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4·19는 왜 다시 독재 불렀나

혁명 성공했지만, 정치는 실패

4·19 혁명 66주년 기념식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4·19 정신이 발전해 빛의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계보를 잇는 상징적 발언이다. 실제로 4·19는 5·18 민주화운동에 이어 6월항쟁까지 이어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4·19 이후 불과 1년 만에 우리는 5·16 군사정변을 맞았고, 그 뒤 28년의 군사 권위주의 체제하에 있었다.

그렇다면 4·19는 완전한 성공이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독재를 가능하게 만든 절반의 성공이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혁명의 성과만 기념해 왔지, 그 이후 1년의 실패는 외면해 왔다. 이제는 그 공백을 직시해야 한다. 진짜 반성은 거기서 시작된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국가는 준비되지 않았다= 4·19 혁명은 분명 성공이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졌고, 시민의 힘이 권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총칼이 아니라 거리의 함성과 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었다. 그 자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혁명은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을 뿐, 새로운 국가를 설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 이후의 질서’다. 그러나 그 질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기존 체제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안정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 운영의 연속성이 끊겼고, 권력은 공백 상태에 들어갔다. 민주주의는 선언됐지만, 작동할 구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국가는 방향 없이 흔들리는 상태에 놓이게 됐다.

4·19는 ‘끝난 혁명’이 아니라 ‘시작된 과제’였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완성된 사건으로 소비했다. 그 순간부터 민주주의는 관리되지 않았고, 방치되기 시작했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국가는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이후 1년의 혼란을 초래했다. 그 공백은 결국 다른 권력에게 기회를 내주는 구조로 이어졌다.

권력은 분산됐지만, 책임은 사라졌다= 4·19 이후 등장한 내각책임제는 권력 분산이라는 측면에서는 진전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국정 운영의 중심은 총리 장면이었다. 겉으로 보면 권력 집중이 해소된 구조였고,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임의 분산’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당 내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권력은 나뉘었지만 하나로 작동하지 못했다.

대통령 윤보선은 권한이 제한된 상징적 존재에 머물렀고, 총리 장면은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국회는 민주당 구파와 신파로 쪼개져 끊임없는 갈등을 반복했다. 누구도 국가를 책임지는 중심이 되지 못했다. 권력은 존재했지만 작동하지 않았고, 책임은 존재했지만 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능 정지 상태에 가까웠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나누는 제도가 아니라 책임을 분명히 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1960년의 권력구조는 그 반대로 작동했다. 민주당이라는 단일 여당 체제였음에도 내부 분열은 오히려 더 심각했다. 이 구조 속에서 국가는 방향을 잃었고, 결국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질 조건을 갖추게 됐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군부였고, 정치의 공백은 결국 군사정변으로 이어졌다.

장면정부, 이상은 있었지만 실행은 없었다= 장면정부는 도덕성과 명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군사정권과 대비되는 ‘민주적 정부’였다는 상징성도 분명하다. 그러나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 즉 실행력에서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냈다. 정치적 타협과 절차는 있었지만, 결단과 추진력은 부족했다. 민주주의의 형식은 갖췄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힘은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 위기와 실업, 사회 불안이 동시에 겹쳐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해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정책은 논의됐지만 실행되지 않았고, 개혁은 선언됐지만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국민의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바뀌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국정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좋은 의도’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기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증명된다.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보여줬지만, 현실의 국가 운영에서는 실패했다. 이 실패가 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되면서, 군사 개입의 명분을 만들어줬다.

정치인은 혁명을 소비했고, 국가는 방치됐다= 4·19 이후 정치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가 재건이 아니라 권력 재배치였다. 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정치의 중심이 됐다. 국민이 기대했던 것은 새로운 국가였지만, 정치가 보여준 것은 새로운 권력 경쟁이었다. 혁명의 에너지는 제도로 전환되지 못하고, 정치 내부에서 소모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혁명은 과거를 나누는 자원이 되고 말았다.

국회는 정책의 장이 아니라 계파의 전장이 됐다. 인사 갈등과 자리 다툼이 반복됐고, 국가 운영은 뒤로 밀렸다. 국민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정치에 대한 피로감만 쌓여갔다. 민주주의는 시작됐지만, 정치의 수준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정치는 움직였지만, 국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에 대한 불신은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결국 혁명은 국민이 했고, 그 성과는 정치가 가져갔다. 그러나 그 정치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약화시킨다. 이 시기 정치의 가장 큰 실패는 무능이 아니라 ‘책임 회피’였다. 그것이 국가를 방치 상태로 몰아넣었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결국 체제 자체를 흔들게 된다. 그 균열은 결국 다른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틈으로 이어진다.

