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원로 릴레이인터뷰> ⑨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

"정치권이 변해야 기업·사회도 변합니다"

[일요시사=정치팀] 여야의 정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2014년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다. 이럴 때 정계원로의 충고 한마디는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한줄기 빛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이정표를 잃어버린 정치권의 탈출구는 어디일까? <일요시사>에서 준비한 정계원로들과의 릴레이인터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일요시사>가 이번호에 만난 정계원로는 김영진(68) 전 농림부 장관이다.

김영진 전 장관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 사환에서 시작해 5선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등을 지낸 입지전적인 정치인이다.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 농민운동을 하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는 시련을 겪은 김 전 장관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이우정, 박영숙, 임채정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16대 국회까지 내리 4선을 지낸 뒤에는 참여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완공을 눈앞에 둔 새만금사업 중단을 결정한 사법부의 판단에 항의해 장관직을 맡은 지 5개월도 채 안돼 스스로 사퇴했지만, 야인으로 대법원까지 가는 지난한 법정투쟁을 벌여 결국 새만금사업을 정상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18대 총선에서 당선(광주 서구을)되며 5년 만에 원내에 5선 의원으로 복귀한 그는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장을 맡아 재임 중 5·18을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쾌거를 이뤄냈다.

하지만 19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연대의 희생자로 다시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현재 원내에 있을 때 못지않게 다방면의 분야에서 활발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정치권에 정치가 없다'는 말이 회자되는 요즘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정치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에 <일요시사>에서는 지난 8일 김 전 장관을 만나 그의 삶과 정치권의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다음은 김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 19대 총선 공천에서 낙천한 이후 당시 낙천한 현역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셨습니다. 주변에선 무소속 출마를 권유한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후회가 없으신지요?
▲ 19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연대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통합진보당은 김선동 의원의 지역구인 전남 순천 곡성군, 이정희 대표가 출마하기로 한 서울 관악을, 그리고 제 지역구였던 광주 서구을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결국 민주당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레 민주당 간판으로 19대 총선에 나설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지역 종교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유네스코기록물로 등재한 제가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며 무소속 출마를 권유했지만, 신익희·조병옥·장면·김대중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이어온 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 당시 민주당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당 최다선 중진의원 3인 중 유일하게 당에 남았는데, 보상 같은 것은 있었는지요?
▲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당에서도 (보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새로운 정치를 일구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난 3월16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통합한 새정치민주연합 창당발기인대회에 고문으로 참여했습니다.

- 당이 김 전 장관님께 해준 것 없이 희생만 강요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 지난 총선을 앞두고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모셨던 최측근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전 의원 등도 모두 당을 나갔습니다. 저까지 나가게 되면 60여년을 이어온 당의 정통성에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쪼개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을 때도 저는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 민주당에 남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총선에서도 탈당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 결국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끝으로 다시 정치적으로 야인이 됐습니다.
▲ 2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원외로 첫발을 내딛을 때 저도 사람인지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섭섭함도 있었고 때로는 개탄스럽기도 했지요.

그러다 여태까지 제가 국민들께 받았던 사랑에 비해 나눔은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역 노숙인들을 위한 센터인 (사)해돋는마을에 전화를 걸어 돕고 싶다고 했고, 현재는 해돋는마을의 이사장으로 노숙인, 독거노인 등 어려운 분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정치권에 있을 때보다 더 삶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현장에서 어려운 분들의 아픔과 고난을 보며 안에 있을 때(국회의원 재직)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TV를 보면 살인, 성폭행 등 끔찍한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며 사회가 각박하다고 느끼게 되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사랑의 온도가 아직 높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다만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해 사랑의 온기가 아랫목을 넘어 윗목까지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갑'들이 '을'의 고통을 눈여겨보고 더불어 사는 모습을 갖춰 나가야합니다.
 

- 지난 2003년 7월 참여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은 지 5개월도 채 안돼 법원의 새만금사업 중단 판결에 항의해 장관직을 사퇴하셨습니다. 당시 상황과 심경이 궁금합니다.
▲ 저는 시골 우체국 사환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제가 학비를 벌어 강진농업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면소재지에서도 손꼽히는 빈농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농촌, 농업, 농민의 현실과 삶을 절감하고 자랐지요.

