해 여당에 책임을 물으며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 생각한다. 야당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을 짓밟았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어 “새누리당이 스스로 파기한 약속 불이행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도 경고했다.
 
약자 위해 뛰었다
국민들 위해 뛴다
 
이번 대여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지는 공무원연금개혁의 향후 처리 과정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은 “당장 여야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지는 않겠지만 우윤근 원내대표 시절보다는 갈등과 대결 구도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원내대표도 협상만으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원내대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향후 여야 관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 이종걸은?
 
▲서울 종로(1957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사법시험 30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기획간사 
▲노무현 대통령 후보 수행실장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18대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장 
▲경기 안양 만안구 4선 국회의원(16∼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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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