희생은 국민이, 보상은 정치가 가져갔다= 4·19 혁명은 피로 쓰인 역사였다.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서 쓰러졌고, 그 희생이 정권을 무너뜨렸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목숨 위에 세워졌다. 이 사실은 절대 가벼울 수 없다. 그날의 총성과 함성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체제를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 피는 권력을 무너뜨린 힘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은 희생한 국민이 아니라 정치인이었다. 거리의 주인공은 사라지고, 권력의 주인공만 남았다. 그 구조 속에서 희생은 기억으로만 남고, 보상은 정치의 몫이 됐다. 혁명의 정당성은 정치의 자산으로 전환됐고, 국민은 다시 주변으로 밀려났다. 희생은 기념일로 남았지만, 책임은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 구조는 이후에도 반복된다. 5·18도, 6월항쟁도 촛불도 같은 패턴을 가진다. 민주주의의 비용은 국민이 지고, 그 성과는 정치가 가져간다. 문제는 그 정치가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희생은 다시 반복된다는 점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구조 속에서 되풀이되기도 한다. 희생이 반복되는 이유는 부족한 용기가 아니라, 책임지지 않는 권력 때문이다.

경제 불안과 사회 혼란이 체제 흔들었다= 1960년의 혼란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제 상황도 심각했다. 실업은 늘었고, 물가는 상승했으며, 사회 전반에 불만이 퍼져 있었다. 정치가 불안정할수록 경제는 더 빠르게 흔들렸다. 정치의 불안은 곧바로 시장의 불안으로 이어졌고, 그 충격은 서민의 삶을 직접 압박했다. 민주주의는 시작됐지만, 국민이 체감한 현실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책은 지연됐고, 실행은 미뤄졌다. 국민은 점점 체제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국정은 논의만 반복됐고, 결정과 실행은 뒤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정치권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됐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불안과 결합하면, 질서에 대한 요구가 강해진다. 결국 국민은 자유보다 안정, 절차보다 결과를 더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민주주의는 스스로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다른 권력이 개입할 명분을 내주게 된다. 이때 군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5·16은 우발이 아니라 필연에 가까웠다= 5·16은 흔히 갑작스러운 군사 쿠데타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치가 흔들리는 동안 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정치가 결정을 미루는 사이, 군은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권력이 비어 있는 공간은 결코 오래 비워지지 않는다. 그 공백을 먼저 읽은 집단이 결국 권력을 가져간다. 5·16은 돌발이 아니라, 준비된 진입이었다.

당시 군 내부에서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개입 논의가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일부 장교 집단은 정치권을 무능하고 분열된 집단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개인의 야욕이 아니라 구조가 만든 흐름이었다. 군은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을 스스로 부여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스스로 권위를 잃을수록, 군의 명분은 더 강해졌다. 결국 개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5·16은 하루아침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1년 동안 누적된 정치 실패의 결과였다. 민주주의는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무능으로 붕괴됐다. 이것이 더 무서운 지점이다. 무너진 것은 제도를 운영하는 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약해진다.

우리는 정신만 계승하고, 실패는 반복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은 계속해서 4·19를 소환했다. 5·18도 6월항쟁도 그 정신 위에 서 있었다. 거리의 함성과 시민의 참여,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된 흐름은 모두 4·19에서 시작됐다. 4·19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자체는 분명한 성과다. 그 정신은 시대를 넘어 반복 소환되며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문제는 정신은 계승됐지만, 운영은 반복 실패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의 책임 문제는 계속 반복됐다. 권력은 바뀌었지만, 운영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정치의 구조와 행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진전됐지만, 정치의 수준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우리는 4·19를 기념했지만, 4·19 이후의 실패는 학습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구조가 반복됐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적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성공의 기억만 남고 실패의 교훈은 지워졌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 기억을 직시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같은 실패를 다시 선택하게 된다.

민주화는 반복됐지만, 정치의 반성은 부족했다= 5·18과 6월항쟁은 민주화를 위한 또 다른 4·19였다. 시민의 희생과 용기가 다시 한번 역사를 바꿨다. 거리의 힘이 권력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반복됐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그 이후의 정치는 과연 달라졌는가. 혹시 또다시 권력은 나눠졌고, 책임은 흐려진 것은 아니었는가. 민주화는 반복됐지만, 정치의 반성은 충분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민주화 이후 정치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다. 권력은 교체됐지만, 정치의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계파 갈등과 권력 다툼은 여전히 반복됐고, 국정은 종종 뒤로 밀렸다. 민주주의를 만든 힘은 국민이었지만, 그 이후의 운영은 정치가 맡았다. 그 과정에서 정치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다.