그래서 30대 초반에 농민운동에 뛰어들었고, 어쩌다보니 4선 의원을 거쳐 농림부 장관에 부름을 받았을 때 가슴이 벅찼고, 사명감과 소명의식도 나름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정부에서 시작해 15년간 이미 공정이 90% 이상 진척된 새만금사업을 중단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도 그때의 정치적 결단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 당시 서·남해안에 새로운 간척사업을 진행한다고 했다면 저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무리단계에서 카운트다운만 남은 거대 국책사업을 30대 젊은 법관이 현장검증도 없이 중단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대통령에게 '이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주무장관으로 제가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5년간 대법원까지 판결을 끌고 간 끝에 결국 승소해 새만금은 살아났습니다.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갑'이 먼저 '을'과 더불어 살도록 노력해야"
"글로벌시대, 한·중·일 협력 강화 시급한 현안"

- 한·일 기독의원연맹의 창설자 겸 상임대표로 현재도 우리에게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정부는 과격한 우경화 행보를 보이며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는 모양새입니다.
▲ 한·중·일 협력 강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현안입니다. 전 세계인구 70억명 중 아시아에 절반인 35억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 규모를 감안하면 글로벌 사회에서 아시아의 발언권과 목소리는 높아야 하지만 현실은 미국과 EU(유럽연합)가 결탁해 지구촌의 지분과 이익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청산을 둘러싼 담이 높고 패인 골이 깊기 때문인데, 한·중·일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아시아는 지구촌에서 계속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일본의 우경화 행보를 덮고 무조건 보듬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 일본의 우경화가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은 잘못됐고, 분노할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국민들은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치적으로 닫힌 한·일관계를 풀기는 어렵지만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으로는 얼마든지 가까워질 여지가 있고 이 부분들에서 교류가 활발히 이뤄진다면 일본도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한·일 관계도 치유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경색된 한·일관계, 문화·종교·사회적으로 풀어야"
"4·19혁명, 2년 내 유네스코기록유산 등재할 것"

- 지난 2011년 5·18민주화운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 추진위원장을 맡아 우여곡절 끝에 유네스코 등재를 성사시킨데 이어 지난해 10월부터는 4·19혁명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됐는지요?
▲ 한국 근현대사에서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은 3대 민족·민주·평화 운동입니다. 5·18은 이미 등재가 됐고, 다음 차례로 4·19혁명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 4·19혁명 유네스코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이사장을 맡아 등재를 위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최종 등재까지는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여야의 극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작금의 정치권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정치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무척 부끄럽습니다.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돼 이합집산하고, 다툼이 심화된 현재의 정치권은 달라져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세력이 현실을 잘 진단하고 열린 보수와 겸손한 개혁으로 처방전을 내렸으면 합니다. 국회가 변화면 재계도 변하고, 사화, 문화 등 여러 분야도 달라질 것입니다.

- 박근혜정부의 성공을 위한 조언도 한마디 해주시지요.
▲ 박근혜정부는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을 승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관련한 심적 부담은 많이 안고 출범했습니다. 때문에 과거 정권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떨쳐버리려는 노력과 분산된 국론을 모으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탕평인사가 아닌 특정인사만 기용하며 인사에도 지속적으로 부작용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도 개선해야 합니다. 이제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만큼 아직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심기일전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 성공한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다.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 밖(원외)에 나와 보니 실사구시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진작 국민들이 뭘 보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아쉬워하는지 살폈어야 했는데 부족한 면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밖에서 쓴 영약을 먹고 있는 셈이지요. 앞으로 20대 총선을 준비할 예정인데, 원내 교두보를 확보해 지금 하고 있는 각종 봉사활동, 해외동포 법적 지위 향상 등의 활동을 더 확산시키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허주렬 기자 <carpediem@ilyosisa.co.kr>

 

<김영진 전 장관 프로필>


▲ 5선 국회의원, 제53대 농림부 장관
▲ 광주대학교 석좌교수
▲ 세계한인교류협력기구 상임대표
▲ (사)국제사랑재단 대표회장
▲ (사)해돋는마을 이사장
▲ (사)5·18광주 UN/유네스크 등재 및 아카이브센터 이사장
▲ (사)4·19혁명 UN/유네스코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 이사장
▲ UN/유네스코 아·태 교육의원연맹 의장
▲ 한·일 기독의원연맹 창설자 상임대표
▲ 세계기독의원연맹 창설초대회장
▲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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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