촛불혁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차지한 정부 역시 이 반복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권을 얻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운영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역사는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결국 정권을 잡았다는 만족에 머무는 순간, 그 정치 역시 4·19 이후 1년의 실패와 다르지 않다.

민주화 이후, 정치인의 책임은 훨씬 무겁다= 민주화 운동은 국민이 한다. 희생도 국민이 감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국가는 정치가 운영한다. 이 지점에서 책임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진다. 거리에서의 용기는 제도로 이어져야 하고, 그 연결은 정치의 몫이다. 국민은 체제를 바꾸지만, 정치인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완성해야 한다. 이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출발선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치인은 민주화의 수혜자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2배 이상 무거워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은 가벼워졌고, 책임은 흐려졌다. 권력은 나눠졌지만 책임은 분산됐고,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반복됐다. 정치적 성과는 공유되지만, 실패의 책임은 회피되는 방식이 고착됐다. 그 결과 정치의 신뢰는 축적되지 않고 소모되기만 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시민의 힘으로 세워진 정부가 실패하면, 그 피해는 다시 국민에게 돌아간다. 4·19 이후 1년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그 이후의 정치다. 혁명은 방향을 바꾸지만, 정치는 그 방향을 지속시켜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면 민주주의는 다시 과거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완성은 거리에서가 아니라, 권력 운영의 책임에서 결정된다.

이제는 ‘4·19 이후 1년’을 가르쳐야= 이제 곧 5월16일이 다가온다. 우리는 4·19는 기념하지만, 5·16은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 단절이 문제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으로 축적돼 왔다. 우리는 승리의 기억은 반복하면서도, 불편한 진실은 조용히 밀어내 왔다. 그러나 역사는 성과보다 과오에서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승리만을 기념하는 역사는 온전한 역사가 아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4·19 이후 1년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민주주의는 쟁취보다 운영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권력을 유지하고 책임지는 것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다. 그 공백이 어떻게 체제를 무너뜨렸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는 반복이 아니라 축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4·19의 진짜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해야 할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결국 정치가 져야 한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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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BBQ 정보 유출 사건’ 위증 재판으로 확대⋯박현종 목줄 잡혔다

[단독] ‘BBQ 정보 유출 사건’ 위증 재판으로 확대⋯박현종 목줄 잡혔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로 확정된 사건이 다시 법정으로 끌려 나왔다. ‘BBQ 내부망 불법 접속’ 사건의 핵심 증거였던 ‘ID·비밀번호 메모장’을 둘러싼 위증 여부를 다투는 후속 재판이다. 박현종 전 bhc 회장의 집행유예가 확정된 사건임에도 검찰은 관련 증인들을 위증 혐의로 직접 고발했다. 핵심은 과연 BBQ 직원의 ID와 비밀번호가 적힌 그 메모장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유창성 전 bhc 정보전략팀장의 손을 어떻게 거쳐 전달됐는가다. 그리고 그 과정을 둘러싼 법정 진술의 신빙성이다. 검찰은 최근 공판에서 “피고인(박현종 등)에게 유리한 허위 증언이 반복됐다”는 판단 아래 유 전 팀장 등 관련자 3명을 위증 혐의로 고발했다. 메모장 전달자 통상 위증 여부는 재판부 판단 이후 별도 절차로 넘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처럼 검찰이 직접 칼을 빼든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단순한 진술 번복이나 기억 착오 수준이 아닌 사건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허위 진술이 있었다고 본 셈이다. 이번 공판의 중심에는 ‘메모장 전달자’로 지목된 유 전 bhc 정보전략팀장이 있다. 그는 과거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로 채택된 BBQ 직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를 박현종 전 bhc 회장에게 전달한 인물이다. 이 메모장은 박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는 핵심축이었다. 이 메모장의 출처와 작성 경위가 흔들리면, 사건 전체의 구조도 다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이 박 전 회장에게 건넨 메모장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았다. 메모장에 기재된 임직원 계정 정보 뒤에는 ‘퇴사자 임시’라는 내용이 덧붙어 있었다. 이는 BBQ 내부망에서만 확인 가능한 정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외부에서 추정이나 기억만으로 재구성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성명불상자가 BBQ 내부망에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해 계정을 취득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를 유 정보팀장을 거쳐 박 전 회장에게 전달했다는 구체적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재판부 역시 “기억과 추리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떠올렸다는 설명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며 검찰 주장에 일정 부분 무게를 싣는 듯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재판부는 “특정한 심증을 가진 것은 아니”라며 추가 심리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피고인 측은 거칠게 반격했다. 변호인은 검찰 주장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bhc와 BBQ가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상황에서, bhc 소속 직원이 BBQ 내부 직원과 접촉해 계정 정보를 빼냈다는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다. 나아가 검찰이 실제 내부망 침입을 입증하지 못한 채 추측만을 쌓고 있다고 공격했다. 6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에 리스크 추가 ‘BBQ 직원 ID·비밀번호 유출’ 둘러싼 공방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고인 측은 기존 재판에서 채택된 증거와 증인 진술 전반에 대해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데이터베이스(DB) 조작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사실상 1·2심은 물론 대법원 판단의 기초 자체를 뒤흔드는 주장이다. 확정 판결 이후 재판에서 “증거 자체가 위조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법조계에서도 보기 드문 강수로 평가된다. 유 전 팀장은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근무하다가 bhc 매각과 함께 bhc 정보전략팀장으로 이직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박 전 회장에게 BBQ 직원의 개인정보를 적은 쪽지를 전달했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인물은 BBQ 재무임원과 재무 실무진이다. 2021년 11월3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박 전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 관련 7차 공판에 유 전 팀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유 전 팀장은 박 회장에게 BBQ 직원의 개인정보를 건넨 이유에 대해 “박현종 회장이 국제상공회의소(ICC) 중재 소송 때문에 BBQ 직원들의 아이디만 필요하다고 했다”며 “해당 직원들의 개인정보가 업무 수첩에 적혀있어 이를 그대로 전달했다. 당시 위법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박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BBQ 직원들의 개인정보와 비밀번호가 있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과 증인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데 대해 묻는 검찰 질문에 유 전 팀장은 “박 전 회장의 진술은 모르겠고 아이디만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유 전 팀장은 BBQ와 bhc의 ICC 중재 소송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소송에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BBQ 직원들의 개인정보 취득 경위와 관련해서는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일할 당시 BBQ 재무임원이 그룹 전산망의 데이터가 다르다고 확인 문의가 왔다”며 “당시 물류 전산망이 바뀐 지 얼마 안 돼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문제 해결을 위해 임원에게 개인정보를 요청해 받은 뒤 이를 업무 수첩에 적은 이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 전 팀장이 개인정보를 받았다고 지목한 BBQ 재무임원은 앞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개인정보를 아무에게도 전달한 적 없다”며 “업무 처리도 유씨가 아닌 다른 직원과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검찰은 유 전 팀장이 그룹 전산망에 접근할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내부 정보 취득 시점이… 유 전 팀장은 재무임원의 개인정보를 취득한 시점에 대해서도 그간 검찰 조사에서 했던 진술을 번복했다. 그는 2011년~2012년 즈음에서 2013년 1월로 시점을 바꿨다. 검찰은 증인에게 진술을 번복한 이유가 물류 전산망이 바뀐 시점으로 맞추기 위함이냐고 묻자 유 전 팀장은 “단순 착오”라고 답했다. 유 전 팀장은 bhc 직원으로 일할 당시 BBQ 퇴사자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검찰 질문에 “자신이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일할 당시 퇴사자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박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답했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의 증언에 BBQ가 퇴사자에게 부여하는 임시 비밀번호를 줄 때 증인이 말한 방식을 쓴 것은 증인 퇴사 이후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이 박 전 회장에게 BBQ 전·현직 직원들의 정확한 개인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bhc가 BBQ의 데이터베이스(DB)를 모조리 빼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박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BBQ 허락하에 BBQ DB를 모두 가져왔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 진술 이외에 검찰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황도 있다. 2013년 6월 말 bhc 매각 이후 bhc는 자체 전산망 구축을 위해 BBQ와 bhc 전산망 분리 작업이 필요했다. 그해 7월2일 외부 업체는 해당 작업이 최소 한달 이상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유 전 팀장과 부하 직원 한 명, 그리고 한달 이상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던 외부업체는 2013년 7월5일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불과 12시간 만에 BBQ로부터 분리된 bhc 전산망을 구축했다. 이와 관련해 유 전 팀장은 “bhc 직원이 100명 남짓에 불과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옮겨 가능했다”며 “BBQ DB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BBQ DB 관련 박 회장과 유씨의 진술이 배치되는 데 대해 유 전 팀장에게 묻자 “자신은 박 회장에게 BBQ DB를 가져왔다고 말한 적 없다”며 “박 회장이 검찰에서 왜 그리 말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다만 유 전 팀장은 노트북 하드 교체 관련 재판 과정에서도 말이 일치하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해킹의 목적 첫 증언에서는 bhc 매각 시기인 2013년 이후 노트북 감가상각 5년을 계산해 2018년에 바꿨다고 했지만 이후 2017년으로 고쳤다. 기존 사건이 ‘불법 접속이 있었느냐’는 사실관계 다툼이었다면, 이번 후속 재판은 ‘그 사실을 둘러싸고 법정에서 거짓말이 있었느냐’는 문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는지 여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2월, 박 전 회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이 BBQ 직원 계정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취득할 수 없었고, 불법적 경로일 가능성을 인식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는 무죄였지만, 정보통신망법 위반은 명확히 유죄로 못 박았다. 그러나 사건은 집행유예 판결로 끝나지 않았다. 검찰이 위증을 별도의 범죄로 끌어올린 이상, 수사는 ‘위증교사’를 밝히는 단계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원이 관련자들의 위증을 인정할 경우, 그 진술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유도했는지가 핵심 수사 대상이 된다. 화살이 결국 박 전 회장을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위증교사는 기존 사건과는 별개의 범죄로, 추가 기소로 이어질 경우, 사법 리스크도 한층 더 커진다. 문제는 입증이다. 위증교사는 단순한 정황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지시나 교감, 사전 조율 정황이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검찰이 이미 “유리한 허위 증언 반복”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고발까지 단행한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가능성 제기를 넘어선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BBQ 출신 정보전략팀장 진술 번복 검, 증인들 위증 혐의로 직접 고발 이 사건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bhc와 BBQ 사이의 오랜 분쟁이다. 박 전 회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에버랜드에서 근무하다가 2012년 BBQ 글로벌 대표로 영입됐다. 이어 2013년 BBQ 자회사 bhc가 미국계 사모펀드에 팔린 뒤 bhc 대표로 옮겨가며 양사 갈등의 중심에 섰다. 2018년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 등과 함께 bhc를 사들여 오너 경영자가 된 동시에 각종 소송과 형사적 리스크의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 이번 사건 역시 단순한 개인 비위가 아니라, 기업 간 치열한 법적 분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검찰에 의하면 박 전 회장은 2015년 7월3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bhc 본사에서 BBQ 직원 2명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무단 도용해 BBQ 전산망에 접속한 뒤 bhc와 BBQ가 연루된 국제 중재 소송 관련 자료들을 살펴봤다. 이로 인해 박 전 회장은 2020년 11월 재판에 넘겨졌다. 아울러 박 전 회장은 유 정보팀장으로부터 BBQ 직원 이메일 아이디, 비밀번호, 전산망 주소가 적힌 메모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6월 1심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입증이 부족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항소심으로 넘어갔다. 항소심 3차 공판 때 검찰과 변호인은 파워포인트(PPT)를 통해 2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먼저 의견 개진 기회를 얻은 변호인은 “BBQ가 여러 차례 박현종 회장을 영업비밀 침해 등의 이유로 고소했지만 계속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며 “그런데 검찰이 정보통신망법을 무리하게 적용해 박현종 회장을 기소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변호인은 “검찰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혐의를 입증한 것도 아니”며 “왜곡 가능성이 큰 간접 증거만 제시됐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현종 회장은 2015년 7월3일 순댓국 프랜차이즈 인수 회의에 참석해 BBQ 전산망에 접속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부연했다. 반면 검찰은 “bhc가 2013년부터 BBQ 전산망에 무단 접속한 횟수가 236회에 달하지만 행위자가 드러나지 않아 기소하지 못했다”며 “박현종 회장은 무단 접속이 명백해 기소했다”고 반박했다. 지시했나 사면초가 검찰은 박 전 회장의 범행 동기에 대해 “2015년 BBQ 직원들이 박현종 회장이 bhc 매각을 총괄했다”는 진술서를 국제 중재 법원에 냈다. 국제 중재 소송에서 질 경우 지위가 불안정해질 수 있었던 박 전 회장은 “해당 진술서를 검토하고 반박해야만 했다”고 했다. 이어 “박현종 회장 휴대전화에서 BBQ 직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은 메모 사진이 나왔다. BBQ 전산망 접속 데이터 분석 결과, 박현종 회장이 BBQ 사내 메일을 포워딩(전달)한 개인 메일을 2년 만에 열람한 기록도 있다”며 혐의를 입증할 물적 증거가 많다고 했다. 검찰은 “2015년 7월3일 순댓국 프랜차이즈 인수 회의 참석자 2명은 박현종 회장을 회의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다”며 박 전 회장의 알리바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smk1@ilyosisa.co.kr>